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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 라이너가 말랑해졌다

by ACCIGRAPHY




여름엔 주로 바다에 있다.


엊그제 칼스배드(carlsbad beach)의 파도는 캉캉치마처럼 겹겹이 보드라웠다. 라구나(laguna beach)는 무릎 높이에서도 나를 휘청이게 했지만 칼스배드는 허리 높이에서도 한없이 무해한 리듬으로 내게 속삭였다.


'해봐! 너도 할 수 있어! 파도 밑은 잔잔해.'


'뭘 해? 설마 오리처럼 파도 밑으로 지나가는 거?'


'어. 너 맨날 남편 그거 하는 거 보고 부러워했잖아. 해 보면 별거 아니야. 모든 바다가 라구나처럼 아프진 않아.‘




자연의 부추김에 잘 넘어가는 나는 칼스배드 파도를 믿어보기로 한다.


물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판판한 돌 위에 자리를 잡고 파도를 관망한다. 약 15초에 한 번씩 물결이 일어나는데 높이는 내 키만 한 것에서 2미터 정도로 이 정도면 잔잔하다. 남편은 파도를 다섯 번 정도 넘어 흰색 구간을 통과하고는 더 이상 파도가 치지 않는 푸른 영역에 도달했다. 저곳이 바다다.


둘 사이에 파도 다섯 개가 끊임없이 출렁인다. 파도 다섯 개만 넘으면 나도 저기 갈 수 있지만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처럼 멀기만 하다. 무섭다. 무서움의 크기 만큼 치솟은 나의 호기심은 크나큰 삶의 불편을 초래한다. 패들보드 타고 넘어본 적은 있지만 맨 몸으로 뚫어본 적이 없기에 그 맨몸의 느낌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남편이 부럽다. 저걸 부러워하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핍감으로 온몸을 칭칭 감았다.


결핍감으로 휘감은 몸에 따가운 더위까지 더해지자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난다. 예열이 완료된 모양이다. 내게 '화'라는 연료가 있음을 잊고 있었다. 씩씩거리면서 파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마침 적당히 해 볼만한 크기의 파도가 눈앞에 들이닥친다.


'셋... 둘... 하나, 흐으읍!'


수영장에서 갈고닦은 잠영 스트로크를 불살라본다. 메디컬 드라마에서 심정지 환자에게 전기 충격을 가할 때 흉부가 들리듯 온몸이 순간적으로 '들썩'한 순간, 더 열렬히 손 발을 아래로 휘저음으로 파도 위로 딸려 올라갈 위기를 벗어난다. 귓속에는 보글보글 와글와글 물방울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로 떠들어댄다.


'어머머머! 얘 진짜 했어!'

'대애박! 생각보다 잘해! 어머머!'

'거의 다 통과했어! 거 봐 별거 아니지?'


맨몸으로 파도 다섯 개를 뚫고 남편이 있는 푸른 영역에 도달한다.


나는 마치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얼굴에 남은 뿌듯함을 급히 지워버리고 남편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같은 물에 놀게 된 이상 나는 이제 남편과 동급이다.


부러움이 소멸했다.




아침에 세수를 하고 물기를 닦아내면서 보니 얼굴이 많이 탔다.


뭐라도 그려야 사람 형상이 될 것 같아서 회생이 불가했던 젤 라이너를 무심하게 열어본다. 얇은 브러시로 쿡 찍어 역시 무심한 손길로 그려보는데 어랏!


발림이 거의 처음 상태로 돌아가 있다. 오오오오 놀랍다! 굳어서 죽은 줄 알았던 검은 가루에 적당한 유수분을 섞어 수일을 방치했더니 다시 쓸만해졌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좋지? 파도 맨몸으로 뚫었을 때의 쾌감을 넘어선다.


흐흫히힣.




남편이 좋아하는 쪼리 브랜드. 첫 만남 때도 저걸 신고 있었다. 아주 사람이 한결같기가 그지없다.
호박이 열리기만 하고 크지를 않아서 농사에 재주 없는 줄 알고 낙담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다람쥐들이 호박이 달리는 족족 다 따먹는 것이었다. 다람쥐 너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