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캘리포니아 한글날

by ACCIGRAPHY




어제는 예고한 바,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개최된 한글날 행사에 글씨를 쓰러 갔다. LA소재 재외공관, USC 한국학연구소의 공동 주최로 이루어진 행사로, 캠퍼스 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름을 딴 아담한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USC내에 도산의 이름이 걸린 공간이 있다는 흐뭇함도 잠시, 생각보다 협소해서 보자마자 맷과 레베카를 괜히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살살해도 될 사이즈 같아 바쁜 애들 괜히 불렀네 속상했지만 심호흡 한번 하고 힘찬 얼굴로 갈아 끼웠다.


USC 측에서는 내가 사용할 부스를 미리 설치해 두었는데 다소 구석진 자리였고, 학교 측 부스가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전 합의된 시나리오가 아니었지만 공동주최 행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 크게 스트레스 받지는 않았다.


맷은 이 상황을 보자마자 내 부스를 사전 협의된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당황한 학교 측 담당자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어... 거기가 앞쪽이라 자리는 좋은데, 많이 더울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더운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물론 저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적당히 모른척하고 빵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행사만 잘 된다면 더운 건 감내해야죠.“


진심이었다.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분도 미소로 화답했다.


맷은 귀신같이 내가 원하는 모양새로 부스를 다시 설치했고 (맷 이야기: https://brunch.co.kr/@accigraphy/252 ) 나는 오롯이 글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쓰는 행위에 몰입하다보면 나는 뜨거운 사람이 되어 있고, 이 뜨거움은 퍼지는 성질이 있어 주변이 말랑말랑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살아있다. 행복하다.




학생들이 얼마나 예쁜지.


뭐만 해도 꺄르르 꺄르르 너무 귀여웠다. 줄 하나 그으면 "우와~!" 뜻 설명해 주면 또 까르르. 안 그래도 웃음부자인 나는 이 맑고 광명한 존재들로 인해 하루종일 영혼의 샤워를 당하고 말았다.


"저... 혹시 '태이구' 써 쥬실 슈 있어요?"


교포 억양의 한국말로 한 소녀가 부탁을 해온다. 태이구가 뭐냐고 묻자 한국에 있는 도시라고, 자기 부모님이 대구 출신이라 부모님께 선물할 거라며...


만감이 교차했다. 대구에 있는 조카들, 언니들, 동생, 엄마, 아빠 얼굴이 스르륵 스쳐 지나갔다. 일본에 있는 조카들, 언니, 형부도 스르륵. 몇 달 전에 다들 만나고 왔지만 이역만리 타향에서 대구 아이를 만나니 또 기분이 묘했다.


열여섯 살 때, 새벽 등교를 좋아했던 나는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운동장을 천천히 돌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불현듯 한국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커서 어떤 나라에 살건 향수병은 나지 않겠구나 싶었다.


아직 그 생각엔 변함이 없고

향수병 걸린 적은 없지만


애틋함은 말로 못한다.




한글날은 캘리포니아주 공식기념일이기도 하다. 재정된지 올해로 4년이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