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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유목

by ACCIGRAPHY


나는 대부분의 글씨체를

길바닥에서 만들었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길바닥 말이다.


내 첫 글씨체인 나비체는

베른(Bern)에서 만들어졌는데


아케이드가 많은 곳을 걸어 다니다가

맘에 드는 스팟을 발견하고는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날이 너무 추워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숫자 8을 그리면서

손을 풀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나비 나는 모양 같기도 하고

무한대 기호 같기도 했다.


적당히 손에 열기가 다시 돌아와

그 리듬과 방향으로

한글을 써 봤는데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세계일화 (만공선사의 시, 나비체) 120*60cm, 이합장지에 먹, ACCI CALLIGRAPHY 2014




나는 이 새로운 모양이

자칫 어딘가로 도망가 버릴까 봐

내가 아는 모든 한글 단어를

그 자리에서 적고 또 적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적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내 주변으로 원형의 관객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게 한글이고, 나비체라고 말했다.


장자에 나오는 나비와

무한대 기호의 움직임을 따서 만들었다고

무의식의 흐름대로 읊었다.


무의식의 흐름이지만 사실이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철학자가 장자였고

호접몽과 무한대 기호가

무관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철학자들은

내 안에 산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의 일부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표상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BFE3DC8E-255F-46C6-A02C-6C59D8412B62 2.jpg 인사동, ACCI CALLIGRAPHY 2004




사람들은 나비체 한글로

자신들의 사랑하는 연인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의 이름을 보고 싶어 했다.


다행히 내 손에는

아까 날아온 나비가 아직 들어있어서

그들에게 그 이름들을 보여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나비체 이야기를 다시 해달라고 했다.


그들의 친구와 가족들 중에는

사진 찍는 사람

갤러리스트

타투이스트 등

재밌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나와 이런저런 작업을

함께하길 희망했다.




나는 감사했고

재밌었고

그 글씨를 가지고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나는 사라예보에서 브뤼헤까지

홍대에서 인사동까지

길바닥에서만 얻어지는

손의 움직임을 수집했다.



5F7766D8-083E-481A-B767-92A29B83AE94.JPG Arts District, Los Angeles, ACCI CALLIGRAPH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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