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부분의 글씨체를
길바닥에서 만들었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길바닥 말이다.
내 첫 글씨체인 나비체는
베른(Bern)에서 만들어졌는데
아케이드가 많은 곳을 걸어 다니다가
맘에 드는 스팟을 발견하고는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날이 너무 추워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숫자 8을 그리면서
손을 풀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나비 나는 모양 같기도 하고
무한대 기호 같기도 했다.
적당히 손에 열기가 다시 돌아와
그 리듬과 방향으로
한글을 써 봤는데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나는 이 새로운 모양이
자칫 어딘가로 도망가 버릴까 봐
내가 아는 모든 한글 단어를
그 자리에서 적고 또 적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적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내 주변으로 원형의 관객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게 한글이고, 나비체라고 말했다.
장자에 나오는 나비와
무한대 기호의 움직임을 따서 만들었다고
무의식의 흐름대로 읊었다.
무의식의 흐름이지만 사실이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철학자가 장자였고
호접몽과 무한대 기호가
무관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철학자들은
내 안에 산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의 일부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표상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나비체 한글로
자신들의 사랑하는 연인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의 이름을 보고 싶어 했다.
다행히 내 손에는
아까 날아온 나비가 아직 들어있어서
그들에게 그 이름들을 보여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나비체 이야기를 다시 해달라고 했다.
그들의 친구와 가족들 중에는
사진 찍는 사람
갤러리스트
타투이스트 등
재밌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나와 이런저런 작업을
함께하길 희망했다.
나는 감사했고
재밌었고
그 글씨를 가지고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나는 사라예보에서 브뤼헤까지
홍대에서 인사동까지
길바닥에서만 얻어지는
손의 움직임을 수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