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어지는 일
남편 봄방학이라 이스탄불에 왔다.
오랜만에 장거리 이동을 하면서 내 몸에 대한 새로운 앎을 얻게 되었는데, 나는 비행기를 10시간 정도는 큰 무리없이 탈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려운 사람이라는 사실.
비행시간이 길면 길겠거니... 서 너 시간 더 긴게 뭐 대수겠냐며 아무런 심적 준비 없이 올라탔는데, 10시간이 지나자 슬슬 숨 쉬는 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징소리 + 식은땀 + 메스꺼움이 동반된 범상치 않은 두통에 남은 시간 동안 정신줄을 잘 잡아야겠다 싶어 심호흡을 시작했다. 옆에 자는 남편에게 아픈 상태를 알리면 고통이 줄어들기 보다는 커질 것이 확실하므로 - 상황과 무관하게 매사 꾸준히 안정적인 리액션이 가끔 나를 돌게함 - 입 꾹 닫고 홀로 들이쉬고 내 쉬는 고독한 싸움을 두 시간 여 이어나가고 있는데,
마지막 한 시간이 고비였다. 착륙 전 제공되는 아침 식사 냄새가 파도처럼 밀려왔고, 이내 위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제 정신력으로 어찌 해 볼 영역을 벗어났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쳤다.
"... 나 토할 것 같아."
평온한 표정으로 오믈렛을 오물거리던 남편은 아니나다를까 의연히 포크를 내려놓고 침착하게 비상구쪽으로 나를 인도했다.
남편은 내 다리를 주무르고, 나는 풀린 눈으로 멍하니 남편을 응시하는 가운데, 마음씨 따뜻한 터키 사람들 몇 명이 주변에서 내 손과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승무원들이 물이랑 체리주스를 가져다줬으며, 비행기 내리자마자 병원에 실려갈 수 있도록 공항에 의사를 대기시킬테니 안심하라는 둥, 동네방네 구경난 이 모든 상황이, 아파서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너무나 민망하고 또 민망한 가운데
신기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옆에서 우르르 사랑의 눈길로 바라봐주니 금새 괜찮아지는 게 아닌가. 난리통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분석을 해보니 그거 밖에 없었다. 약자를 돕고자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의 눈빛에는 밝고 커다란 에너지가 있었다.
비행기 타고 초반에 멀쩡할 때 남편이랑 매트릭스를 같이 봤는데, 마지막에 트리니티가 사랑의 힘으로 죽은 네오를 깨우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사랑의 힘은 심리적이기 보다 다분히 생리적, 물리적이라는 생각이 몽롱한 가운데 의식의 한 구석에 자리잡았다.
미어캣처럼 주변에 와 있던 터키 사람중에 인상적인 청년이 있었다. 내 코에 레몬향 나는 스프레이를 뿌리고 목에 발라주면서 '너는 곧 괜찮아질거야. 걱정하지마.‘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목소리에 알 수 없는 권위가 있어 문장이 반복될 때 마다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그 사람이 나를 보는 눈빛 - 눈을 보지 않아도 목소리로 전달되는 눈빛 - 이 낯이 익었다. 속으로 '희한하네... 신기해... 왜 이렇게 편안하지?' 하면서도 고개 들어 얼굴 볼 힘이 없어서 속으로 자꾸 '희한하네 신기하네.' 그러고 있었는데,
호텔에 도착해서도 그 얼굴모를 청년이 자꾸 희한하고 신기했다.
오직 주는 에너지로 가득한 태양같은 사람들이 있다. 나이를 불문하고 알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이런 마법같은 사람들을 스쳐 지날 때 마다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신의 사랑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