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남편의 유치원 동기이자 매사 심드렁한 친구(이하 심드렁)네에서 그의 가족과 가까운 친구 몇 명만 모인 자리였다.
그는 이번에도 최대한 심드렁한 표정으로, 부인은 특유의 명랑함으로 우릴 환대했다. 볼 때마다 둘의 아찔한 온도차가 이마를 치게 하지만 이마는 속으로만 치고, 겉으론 정상인이 할 법한 인사를 건넨다. 나는 이 친구들을 좋아하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편하진 않아서 정상인 코스프레를 어느 정도하고 있는데, 아마 내년쯤이면 한층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어떤 관계는 10년 정도 지나면 낯가림이 끝난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이런 나를 데리고 사는 거 너무 고달파).
불편하면 안 만나면 되지 뭐 하러 십 년째 낯가림 중인고 하니, 지금의 나는 내가 여태 만난 사람들로 인해 빚어졌기 때문이다. 그들 덕분에 너는 틀렸고 내가 맞다는 감옥에서 수 없이 탈출할 수 있었고, 나와 다른 라이프스타일, 나이 차가 위아래로 많이 나는 친구들을 통해 불편할 기회가 생겼고, 불편에 기대어 성장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 집안 식구들 중에서 내가 낯가림을 이미 오래전에 해제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심드렁을 낳으신 어머니. 어제도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와 대화하며 보냈다. 자녀 셋을 번듯하게 키웠고,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다움을 구축하여 스스로와 주변을 밝히며 살아간다.
그녀를 볼 때면 세상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범인을 가장한 현인의 삶을 살고 있을지 몰래 유추해 보게 된다. 타락한 위정자들의 반대급부가 자녀들을 곱게 키워 낸 할머니들이 아닐까. 그래서 지구의 도덕 수준이 이만큼이나마 유지되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세상 모든 할머니들을 향한 열렬한 부채의식을 지니고 산다.
물론 할아버지들도 같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아무래도 우리에게 미토콘드리아를 주신 분이 여성이고 낳다가 죽을 뻔 한 분도 여성이며 젖을 먹인 분도 여성이기에 본능의 결에 따라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라고 해야 오늘은 깔끔하겠다.
심드렁의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들 중에서도 알파의 기운이 넘실대는 여성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알파는 남다른 책임감, 그리고 무엇보다 다정함이다. 옆에 앉아 있기만 해도 충전이 된다. 그래서 사람 많은 곳에서 방전될까 봐 계속 옆에 앉아 있었다 (내가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는 유일한 상황은 퍼포먼스 할 때뿐이다. 그때는 사람 많은 게 반갑다).
알파의 아름다움은 내어줄 게 많다는 것이다. 심드렁의 어머니는 그런 삶을 살았다. 유대계 미국인이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지 않고 평생 자신이 사는 집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한 방 한 칸을 마련해 놓았다. 그들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심드렁한 사랑을 주었고, 머지않아 그들은 두 발로 서서 방을 걸어 나갔다. 그 방을 거쳐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최근에는 한 할머니가 그 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심드렁의 어머니는 그녀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내가 낯가림이 심해서 심드렁 친구와 연락을 끊었더라면 그의 어머니에 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 이렇게 불편을 택할 수밖에 없다.
가끔 불편을 찾아 나서지 않고 있을 때면 남편이 옆에서 귀신같이 알아채고 불편을 자아낸다. 언제든지 나를 극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 사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