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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감사

by ACCIGRAPHY




집이다.


너무 좋다. 집에 가만 앉아만 있어도 행복한 나에게 삶은 홀로 텅 빌 시간을 쉬이 허락지 않는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작년보다 시댁에 길게 머물면서 온가족 완전체 혹은 유닛으로 스펙타클한 활동을 펼쳤는데 남편과 나는 그 모든 활동에 참가하였으므로 심신이 너덜해졌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일말의 재미도 올라오는 바람에 막판엔 나도 모르게 살짝 집에 가기 싫은 기분도 올라오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둘째 시누와 하이킹을 하면서 본 해운이었고, 신선했던 순간은 큰아주버님이 추천해준 스티븐 킹 소설 원작의 드라마(Lisey's Story) 해설이었다(큰 아주버님은 스토리텔링에 재능이 있다).


그리고 가장 어이없었던 순간은 시조카들과 동물원에서 동물 카드를 모으느라 한 시간 넘게 줄을 서 있었던 일.


나는 줄 서서 뭘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맛집에 줄을 서느니 바로 눈 앞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는 사람인지라 마지막으로 줄 서본 게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한 마당에 동물 보자고 동물원에 와서는 동물을 보지도 않고 카드 모으느라 그것도 200장 다 모으려면 30번은 더 방문해야 할 그런 상술에 적극 동참하느라 화가 많이 났지만


애기들이 동물 카드가 갖고 싶다는데 어떡해. 입 닫고 줄 서야지. 나도 애기 때 카드 많이 모았고 그때는 카드를 모아야 살 맛이 났고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이제 카드 안 모아도 살 수 있으니까 애기들도 적당히 그 시절의 탐진치를 추구해 봐야지 않겠냐며


그럼에도 나는 추수감사절을 좋아한다. 이름이 왠지 추수에 감사하며 절하는 모습이 떠올라 깜찍할 뿐 아니라 하루종일 느긋하게 요리하면서 시댁 고양이랑 노는 것도 재밌다.


아침에 일어나 경건한 마음으로 각종 향신료와 버터를 버무린 후 칠면조 안팎에 잘 발라준다. 이어서 본격 마사지에 들어가는데, 북경오리처럼 껍질 밑에 손을 살살 집어넣어 버터를 침투시켜야 퍽퍽살의 풍미가 살아나므로 실례를 무릅쓰고 마사지를 감행


4시간 정도 지극정성으로 굽는다. 지극정성은 다른 말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누가 보면 오븐멍 하는 줄 알겠지만 실상은 면밀하게 불을 살피며 시시각각으로 다른 사이즈의 장작을 아궁이에 집어넣는 일에 가깝다. 물론 눈으로만.


내가 영혼 바쳐 칠면조를 굽는 동안 남편은 둘째 누나와 함께 감자샐러드, 크랜베리소스, 스터핑, 캔디드 얨, 햄, 메쉬드 포테이토, 그레이비, 그릴드 베지, 호박파이를 준비한다. 어차피 남편은 음식에 영혼을 바치지 않으므로 저걸 다 하고도 힘이 남아도는 반면, 나는 칠면조 다 굽고 나서 30분 드러누워야 했으므로 여러모로 적절한 업무 분장이 아닌가 생각이 들 무렵 음식이 모두 완성되었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디저트 타임이 되어 남편이 호박파이를 자르는 동안 나는 신라면 하나를 호다닥 끓여 고운 그릇에 담아 신줏단지 모시듯 사뿐사뿐 디저트 테이블로 향한다. 멀리서 그릇만 보고 내용물을 알아챈 큰 시누가 깔깔 웃으며 지영이 또 디저트로 라면 먹는다, 너는 배가 납작한데 밥 다 먹고 라면도 먹고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가당한 일이지. 냄새 풍겨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게 젤 맛있다. 추수감사절 음식은 나에게 미국 음식이고 느끼하고 기름져서 신라면으로 호되게 매우 쳐야 평정을 되찾는단 말이다. 이런 나를 이해해라. 나도 너를 이해할게. 서로 적당히 민폐 끼치면서 자유롭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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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날 아침.

큰 시누 둘째 딸이 나 따라 엘에이 가서 산다고 뒷좌석에 안전벨트까지 매고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약 10분 간의 대치 후 엄마의 무력으로 끌려 나온 딸내미 눈에서 지브리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굵고 소리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섯 살 때는 소리내서 엉엉 울더니 한살 더 먹었다고 눈물만 줄줄 흘리는 모습에 더 마음이 안 좋으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이토록 좋아할 능력이 있는 이 아이가 부러웠다. 사랑은 받는 자의 매력 보다는 하는 자의 권능으로 보여지기에.




시댁냥이 그레이시와 큰시누 둘째 딸. 나는 칠면조 다 굽고 나서 혼자 누워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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