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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Feb 01. 2024

산책하다 주운

유일무이한 오렌지




미국 사람들은 - 아니, 우리 동네 사람들은 - 자기네들 마당에 있는 아보카도, 오렌지, 레몬, 망고 같은 걸 저렇게 대문사진처럼 문 밖에 내다 놓거든? 그래서 이 동네 6년째 살다 보니 '누구 집에 어떤 나무가 이제 수확할 철이 됐겠군' 뭐 이런 게 대충 그려진단 말이야...(내 나무도 아닌데 흐뭇해 죽음) 그래서 가끔은 동네 작물 현황에 따라 내 산책 루트가 바뀌기도 하고... 괜히 함 가 보고 그른단 말이지. 나는 이런 거 얻어먹는 게 왜 이렇게 재밌는지 모르겠어. 공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누군가가 손수 지은 호박, 오이, 뭐 이런 거에는 진짜 큰 욕심이 올라와.


오늘 주운 오렌지는 좀 역대급으로 새콤달콤한 거야. 진짜 너무 맛있어서 오렌지 속살을 엄청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먹었거든? 난 뭐가 너무 맛있으면 폭소가 나오는데 이유는 나도 몰라. 감당이 안 되는 행복감은 일단 폭소로 표현하는 사람인 것 같아. 여튼 그래서 거의 '오렌지 처음 먹어 본 수준의 감각 처리가 일어났다...'는 말씀.


나는 처음 먹었을 때의 순간을 기억하는 음식이 좀 있는 편인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음식은 순대였어. 하루는 동네 친구들이랑 노는데 주영이가 입에 뭘 우물우물거리고 있는 거야. 근데 뭔가 색깔이 마음에 안 들고 시커매. 그래서 물어봤지.


"주영아, 니 입에 그거 머꼬?"

"머? 순대?"

"순대? 순대가 뭔데?"

"순대! 니 순대 모르나?"

"어! 나 모른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설명하기 귀찮았던 주영이는 말 대신 입을 크게 벌려 보이고는 시장에서 파는 거란 말만 남긴 채 도망가버렸어. 뒤돌아보면 여섯 살 주영이에게 어려운 질문이었지(주영이 미안). 나는 광속으로 집으로 달려가 연희를 찾았지.


"엄마! 나도 순대 사줘."

"순대? 알았다. 가자!"


연희는 김 새는 말을 잘하지 않았어. 항상 씩씩했고 잘 웃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게 참 고마워. 언니들 말로는 엄마가 엄청 무서웠다고 하는데 나한테는 그렇게 안 하셨거든. 같은 엄마지만 시간대 별로 다른 연희를 경험한 언니들 말을 들어보면, 한 인간이 지닌 엄마라는 페르소나도 자녀수와 만난 타이밍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게 너무 신기해.


신평리시장 순대할매는 초록 플라스틱 접시에 흰색 봉다리를 씌우더니, 그 위에 순대를 착착 깔았어. 손놀림이 아름다웠던 것 같애. 쫜득한 순대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나도 주영이처럼 우물우물해 봤어.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일까 고민고민하면서 먹었지. 하나를 꽤 오랫동안 우물거리면서 순대의 자성自性에 대해 나름 결론을 내리고, 속으로 말했어.


'이게 순대라는 거구나. 내 취향이군. 이 하얗고 빨간 소금도 맛있어.'


순대를 알았다는 생각이 들자, 두 번째 순대부터는 대충 씹어 넘겼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내 인생의 얼마나 많은 두 번째 순대들이, 두 번째 딸기들이, 있는 그대로 경험되어지지 못하고, 단지 그것의 이름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대충 삼켜졌을까.


나는 살면서 정기적으로 사과 타임 갖는 걸 좋아하거든. 오늘은 내가 살면서 두 번째 순대 취급했던 모든 순간에 사과하는 중이야. 흐름이 급작스럽지? 나도 알아. 근데 오렌지를 먹다 너무 맛있어서 오렌지 이름을 잠시 까먹었을 때, 저 두 번째 순대가 생각이 나버려서 나도 어쩔 수가 없네?


그렇다고 내가 이름을 막 싫어하고 그런 사람은 아니야. 세상 모든 것들에 이름 지어놓은 인간 동료들이 애틋해. 이름 있는 상태, 없는 상태, 둘 다 그냥 누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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