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1일. 어도어가 뉴진스 멤버들을 상대로 제기한 ‘기획사 지위보전 및 광고계약 체결 등 금지 가처분’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은 뉴진스가 어도어와의 계약을 해지해야 할 만한 이유가 없다 보고 가처분을 모두 인용했다. 이후 뉴진스는 새 이름 NJZ를 쓸 수 없는 걸 포함해 어도어의 사전 승인 및 동의 없는 연예 활동도 불가능하게 됐다. 그리고 지난 17일. 서울고등법원은 동일 가처분에 대한 뉴진스 측의 이의신청 항고를 기각했다. 18일, 어도어는 판결에 대해 “뉴진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입장문을 냈다. 뉴진스의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사안이 복잡할 땐 개념과 본질을 살피면 도움이 된다. 뉴진스와 어도어의 대립은 전속계약 분쟁이다. 전속계약이란 법률용어 상에 따르면 “예체능계 노무 제공자가 특정 사업자에게 전속되어 그에게 독점적으로 노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사업자로부터 일정 보수를 지급받는 걸 내용으로 하는 비전형계약”이다. 여기서 핵심은 ‘전속’과 ‘독점’이 강조하는 구속성이다. 그러니까 노무 제공자인 뉴진스는 특정 사업자인 어도어에게 계약상 전속되고 독점된 탓에 자신들의 의지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 현 사태의 핵심이다. 이걸 간과하면 일은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다음은 미국 대중음악평론가인 로버트 힐번의 말이다.
음악 비즈니스에서 매니저, 변호사, 레이블 임원은 ‘음악 산업’이라는 건물의 집주인과 같다. 아티스트는 그저 짧은 기간 동안 거기서 방 하나를 빌리는 것뿐이다. 이 ‘건물주’들은 모두 아티스트가 데뷔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아티스트가 레이블에서 나간 뒤에도 서로를 알고 사업 상 거래하는 사이다. 이들의 관심은 체크인, 체크아웃하는 사람들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건물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데 있다. 물론 성공한 아티스트라면 펜트하우스/스위트룸을 빌릴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자신들을 팔 수 있는 기간에 한정된 얘기다. 중요한 건 아티스트 자신이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다. 하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아티스트들은 너무 순진하다
아티스트와 레이블 간 법정 다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국내외도 초월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해외 사례들은 뉴진스 경우와는 결이 다르다. 예컨대 프린스가 1990년대 초 자신의 얼굴에 ‘노예(slave)’라는 글자를 새기고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현 워너 레코드)와 대립각을 세운 건 아티스트의 독자적 예술 활동권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뉴진스처럼 ‘활동’ 자체를 제재받는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테일러 스위프트도 자신을 10년 넘게 이끌어준 빅 머신(Big Machine) 레이블을 떠나며 창립자 스콧 보체타(Scott Borchetta)와 법정 분쟁을 겪어야 했는데, 이는 자신의 마스터 음원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였다. 이 역시 ‘전속’된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뉴진스 사례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법치 사회에서 법을 넘어 이룰 수 있는 건 없거나 적다. 지금 뉴진스 사태는 감정과 혈기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럴 때일수록 당사자들은 더 냉정해져야 한다.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 이건 투쟁도 아니고 본인들 말마따나 “혁명”도 아니다. 뜨거운 가슴은 무대에서 대중 앞에 섰을 때 불사르면 된다. 지금은 차가운 이성이 필요할 때다. 자신들이 굳이 “법원의 판결에 실망했다” “케이팝 산업의 문제가 하룻밤 사이 바뀔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등의 말을 쏟아낼 필요가 없다. 법의 판단엔 법의 논리로 맞서야 한다. 뉴진스가 주장한 케이팝 산업의 구조적 문제, 즉 “기획사가 직원과 아티스트를 세심하게 대하지 않는 것” 또는 “회사가 아티스트를 진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제품으로 보는 것”이라는 내용은 감정적 호소이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전속계약 내용의 불합리성에 대한 법리적 근거가 아니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건 아이돌 그룹은 회사에겐 어디까지나 ‘상품’이라는 점이다. 비즈니스의 대상이며, 그 대상은 선택받아 시장에 팔려야 회사에겐 의미가 있다. 당장 지난 18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스위스 시계 브랜드 신제품 출시 기념행사에 다니엘이 어도어 스태프와 동행한 일을 보라. 아무리 소속사와 분쟁 전 맺었던 광고 계약에 따라 예정된 스케줄을 소화한 것일 뿐이라는 추측 기사가 나오고 있다손, 비즈니스의 세계란 저토록 냉정한 것이다. 이게 바로 뉴진스가 당면해 있는, 극복해야 할 현실이다.
가처분 소송 선고 이틀 뒤인 지난 3월 23일 홍콩 무대에서 뉴진스(NJZ)는 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오늘 무대가 당분간 마지막 무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 잠시 모든 활동을 멈추기로 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린 끝까지 나아갈 것이다
이에 어도어는 “법원 결정에도 불구하고 뉴진스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공연을 강행한 것과 일방적으로 활동 중단을 선언한 데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라며 유감을 표했다. 그들은 하루빨리 아티스트 측과 밝은 미래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어도어 입장에선 이렇게 놓아주기엔 뉴진스가 지닌 예술적 가능성과 경제적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재판부는 뉴진스의 항고를 기각하며 이렇게 밝혔다. “하이브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 간 갈등은 경영권 관련 사정일 뿐, 뉴진스와 어도어 사이의 신뢰관계를 훼손한 사유는 아니다. 아이돌 그룹의 활동 특성상 기획사의 투자 회수가 불가능한 구조에서 독자 활동은 불합리한 결과를 낳는다. 전속계약에 따라 멤버들은 임의로 계약을 해지하거나 독자 활동을 할 수 없다.” 로버트 힐번의 말대로 뉴진스 멤버들은 지금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