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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 황제가 바라본 여성의 삶 'She Was'

by 김성대


35년 전. 신승훈과 이승환이 가요계를 싹쓸이하던 시절이 있었다. 워크맨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가로등에 기대 ‘미소 속에 비친 그대’, ‘텅 빈 마음’을 들으며 이제는 이름조차 희미한 그녀 또는 그를 떠올려 본 사람은 그 시절의 질감을 기억하리라. 이선희와 이문세, 변진섭과 장혜리 등이 불사른 80년대 중후반 가요계의 단 하나 현상, 발라드. 그리고 그 시대의 온전한 연장이었던 당대의 2파전. 신승훈과 이승환의 시대는 불멸할 것만 같았다.


신승훈과 이승환은 직접 만들어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로서 면모는 물론 프로듀싱, 녹음, 믹싱과 마스터링에까지 두루 관여하는 완벽주의 면에서도 비슷했다. 단 음악 유전자에서 둘은 갈렸다. 이문세와 조용필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면서도 김종서와 들국화를 좋아하는 이승환은 록과 공연 쪽으로 뻗어갔고, 신승훈은 유재하와 김현식을 가슴에 품어 발라드의 기품을 유지했다. 가황(조용필)의 품에서 독립한 라이브의 황제와 발라드의 황제는 그렇게 각자의 음악 색깔로 35년 이상을 현역으로 활약해 왔다. 본업(음악)보다는 예능으로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자칭 레전드들과 달리, 은둔하며 본인 음악 세계를 가다듬는 김동률 같은 타칭 레전드와 동류(同類)의 길을 이들은 걸어온 것이다. 대중을 음악으로 만나는 게 음악인의 당연한 사명이라는 것을 이들은 행보로서 보여주었다.



마니아가 아닌 대중이 기억하는 전성기가 4집까지였다는 것도 두 사람은 같다. 다만 2집의 ‘너를 향한 마음’과 ‘보이지 않는 사랑’의 파장은 신승훈 쪽이 압도한 반면, 4집에선 ‘천일동안’이 ‘그 후로 오랫동안’보다 더 오래 회자됐다. 그 사이 3집의 ‘내게’와 ‘덩크슛’, ‘널 사랑하니까’와 ‘처음 그 느낌처럼’의 인기는 1집 때 못지않게 박빙이었다. 이승환은 불과 물을 전제한 콘셉트 앨범 ‘Human’으로 스타 발라디어 자리를 지킬 것처럼 보였으면서도, 과거 ‘그냥 그런 이야기’로 탐색했던 로커로서 길을 ‘멋있게 사는 거야’ 같은 곡으로 예고했다. 메이저의 자기 위치는 물론 언더그라운드 후배들의 귀한 성취도 함께 챙긴 그런 이승환과 달리, 신승훈은 2008년 ‘Radio Wave’로 다른 음악 해법을 모색하기까지 살짝 지난한 행보를 이어갔다. 그 답보는 전성기 때 너무 큰 인기를 누린 탓에 반동적으로 떠안아야 할 운명으로까지 보였다. 스스로의 영광이 스스로를 질식시킬 위기, 이른바 슬럼프의 늪이 그의 길을 가로막는 듯했다.


결국 신승훈은 두 파트로 나눠 발표한 11집 ‘I am… & I am’에서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패를 다시 꺼내 든다. 거기엔 평소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배우 김고은과 대세 래퍼 빈지노의 이름도 보였다. 장르로선 그가 오래 품어온 알앤비도 있었고, ‘Love Again’처럼 재즈 퓨전의 신선함도 감돌았다. 그렇게 신승훈은 돌고 돌아 발라드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가로질러 온 애이불비(哀而不悲)의 바다에서 그는 배영도 해보고 접영도 해보았다. 과연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은 사람의 음악에선 맵시가 났다. ‘AMIGO’의 비트감과 ‘Hello, Hello, Hello’의 처연함 사이 균형은 신승훈의 음악 생명을 더 연장시키리라는 확신이요, 그 연명의 명분이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She Was’. 9월 말에 나올 신승훈 12집의 첫 얼굴이다. 베테랑 작곡가 겸 프로듀서 서정진이 신승훈과 함께 곡을 썼고, 박효신과 ‘야생화’ 노랫말을 같이 쓴 작사가 김지향이 가세했다. 기타리스트 적재의 참여,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닌 ‘폭싹 속았수다’의 문소리가 뮤직비디오에 합류한 것에선 신승훈의 트렌드를 읽는 감각이 엿보인다. 특히 저 드라마의 주제는 신승훈 신곡과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점에서 더 흥미롭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삶. 그 고단하고 치열하고 억울했을 시간을 돌이키며 우린 각자의 ‘내 엄마’를 생각하게 된다. 가수의 따뜻한 관조로 떠밀리는 노래는 그 상념을 더 멀리 몰아가, 지척의 현실로서 우리 앞에 떨군다. 신승훈의 말대로라면 철이 들지 않은 탓에 음악가 생활을 더 오래 해올 수 있었다는데, 이 노래를 들으니 그는 이제 철이 들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신승훈은 감사와 슬픔이 엇갈리는 이 노래를 누군가의 딸이었고 지금은 누군가의 엄마일 자신의 팬들에게 바쳤다. 미소 속에 비친 그대들. 벌써 35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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