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속한 세월은 멈출 줄을 모르고 또 한해를 소화시키려는 중이다. 언제나처럼 그 한 해 동안 좋은 음악들 역시 멈추지 않고 대중 귀에 속속 안겼다. 미처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작품 가운데 여러분과 꼭 함께 듣고 싶은 것들을 국내외 반반씩 추려보았다. 싱글은 없고 EP가 한 장, 나머지는 모두 앨범이다.
레이디 가가 ‘Mayhem’
레이디 가가 6집은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40년을 꿰뚫는 팝의 역사 같은 음악을 들려준다. 실험과 근본의 접점이되 컨트리와 재즈를 통과한 근래 접근은 배제한 모양새다. 분노와 혼돈, 유혹과 환희, 평화와 희망이라는 서사는 이 앨범이 잡은 콘셉트가 ‘삶’ 자체임을 드러낸다. 가가 본인 말을 빌리면 어둠과 빛을 동시에 품은 “모순된 것들의 수용”이다.
가가는 나인 인치 네일스와 프린스를 초대한 ‘Mayhem’을 통해 마침내 어떤 제한도 없이 자기 작품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앨범 끝엔 브루노 마스와 함께 부른 ‘Die With a Smile’도 있는데, 발표 1년 여 만에 뮤직비디오 조회 수만 14억 5천 만회 이상을 기록했다.
로살리아 ‘Lux’
지난 작품들에서 들려준 아방가르드 플라멩코, 힙합과 레게톤을 곁들인 퓨전 플라멩코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로살리아는 자기 커리어의 분수령이 될 네 번째 앨범에서 심포니와 오페라를 택해 아티스트 한 사람이 음악이라는 예술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듯했다. 영성(靈性)과 여성의(Feminine) 음악이기도 한 그것은 만든 이가 세계 곳곳에서 영향을 받은 이유로 가사에만 13개 국어가 동원된다.
‘즐기는 음악과 도전하는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의 조화’를 언급한 로살리아의 이번 모험은 언뜻 비요크와 토리 에이모스의 언저리를 맴도는 느낌을 주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요크는 실제 수록곡 ‘Berghain’에서 함께 하고 있다.(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굉장하니 꼭 한 번 보길 바란다.) “재능 있는 사람은 아무도 맞힐 수 없는 과녁을 맞히고, 천재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과녁을 맞힌다.” 쇼펜하우어의 말이 맞다면 지금 로살리아가 지닌 재능은 천재의 영역에 다가가 있다.
데프톤스 ‘Private Music’
창작자가 지치지 않기 위해선 수용자의 관심이 필수다. 1988년 결성된 밴드 데프톤스는 1995년 데뷔작 ‘Adrenaline’ 이후 30년이 지나서도 Z세대가 아빠와 함께 공연장을 찾는 존재로서 굳건하다. 2024년 시카고 롤라팔루자에서 케이팝 걸그룹 아이브와 같은 무대에 선 건 그래서 더욱 상징적이다.
세대와 장르를 넘어선 이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여타 뉴 메탈(Nu Metal) 밴드들과 구별되는 독자성, 특정 시대에 얽매이지 않는 방법을 늘 고민해 온 밴드의 창작열 덕분이었다. 데프톤스는 데뷔 이후 평균 3년 간격으로 정규 앨범을 발표해 왔는데, ‘Private Music’은 그중 가장 끝에 자리한 작품이다. 흥미로운 건 그런 이 앨범이 저들의 역대 최고 음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웹진 ‘피치포크’가 지적한 대로, 이로써 모든 앨범을 범작 이상 수준으로 유지하며 세월이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는 90년대 아티스트로서 데프톤스는 라디오헤드와 비요크에 버금가게 되었다. 시끄럽고 둔탁하리라는 메탈 장르에 대한 편견을 깨고, 헤비 뮤직도 이처럼 아름답게 스산하고 또 장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길 바란다.
카마시 워싱턴 ‘Lazarus OST’
'카우보이 비밥'과 '사무라이 참프루'의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미국 애니메이션 채널 어덜트 스윔(Adult Swim)을 통해 지난 4월 선보인 <라자로>의 OST 앨범이다. 음악을 작품 최전선에 둔다는 와타나베는 작업을 맡길 아티스트 세 명을 직접 선정했다는데 전자음악 뮤지션 보노보와 플로팅 포인츠, 재즈 색소포니스트 카마시 워싱턴이 거기에 들었다. 이 작품은 그중 카마시의 것으로, 그간 와타나베 작품 세계에 드리운 “원초적이며 실존주의적인 혼돈”을 표현해 온 장르로서 재즈가 다시 한번 역할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카마시는 ‘무사 쥬베이’ ‘드래곤볼 Z’ ‘베르세르크’ ‘공각기동대’를 좋아한 자신이 16살 때 본 와타나베의 ‘마크로스 플러스’ 팬으로서, 그 와타나베 감독이 직접 자기에게 의뢰해 맡은 이번 작업을 “초현실적 꿈의 실현”이라며 감격해했다. 와타나베는 카마시에게 영화 음악이 아닌, 감상용 재즈를 만들 듯 접근해 달라고 주문했다. 카마시는 드럼 두 대에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피아노, 신시사이저 등을 동원해 3주 녹음, 2주간 믹싱을 거쳐 의뢰인의 주문에 부합하는 78분짜리 더블 앨범을 완성했다.
조이 크룩스 ‘Juniper’
니나 시몬, 마빈 게이에서 조이 디비전, 맥 드마르코(Mac DeMarco)까지 장르와 세대 구분 없이 다양한 음악가들로부터 영향받은 조이 크룩스. 그런 그녀가 두 번째 앨범에서 바라본 인물은 14년 전 대중 곁을 떠난 에이미 와인하우스다. 그러니까 곧 발매 20주년을 맞는 에이미의 대표작 ‘Back to Black’의 바삭거리는 그루브를 좋아한다면, 그리고 저 머나먼 빌리 홀리데이의 고즈넉한 품격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면 조이의 이 음반에도 마음을 내주리란 얘기다. 음악저널리스트 젬 애스와드는 “올드스쿨 알앤비와 재즈 요소를 활용하면서도 완전히 현대적으로 들리는, 세대를 아우르는 드문 조합”이라고 이 작품을 평가했다. 거의 모든 악기를 사람의 실연(實演)으로 처리한 ‘Juniper’는 너도 나도 열광하는 ‘A(AI)’의 시대에 기존 ‘A(Analog)’가 날리는 음악적 반격이다.
제니 ‘Ruby’
블랙핑크 멤버 솔로 앨범들 중 가장 알찬 건 역시 제니의 것 같다. 단순히 곡 수가 많고 출연진이 화려해서가 아니다. 그 화려한 출연진을 적재적소에서 빛나게 하는 감각, 넘쳐 보이는 트랙 수에도 당당한 완성도 때문이다. 6개월 동안 스튜디오에서 쫓기듯 작업하다 구원처럼 등장한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에 맞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든 자율성에서도 앨범의 매력은 배어났다. 이 모든 것이 의식의 흐름 같은 ‘Love Hangover’ 뮤직비디오 구성과 ‘like JENNIE’의 브라질리언 펑크, ‘with the IE’의 2000년대 알앤비 바이브와 ‘Mantra’의 마이애미 베이스, 1분 10초대에서 저돌적으로 등장한 도이치와 함께 저지 클럽을 탐험하는 ‘Extral’을 거치며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아울러 하이브리드 트랩과 퓨처 베이스를 먹여 가장 블랙핑크 같은 분위기를 내는 아트팝 넘버 ‘ZEN’까지, 15곡을 꾹꾹 담았는데도 앨범 ‘Ruby’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키라라 ‘키라라’
키라라는 다작 아티스트다. 2014년에 데뷔해 싱글, EP, 정규/라이브 앨범을 가리지 않고 냈다. 심지어 5집인 이 앨범엔 제작 과정을 밝힌 코멘터리 앨범까지 첨부했는데, 이게 은근히 재밌다. 누군가에겐 피가 되고 살이 될 원포인트 전자음악 레슨이 될지도 모를 저 코멘터리 앨범은 사실상 ‘키라라’에 대한 셀프 비평에 가깝다. 그 안엔 ‘Contrast’라는 곡이 부분적으로 일본 전자음악가 오사와 신이치(몬도 그로소)의 영향을 받았고, 키라라의 “베프” 한정인이 참여한 ‘지구 밖’에선 같은 나라의 코넬리우스를 들을 수 있다는 고백이 있다. 또한 ‘조각모음 1’은 개러지 하우스와 아스트로 피아졸라가 만난 결과물이며, ‘키라라’가 3부로 구성된 앨범이고 예람이 참여한 ‘조감도’가 2부의 출발이라는 것도 음악가 본인의 코멘터리로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전자음악 듀오 저스티스 풍 현악이 영감을 주었다는 ‘격추’의 경우, 만들 당시 일어난 무안공항 여객기 사고 때문에 곡 수록을 고민했다는 사실은 그 코멘터리의 슬픈 사족이다.
정말이지 선우정아의 스캣과 임환택(할로우 잰)의 스크리밍을 한 앨범에서, 그것도 전자음악 음반을 통해 들을 줄은 몰랐다. 나는 ‘조각’에 등장하는 래퍼 스월비와는 키라라가 따로 앨범 한 장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당신도 꼭 들어보시길. 물론 코멘터리 앨범도 함께.
피치 트럭 하이재커스 ‘Peach Truck Hijackers’
밴드 이름은 발랄하고 음악은 거칠며, 메시지는 진지하다. 얼터너티브, 펑크(Punk), 포스트 펑크, 개러지 록을 자신들의 관심 분야로 밝힌 이 여성 4인조는 사람의 사람에 대한 또는 남자의 여자에 대한 일상적인 무례와 환경문제에 보내는 냉소, 염세를 원료로 삼아 힘차게 내달린다. 음악에서든 노랫말에서든 여러모로 화가 나 있는 밴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말했다. 이중 부정(Double Negative)이 긍정이 된다는 논리 귀결을 음악으로 들을 시간이다.
배민혁 트리오 ‘To Begin from the Beginning’
그랜트 그린의 'Idle Moments'를 닮은 재킷 사진에 전설의 재즈 레이블 블루 노트(Blue Note)가 대표하는 모던 재즈 기타 트리오 스타일이 어울린다. 기타리스트 배민혁은 자신의 트리오 데뷔작에 스윙, 비밥(Bebop)을 전제한 스탠더드 다섯 곡과 직접 쓴 네 곡을 담았다. 여기서 첫 곡과 끝 곡은 자작곡으로 배치했는데, 고전 앞에 겸손하되 크리에이터로서 자신감은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언젠가 이 앨범을 듣고 나는 이런 단상을 메모해 두었다. “한때 조 패스, 웨스 몽고메리, 짐 홀, 케니 버렐, 그랜트 그린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다. 저들 연주엔 다른 듯 같은 낭만, 여유, 배려가 있었다. 벨벳처럼 보드라운 기타 톤의 온기, 그 넉넉한 연주 안에서 나는 하루의 피로를 풀곤 했다.” 배민혁 트리오의 음악으로 여러분도 피로에서 탈출하시길 빈다.
이강승, dress ‘우리가 어른이 된 건 거짓말 같아’
MZ세대 감성의 현주소라면 맞을까. 최소(minimal)를 추구하는 듯 최대 효과를 노리는 프로덕션은 그 자체 세련되다. 어떤 곡들에선 잔나비, 혁오 느낌도 나지만 이강승의 팔세토 보컬이 이끄는 ‘부끄러우니까’나 혼잣말에 말문이 막힌 느낌을 표현하려 먹먹한 베이스 신스를 깐 ‘거짓말 같아’는 이 앨범이 추구하는 장르가 알앤비/솔 쪽이라는 걸 정중히 환기시킨다. 프로듀서 드레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강승 음악을 평소 좋아했다며 “사연이 생기고 서사가 생긴다”는 이유로 그와 앨범까지 만들었다고 밝혔다. 강민경(다비치)이 피처링 한 마지막 곡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까지 듣고 나면 드레스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