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서태지와 아이들을 꺼냈다. 정규 앨범은 아니고, 일본에서 나온 컴필레이션이다. 제목은 단순하게도 '서태지와 아이들Seo Taiji and Boys'.
1994년 10월 21일에 나왔다고 하니 시기상 한국에서 3집이 나오고 두 달 뒤 발매된 셈이다.
3집 곡들이 깡그리 누락된 건 한국을 들썩인 그룹의 가능성을 일본 사람들이 뒤늦게 보았기 때문이리라.
쉽게 비틀스가 미국에 《Introducing... The Beatles》로 첫인사를 한 것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음악을 오래 듣다 보면 굳이 음악을 틀지 않아도 이름만으로 추억을 불러내는 존재가 있다.
이름을 불러 추억이 단비처럼 내리기 시작하면 이제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 안에 젖어든다.
나에겐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렇다.
1992년.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임백천이 사회를 본 그 유명한 프로그램을 통해 저들을 처음 보고 다음 날부터 대한민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 시대를 10대로서 살아보지 않고선 모를 일이다.
그냥 폭풍 같았다. 소풍, 수학여행, 체육대회 할 것 없이 장기자랑 시간만 되면 나와 친구들은 너나없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을 추거나 그들 노래, 랩을 했다.
동네 시장에선 그룹 로고를 마구 찍은 짝퉁 굿즈들이 불티나게 팔렸는데, 과연 신드롬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신드롬이었다.
당시 내 나이 중학교 1학년, 그러고 보니 서태지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그는 그 나이에 이미 팔릴 음악의 조건과 음악을 팔기 위한 비즈니스 생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듯 보였다.알고보니 이는 양군(YG)이 더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던 거였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고 이전까지 '댄스 가수'를 대표했던 박남정과 김완선, 소방차는 하루아침에 뒷방으로 밀려났다. 트로트는 말 그대로 구닥다리가 되어버렸고, 잘 나가던 발라드도 한순간에 청승맞은 음악이 되어버렸다.
그건 패러다임의 전환인 동시에 헤게모니의 전복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나오자마자 무적이 된 것 같았다.
리더 서태지는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쏟아지는 인터뷰와 섭외 상황 속에서도 담담한 표정을 짓곤 했다.
이 일본 편집반엔 그렇게 대한민국 대중음악 시장을 일순 뒤엎은 랩 댄스 트리오의 1, 2집 대표곡들이 실렸다.
알고 있다. <난 알아요>는 분명 밀리 바닐리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하여가>의 기타 솔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기타리스트의 표절이란 걸.
하지만 그럼에도 이 앨범을 들으며 나는 여지없이 10대 중반, 그 좋았던 시절로 빨려 들고 만다.
영단어 하나까지 빠짐없이 따라 부른 <우리들만의 추억>, 나에겐 언제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베스트인 <내 모든 것>,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국 일렉트로닉계의 수확 <수시아>까지.
그럭저럭 잘 뽑은 리스트지만 <이제는> 대신 <환상 속의 그대>가 들어갔으면 나을 뻔했고, <죽음의 늪>이 빠진 건 그보다 더 아쉽다.
마지막 곡 <이제는>이 끝나고 나니 이 말 하나는 꼭 적고 싶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 자체 공일오비, 듀스, 김건모, 푸른하늘, 피노키오 등과 함께 90년대 초중반 10대를 보낸 우리 세대의 BGM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