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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ug 10. 2016

예술가도 '밥'은 먹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들)을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는 수단은 돈이다. 우린 돈을 비웃을 순 있지만 돈을 부정할 순 없다. 돈은 예술가에게 예술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또 환경을 준다. 대중은 그렇게 태어난 예술 작품들을 다시 돈을 내고 감상 또는 소장한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돈은 예술을 만들고 누리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하지만 이런 본질을 외면한 채 예술을 대하려 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여 걱정이다. 아마도 그들 생각은, 예술의 고귀함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일 게다. 돈이라는 속물적 수단으로 예술의 숭고한 목적을 더럽혀선 안 된다는 발상은 그래서 어떤 면에선 허세에 찬 자기기만이요, 현실을 모르는 배부른 소리일 수 있다.


세계적인 록밴드 메탈리카는 1회 공연당 20억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 전 나는 주최 측의 일방적 통보로 무산된 모 페스티벌과 관련한 한 뮤지션의 글을 읽었었다. 그는 자신들을 보기 위해 티켓을 사고 숙소까지 예약한 팬들에게 사과 말을 전한 뒤 (인디)뮤지션들의 생계를 사실상 좌우하는 ‘행사와 페이’의 관계에 대해 꽤 긴 푸념을 적었는데, 핵심은 이거였다. 아무리 통기타 한 대만 있으면 누구나 장범준이 되고 제이슨 므라즈가 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연주와 노래에 대한 정당한 페이는 요구하라는 것. 음악하는 사람들은 제발 자기 값어치를 스스로 낮추지 말고, 행사 주최 측은 제발 음악하는 사람들을 쉽게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그 달콤한 ‘무한 스트리밍’ 재생 횟수 당 가격 6원에서 0.6원을 떼어 받는 저작권자, 0.36원을 거두어들이는 실연자.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그나마 음악 하는 사람들을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행사’마저 거마비와 재능기부를 핑계로 거저 취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뮤지션의 긴 넋두리엔 있었다. 그가 얘기한 건 독일이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예술가 사회보험제도’ 따위의 거대 담론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이 지적한 “예술 작품의 잉태와 보급, 보존”을 위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법칙의 '기본'이 지켜지길 바랐을 뿐이다. 즉, 예술이 가진 유령 같은 가치 아래 희생되는 예술가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보수를 받고 예술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사고방식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예술 사회학자 한스 애빙의 말과 같은 주장을 해당 뮤지션은 한 것이다. 2년 전 ‘뷰티풀 민트 라이프 사태’와 비슷한 이번 사태를 보며 나는 그 뮤지션의 주장에 공감했다. 현실에서 예술의 존재와 가치는 돈과 ‘결탁’이 아니라, 돈에 ‘결부’된 것에서 비롯된다는 걸 대중은 알아야 한다.



자신의 노동에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예술가들의 노동은 예술 자체를 위한 행위여야 한다는 것. 이건 누가 봐도 모순이다. 이런 감상적인 이중 잣대 때문에 예술 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재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조롱당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그토록 되고 싶어 하는 ‘선진국’은 기본적으로 ‘문화 선진국’이다. 문화를 하찮게 대하는 곳이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곳이 될 수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문학은 돈이 아니지만 원고는 확실한 돈이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새삼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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