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레이션에 갇힌 음악

엔하이픈 <THE SIN : VANISH>

by 김성대


엔하이픈의 새 앨범은 11 트랙이어서 언뜻 정규작처럼 보이지만 EP다. 뭔가 꽉 차 보였던 건 곡 수에 버금가게 배치된 내레이션 트랙들 때문인데, 실제 EP는 콘셉트 앨범을 표방한 작품 배경을 설명하는 그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다. 내레이터는 요즘 뜬다는 배우 겸 출판인 박정민이 맡았다. 하지만 첫 트랙 ‘사건의 발단’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게 어울리는 조합인가.’ ‘굳이 이런 작위적인 시도를 해야 했나.’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일단 그러려니 넘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내레이션으로 앨범이 들려줄 이야기를 예고하는 건 대중음악사에서 흔히 있던 장치였기 때문이다. 가령 켄드릭 라마의 ‘good kid, m.A.A.d. city’가 그랬고, 다음 달 내한하는 드림 시어터의 1999년작 ‘Metropolis Pt. 2: Scenes from a Memory’도 그랬다. 단, 저들은 그런 경우에서도 랩과 음악을 따로 떼지 않고 내레이션을 수용자의 편의를 위한 수단으로만 삼았다. 자신들이 하려는 것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인간과 뱀파이어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사랑을 위해 금기를 깨고 도피하는 연인의 이야기.


그런 측면에서 주객이 전도된 듯 한 엔하이픈의 ‘THE SIN : VANISH’ 속 저 이야기가 예술 대 예술로서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능가할지는 미지수다. 음악만으로라면 상대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음악보다 더 커 보이는 과장된 내레이션이 끼어들면서 그 가능성은 빠르게 퇴색하는 분위기다.


정말이지 박정민의 내레이션은 배경 설명에서 그치지 않고 ‘설명충’처럼 잊을 만하면 나온다. ‘아, 이건 아닌데.’ 영화가 이미지로, 소설이 텍스트로 작품 세계를 이끌어 가야 하듯 음악은 소리로 자신들이 구상한 곳에 듣는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건 한 예술 장르로서 음악이 바탕에 두어야 할 작법의 기본이다. 어쩌면 생산자로서 아티스트가 소비자인 리스너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약속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타이틀 곡 ‘Knife’ 뮤직비디오에선 뉴스 속보 영상까지 보여주며 이 이야기를 친절하게 보충 해설하고 있다. 음악 앨범에서 음악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대체된 설명이 너무 많은 것이다.



‘흑인 여성들의 미국에서 삶’을 콘셉트로 잡은 비욘세의 ‘Lemonade’를 예로 들어보자. 이야기 진행 상 어떤 설명이 필요했거나 쉬어가는 구간이 요구됐다면 엔하이픈은 저 앨범의 ‘Forward’ 같은 트랙을 참고했어야 했다. 긴 내레이션을 동반한 ‘All Night’가 있었지만, 그건 비욘세가 기존에 찍어둔 1시간 분량 홈비디오 영상을 음악에 곁들인 시도였을뿐더러 그 시도조차도 단발적이었다. 엔하이픈의 이번 구성처럼 사사건건 달아둔 설명과는 궤가 다르다. 음악에서 내레이션은 보완으로 그쳐야지, 그것이 주가 되는 순간 음악은 예술적 정체성을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


오는 5월 전기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마이클 잭슨의 곡 ‘Thriller’에서 배우 빈센트 프라이스의 음산한 내레이션이 화룡점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것이 음악을 돋보이게 한 장식에서 역할을 마쳤기 때문이다. 엔하이픈도 딱 저 정도에서 접었으면 좋았을 거다. 그러지 않고 무작정 거의 모든 걸 설명해 버리는 내레이션 뒤에 음악을 숨긴 건 따라서 패착이었다. 더 안타까운 건 말 뒤로 밀려난 음악들 중엔 ‘도망자들’처럼 정식 곡으로 살렸어도 좋을 법한 소스들이 들린다는 사실이다. 좀 멀더라도 엔하이픈 측은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이나 비틀스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같은 고전 콘셉트 앨범들에서 ‘음악으로 콘셉트 엮어내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을까. 내레이션으로 그 모든 걸 한큐에 처리하려 한 건 꽤 안이한 선택이었다.



음악에서 내레이션이 과유불급인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듣는 이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데 있다. 음악과 가사를 듣고 나름의 감성으로 상황을 그려나갈 청자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다. 이는 주어진 문제를 풀어나가는 수험생에게 수시로 정답을 들이미는 꼴과 같다. 그러니까 제이크가 “어떤 사람이나 장소로부터 벗어난 뒤 느끼는 감정”에서 영감을 얻어 ‘Sleep Tight’를 썼다는 사실을 듣는 이가 정확히 알아맞힐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음악을 통해 그걸 추론할 수는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앨범에서 내레이션은 개별 감상자가 도달할 수 있었을 그 수많은 상상의 언덕을 자꾸 허물고 있는 것에서 과잉이다.


반면 음악은 거의가 만족스럽다. ‘No Way Back’에 새소년의 황소윤이 피처링한 것도 좋았고, 멤버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는 ‘Stealer’의 라틴 냄새는 나 역시 앨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물론 바로 뒤 무려 세 차례 내레이션이 음악에의 몰입을 방해하기 전까진. 특히 ‘우리가 찾던 목소리’의 광고 같은 내레이션은 실소를 자아내게 했고, 서태지 7집의 ‘Nothing’을 닮은 인터뷰 트랙 ‘목소리’도 엉성하긴 매한가지다. 서태지의 것이 16초 뒤 곧바로 ‘Victim’이라는 곡으로 뛰어든 것과 달리, 엔하이픈은 ‘목소리’로 1분 6초를 보내고서야 비로소 ‘Big Girls Don’t Cry’라는 다음 노래로 옮겨간다. 그러곤 이야기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어 세상에 밀리고 쫓기던 연인의 달콤한 감정을 엮은 ‘Lost Island’와 ‘Sleep Tight’로 이어진다.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끝냈으면 좋았겠지만 앨범은 2분에 가까운 또 하나 ‘그것이 알고 싶다’ 풍 내레이션 ‘사건의 너머’까지 들려주고서야 막을 내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건의 발단부터 사건 이후 논평까지 곁들인 다섯 트랙 내레이션은 과했다. 레이블 측에서 자신 있게 ‘탐사보도 형식’을 내세운 언론 형 실험은 박진감도 긴장감도 없었으므로 그저 색다른 걸 해보겠다는 의지로서만 의미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엔하이픈의 신작은 진술(Narration)을 빼고 이야기(Narrative)만 취했어도 충분했을 작품이다. 음악으로만 보여주고 설명했다면 훨씬 더 나았을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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