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와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를 듣고 그의 팬이 됐었다. 이성 또는 이성과 관계에 눈 뜰 사춘기였기에 더 그랬을 테지만, 그 노래들은 죄다 눈물 같았고 또 별빛 같았다. 감상자의 감성을 송두리째 뒤흔들던 노랫말과 멜로디의 조화는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비로소 절정을 이루더니, 그는 그대로 90년대 작곡계의 거장이 되어갔다. 누구에게나,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소중한 한때가 있을 것이다. 거기엔 또 분명 잊을 수 없는 음악, 노래가 있었을 것이고 또 지금은 볼 수 없는 너와 내가 있을 것이다. 오태호는 어쩌면 90년대를 살았던 우리에게 그리움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잃어버린 추억, 떠나버린 사랑과 바꿔야만 하는 그의 음악에 관해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보았다.
음악에 흥미를 느낀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반포중학교 시절 신중현님의 둘째 아들 신윤철과 친구가 되면서 기타와 팝 음악에 자연스레 동화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 대부분의 평범한 친구들이 하드록이나 프로그레시브 음악에 관심이 많아 좀 더 자연스럽게 그런 음악과 접할 기회가 많았죠.
작곡가가 되기로 마음 먹은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작곡 공부는 어떻게 하셨는지도 더불어 질문 드리겠습니다.
막연히 기타리스트나 밴드 활동만으로 미래를 생각하다 공중전화라는 저희 팀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멤버들끼리 서로 자작곡을 만들어 앨범을 채워 보자는 의견에 써본 것이 자연스레 작곡가로서 첫걸음이었습니다. '사랑이 그리운 날들에' 등 몇 곡이 제가 작사, 작곡한 것으로 수록되었었죠.
'작곡가 오태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 이유도 짧게나마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가장 큰 영향은 故 이영훈 선배님입니다. 록 음악을 하던 시절 이문세님의 곡들을 좋아했는데, 제가 좋아하던 그 모든 곡들이 故 이영훈 선배님의 곡이었습니다.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것만으로 제 작곡 스타일이
자연스레 선배님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후에 이문세님 전국 투어에 이영훈 선배님은 건반으로, 저는 기타로 세션활동을 함께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87년 이승환, 박문수씨와 함께 결성한 ‘아카시아’로 활동하신 것이 프로 뮤지션으로서 출발이었나요? 이 밴드는 어떻게 결성하시게 된 건지?
공연을 몇 차례 한 걸로 끝난 팀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프로 뮤지션으로서 출발이라고 하기엔 좀 이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승환씨가 주축이 되어 저와 함께 멤버를 알음알음 소개 받아 구성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포지션이 기타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EBS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하셨을 때도 기타 연주를 들려주셨죠. 리 리트너와 잉베이 맘스틴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작곡가가 아닌 기타리스트로서 욕심은 없으셨나요?
작곡 활동이 주가 되다보니 스스로 그런 욕심이 많이 희석된 듯 싶습니다. 밴드로 구성이 된다면 기타리스트로서 다른 면모도 보여줄 수 있을텐데 하는 막연한 꿈만 이어갑니다^^
본인의 곡들에 들어간 기타 솔로들 중 직접 연주하신 곡이 있다면? 이오공감의 '잃어버린 건 나 Part2'에서 기타 연주도 직접 하신 건가요?
네, 제가 연주했습니다. 제 곡은 대부분 제가 연주하곤 합니다.
‘사랑과 우정 사이’, ‘친구 수첩 속의 너의 사진’ 등 친구와 연인을 사이에 두고, 또는 친구냐 연인이냐를 두고 실제로 갈등한 적이 있는 건가요?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연인들이 잘 지내다가도 한 쪽에서 변심이나 새로운 사랑의 만남 또는 식상함 등을 이유로 둘 사이가 시들해지는 과정을 흔히 보곤 하는데, 그런 둘 사이가 소원해지는 그 시점(시간적인 時點)에 서서 더 이상 사랑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슬픈 사이나 관계를 소재로 한 게 조금은 신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 제 얘기라고 할 것도 없는, 누구나 있는 그저 흔한 이별 전 상황에, 약간의 살을 붙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친구 수첩 속의 너의 사진‘은 포장마차에서 후배에게 들은 짧은 하소연을 제가 조금 더 앞뒤로 드라마틱(?)하게 꾸민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배 얘기는 ‘예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알고보니 자기 동창과
사귀더라' 라는 정도의 짤막한 넋두리였던 것 같습니다.
아래 리스트는 제가 뽑은 '오태호 베스트 5'입니다. 각 곡들에 관한 설명(가수들과 인연, 곡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간단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태호가 뽑은 오태호 베스트 5'도 말씀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제가 제 곡의 베스트를 뽑기는 조금 쑥스럽고 故 서지원의 ‘또 다른 시작’과 ‘ I miss you'를 개인적으로 다른 곡들에 비해 조금은 완성도가 있다 싶은 정도입니다.
내 사랑 내 곁에(김현식)
신촌블루스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당시 객원가수였던 선배님에게 공연 전 대기실에서 우연히 주게 되었던 곡. 공연 며칠 전 습작으로 만들어 대기실에서 혼자 기타치며 흥얼거리는데 그 멜로디를 선배님이 들으셨고, 아직 다른 가수 안 줬으면 본인을 달라시기에 선뜻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우정 사이(피노키오)
가수 김민우 3집 앨범 데모곡으로 주었다가 거절 당한곡으로, 평소 친분이 있었던 보컬 김성면의 피노키오 데뷔앨범에 선물로 준 곡입니다. 그런데 기획사 측이나 다른 멤버들 역시 처음엔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들었습니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승환)
이 곡은 처음은 강수지 앨범에 데모로 준 곡이었는데 거절 당하고 가까운 이승환에게 준 곡입니다. 이승환 역시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앨범에 곡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편곡에 있어 간주에 주된 멜로디가 허전하게 비어 있습니다.
기억날 그 날이 와도(홍성민)
[Rock in Korea]라는 옴니버스 앨범에 실린 곡인데 원래는 이승환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를
실을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녹음 며칠 전 우연히 이승환씨가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데모 곡을 듣고 자신을 달라는 바람에 뺏기듯 넘겨주고 그날 밤 부랴부랴 새로운 곡을 쓰고 며칠 후 녹음을 마쳤는데 그 곡이 ‘기억날 그 날이 와도‘였죠.
하룻밤의 꿈(이상우)
이상우씨한테 직접 타이틀 곡을 구하고 있다 연락이 왔었습니다. 앨범은 다 녹음해놓은 상태지만 타이틀 할 만한 곡이 없다기에 급히 작업해서 넘겨준 곡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완성한 곡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어 혹시 타이틀로 안 쓰고 그냥 다른 곡처럼, 속된 말로 '깔릴' 곡으로 결정되면 다시 돌려달라는 조금은 당돌한 부탁을 했던 것 같고, 다행히 타이틀 곡이 되었습니다.
각각 ‘또 다른 시작’과 ‘내 사랑 내 곁에’를 준 서지원, 김현식의 죽음이 혹시 작곡가 오태호의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 조심스럽게 여쭙니다.
저를 작곡가로서 세상에 알려주신 분들이라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너무나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또 그 많은 가능성을 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90년대에 오태호씨는 정말 신들린 듯 곡을 써내셨습니다. 아니, '신들린 멜로디'라면 더 맞는 말일지 모르겠네요. 어디서 그런 영감들이 쏟아져 나온 것인가요?
부끄럽게 영감이라고 할 정도도 아니고 제 감성이나, 제가 좋아하고 작곡하는 곡 스타일이 그저 그 시대에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지금 그런 곡들이 발표되었다면 그때 만큼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만큼, 그때 감성과 정서가 그 시대의 저와 잘 맞았던 것 같다고 늘 생각합니다.
작곡가로서, 그리고 솔로 가수로서 활동이 뜸한 느낌인데, 언제쯤 ‘컴백’하실 예정이신지요?
작곡가로서는 이미 준 곡들이 기획사 측에서 준비 중에 있어 딱히 말씀 드릴 수가 없네요. 솔로 가수보다는 ‘메이플라워’라는 프로젝트 그룹으로 (객원가수로) 작품을 계속 낼 예정입니다.
혹 음악 외에 다른 일을 하고 계신 건지도 궁금합니다.
일적으로는 없습니다. 음악 작업 외엔 가족들과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고 지인들과 교류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사람 사이의 정이나 관계로 소리 없이 축적된 시간들이 제 글의 소재가 되고 한편으로는 나라는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소중한 이유가 됩니다.
이승환씨가 지난 앨범 발매 후 인터뷰에서 밝힌 '오태호와 협업'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요? 하신다면 '이오공감 재결성'이 되는 것인지?
그 인터뷰를 못 봐서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지만 저는 항상 가능성의 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가수가 아닌 ‘작곡가 이승환’ 또는 ‘프로듀서 이승환’에 대한 태호씨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작곡가로서도 어떤 작곡가 못지않은 깊은 감성과 그만의 색을 오래 전부터 봐왔고 존중하며 무엇보다 프로듀서나 음악인으로서 이승환은 양질의 음악을 위해서는 많은 걸 희생하고 투자하며, 그런 환경을 만들거나 인디뮤지션들을 돕기 위해 항상 맨 앞에 서 있음을 봅니다. 지인으로서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이 인터뷰 연재가 책으로 엮일 때, 그 책은 고 신해철씨에게 헌정될 것입니다. 혹시 그와의 추억이 있는지요?
신해철이 무한궤도 데뷔하기 전 잠깐 (한 달 남짓?) 제가 기타리스트로서 그 팀의 연습을 도와줬던 기억 밖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론 활동 영역이 다르다 보니 방송이나 공적인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면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이였습니다. 쾌활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음악에 대한 욕심이나 포부가 남달랐던 좋은 친구로 기억됩니다.
마지막으로 '오태호의 복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당신의 굉장한 팬이었다는 것을 밝힙니다^^
나름 노력한다고 하지만 마음 만큼 쉽게 다시 다가설 수 없어 무척 안타깝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추억 속의 예전 감성이 묻어나는 좋은 음악으로 여러분과 다시 닿고 이어질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늘 행운 같은 과분한 평가와 그로 인해 선물 받은 현재의 모든 상황에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