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그림 같은 사랑'으로 1988년 MBC 강변가요제 금상을 거머쥔 뒤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으로 슈퍼스타가 되었던 사람. 드라마 <결혼>에 삽입된 '비창'은 지금도 우리 마음을 적시는 이슬 같은 발라드 명곡으로 남아 있다. 나의 동료 윤호준 대중음악평론가와 함께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평론가 윤호준의 질문은 '윤호준'으로 따로 표기하였음:편집자주)
이번 인터뷰부터 '공통질문'을 몇 가지 드릴 예정입니다. 이상우씨에게 음악은 무엇인가요?
음악은 제 밥줄이죠(웃음). 한 마디로 말하기 너무 귀한 단어라. 음악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 크잖아요. 그래서 몇 마디 말로 압축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적어도 나에게 음악은 ‘교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건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그 관계에서 말이 필요없는 것이 음악이에요. 들려주면 그냥 느끼죠. 예술이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말이 필요 없죠. 말하지 않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 그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가수로서 제일 처음 노래를 부르게 된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방송이었어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이하 '토토즐')>라는 프로였는데, 무대에 서서 얼마나 떨리던지. 그 때 ‘승마바지’가 유행이었는데(웃음), 소방차가 입던 그걸 입고 구두 색깔을 못 맞춰서 작가에게 어떤 걸 신을까 물어보고 했어요. 그 때가 너무 기억에 남죠. 사실 그 때 그 작가가 지금 제 아내예요(웃음). 지금도 맥주 한 잔 하면서 얘기하면 그 때 정말 촌스러웠다고(웃음).
윤호준: 그 때가 강변가요제 수상 이후 첫 무대셨나요?
예, 첫 무대였어요. <토토즐>이었으니 굉장히 큰 무대잖아요. 10대 가수 안에 들어가는 가수들만 나오는 쇼프로였으니까. 그래서 엄청 ‘쫄아서’ 노래했던 기억이 나요. 끝나고 인사도 안 하고 들어왔어(웃음).
음악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대부분 가수, 뮤지션들이 아마 비슷할텐데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더 이상 작품을 만들 에너지가 없을 때예요. 뭔가 새로운 건 늘상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글 쓰는 분들도 마찬가지고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게 뜻대로 진행이 안 될 때, 바닥이 났을 때. 우리끼리는 ‘밑천이 바닥 났다’고 하는데, 사실 앨범 한 장을 끝낼 때마다 그 마음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 앨범에 내 모든 걸 다 쏟아부어서 만들거든요. 과연 다음 앨범을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앨범을 한 다섯 장 만들고 나니까 정말 더 이상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부터 저는 앨범을 안 만들었어요. 안 만든지 지금, 97년 이후 안 만들었으니까. 사실 안 만든 게 아니라 못 만든 거죠.
나중에 질문 드리려 했는데요, 그럼 새 앨범 발매를 슬슬 준비할 때가 된 것 아닌가요?
네, 정말 이제는 만들 때가 된 것 같아요(웃음). 너무 오래 쉬었어(웃음). 지금 내 얘기를 하고 싶고,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열정 같은 게 다시 살아나고 있으니까. 그래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늦어도 내년 쯤엔 나올 것 같네요.
이상우씨 나름 관점에서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정의해주세요.
한국에선 80, 90년대까지가 대중음악이 가장 활성화 되어 있을 때예요. 시장이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었죠. 음악적으로도 아주 풍성한 시대였어요. 가령 <가요톱텐>이라는 프로에 딱 나가면 트로트 가수 현철, 주현미씨가 있었구요, 댄스 가수 소방차, 김완선, 박남정이 있었구요, 발라드 가수 변진섭, 이상우, 이승철이 있었구요, 밴드 송골매가 있었죠. 모든 장르가 가장 권위있는 한 순위 프로 안에 모두 출연을 했었어요. 그 얘긴 무슨 얘기냐면 그만큼 시장의 수요가 다양했단 뜻이에요 장르별로. 음악 시장 자체가 활성화 되어 있었고 풍성했던 시대였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엘피 시디 시장 매출이 가장 좋았던 때, 밀리언 셀러 앨범들이 1년에 몇 장씩 터지기 시작한 시대가 바로 그 시대였어요.
이상우씨 2집도 100만장이 넘게 팔렸었죠?
그렇죠. 저는 [비창] 앨범까지 모두 판매량이 좋았어요. 그때는 작곡자들도 많았고, 신나고 재밌게 음악을 했던 시대예요. 그래서 가수들도 그 시절이 많이 그립다고들 해요. 대중도 음악 하는 사람들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죠.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분명히 설명할 수 있죠. 그 때는 정말 풍성했던 시대였으니까.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음악이 많았으니까. 골라들을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았으니까.
비교적 ‘뜨지 않은 곡’들 중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6집 앨범에 있는 ‘부르면 눈물 먼저 나는 이름’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 노래가 음악적으로 굉장히 완성도가 높은 곡이고, 아마 제 노래 표현력이 가장 물이 올랐을 때 부르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그래서 그 노래가 개인적으로 좀 아까운 노래예요.
이상우씨의 '내 인생의 음악인'이 궁금합니다. 지난 리메이크 앨범에서 다뤄진 신중현, 조하문, 유재하, 김현식 같은 분들 중 한 분일 거라 저는 추측해보았습니다만.
가수들은 그때 그때가 다 달라요. '꽂히는' 분들이 때마다 다르죠. 국내 아티스트 중엔 누가 뭐라 해도 조용필씨였구요. 우리가 그 분의 음악을 듣고 자랐고, 한국적인 록의 창시자라고 봅니다 저는. 그 사람이 우리 가요사에 남긴 업적은 엄청나니까요. 당연히 그 분의 영향을 받고 자랐죠. 제가 선배님을 의식하고 만든 노래도 꽤 있었어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제 앨범들에 있던 노래들 중에 조용필씨 영향을 받은 노래들이 많았죠.
기억나는 팬 또는 팬레터가 있나요?
우리 때는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많이 해서 선물을 보내곤 했어요. 학 천 마리 접어 보낸다든가(웃음). 한 번은 팬 한 분이 자수를 떠서 큰 액자에 넣어 보냈는데, 그게 길면 6개월씩 걸릴 수도 있는 거래요. 그렇게 일일이 자수를 떠서 사진과 똑같이 만들어 보낸 팬이 계신데 그게 지금도 있어요 집에. 그런 것들은 그 사람의 성의가 있으니까 못 버리겠더라구요. 지금도 팬클럽 행사 있으면 그 분이 오세요(웃음). 그 땐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지금 애가 둘이래요. 대학 간대(웃음).
90년대 대중음악에서 빠질 수 없는 분, 고 신해철씨와 추억이 있나요? '공통질문'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신해철씨와는 같은 시기에 활동을 했으니까 소주도 자주 마셨고 음악 얘기도 많이 했죠. 평소 술자리에서 떠들고 놀 때 보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어요. 근데 이 친구 가사나 음악적 고민을 한 번씩 들여다보면 정말 고민을 많이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뚜렷하고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친구였어요. 가끔 궤변이 있긴 했지만. 그건 재미로 하는 경우를 많이 봤구요. 똑똑하고 아는 게 많은 친구였으니까요. 철학적 지식인의 오만이랄까, 이런 게 없잖아 있긴 했어요. 방송에서도 한 번씩 느껴질 때가 있었죠. 그런 '오버 기'를 빼고 조금만 더 담백했다면 정말 괜찮은 친구였죠. 해프닝도 많았는데, 지방에서 행사가 끝나면 보통 바로 올라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반가우니까 ‘해철아, 한 잔 하고 가자’ 그러면 ‘형, 저 오늘은 올라 가야 돼요’ 해요. ‘까불지 말고 한 잔 하고 가자’ 해서 갔죠. 같이 술을 막 마셨어요. 그러고 나는 올라오고 해철이는 거기서 자고 왔어요(웃음). 취해서. 저도 많이 취했으면 뻗어 잤을 텐데 제가 해철씨보다 술이 좀 더 셌거든요. 그 다음 날 전화 와서 ‘아 형, 뭐야’ 이랬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이상우씨는 90년대 그 어떤 가수보다 탁월한 보컬리스트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과 ‘한 켤레의 구두로’를 들으며 제 평소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확인했는데요.
노래는 현장감 있게 듣는 것과 방송에서 듣는 게 달라요. 가수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래가 완전히 농익어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갈 수록 힘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거든요. 왜냐하면 노래란 몸 속의 근육과 장기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거예요. 근육은 뭐예요, 훈련을 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 면에선 운동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계속 노래를 부르지 않고 3~4년만 쉬면 가수는 목이 잠기게 됩니다. 잠긴다는 것은 소리낼 때 근육들이 퇴화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꾸준히 훈련하고 ‘운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데, 농익은 상태에서 그 힘을 그대로 보존하면 노래가 훨씬 좋죠. 그래서 최백호 같은 분 노래는 들으면 막 소름이 돋아요. 그 분은 술, 담배 다 끊으시고 온 몸으로 노래하거든요. 술, 담배는 끊은 뒤 10년 뒤에 효과가 나타나요. 최백호씨 소리는, 장난이 아니에요. 저는 몇 년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아요(웃음). 끊은 지가 얼마 안 되어서(웃음).
이상우씨의 그 '소리'는 선천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노력으로 이룬 후천적인 것인가요.
연예인들 또는 뭔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으로 열심히 노력할 때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타고난 것만 갖고 할 수 없고, 특히 노래 같은 경우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근육의 움직임으로 나오는 거예요. 노래를 계속 안 부르면 안 되죠. 연습을 반드시 해야 돼요. 예컨대 20~30년 연기하시는 분들, 대충 해도 잘 할 것 같죠? 그 분들은 지금도 대본 연습을 엄청 열심히 해요. 나이 드신 분들이 대본 연습을 더 많이 해요. 생각해보세요, 나이가 들었으니 더 가물가물한데 연습을 더 많이 해야지. 그래서 그 분들은 녹화 전날 절대 다른 스케줄을 잡지 않아요. 오로지, 온전히, 완벽하게 외울 때까지 대본만 봐요.
이상우씨가 생각하는 ‘좋은 가수’의 기준이라면?
한 마디로 말씀 드리자면 좋은 가수, 좋은 작곡자, 좋은 작사가는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에요. 진정성이 없으면 절대 좋은 곡이 나오지 않아요. 왜냐면 사람들과 공감을 해야 하잖아요. 내가 진심이 아닌데 공감이 되겠어요? 오래 가는 히트곡과 반짝 히트곡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진정성이 아니라 유행의 흐름을 타고, 지금 이렇게 쓰면 먹힐 거야 라며 머리를 써서 만든 곡들은 그 시대에는 먹힐 수 있어요. 하지만 진심이 담긴 음악은 언제 들어도 그 진심이 느껴져요. 지금 들어도 공감이 간다 싶은 건 그 곡을 쓴 사람들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잔머리’ 써서 만든 게 아니니까. 30분 만에 쓰더라도 내가 그 환경에서 어떤 기분이었고, 그게 설명이 됐을 때. 오래 가는 곡들은 그렇게 한 번에 훅 쓴 곡들이 많아요. 흔히 ‘영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이상우씨의 인생을 바꾸었을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이라는 곡을 이남우, 노영심으로부터 받을 때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그 노래는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 리메이크 곡이에요. 작곡가이면서 가수 생활도 한 이남우씨의 독집에 실린 ‘새빨간 장미처럼’이라는 곡이 원곡이죠. 정확하진 않지만 그 노래는 88년인가 89년 즈음에 나온 걸로 알고 있어요. 원곡은 전형적인 컨트리 풍 노래였어요. 가사도 달랐고. 근데 어느날 제가 듣고, 멜로디가 너무 좋은 거예요. 되레 제가 부탁해서 써온 곡은 마음에 안 들었고(웃음), 다른 거 혹시 미리 만들어 놓은 거 없느냐 했는데 그 곡을 듣게 된 거죠. 보통 작곡가들이 어떤 실책을 많이 저지르냐면 저한테 맞춰서 곡을 써주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좋은 곡이 나오기 힘들어요. 작곡가 본인이 잘 하는 곡을 써줘서 가수에게 맞을 때, 그 때 좋은 곡이 나오죠. 하지만 가수를 의식하면 뭔가 자꾸 꾸며서 만들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만들어 놓은 곡을 먼저 보자고 말해요.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고르는 경우가 많았죠. 그 날도 우연히 그 곡을 듣고 좋아서 ‘이거 할게’ 이렇게 된 거고, 이남우씨가 ‘사실은 내 1집 때 쓴 거야’라고 하더라구요. 오케이, 그러면 가사, 편곡 다 바꿀게 했죠. 2집부터는 제가 프로듀싱을 직접 했기 때문에 노영심씨를 섭외하고, 당시 ‘편곡계의 양대 산맥’이었던 이호준씨와 김명곤씨를 섭외했죠. 2집은 두 분이 반씩 나눠 편곡하신 거예요. 이 노래는 일단 가사인데, 노영심씨 가사가 기가 막히게 나왔잖아요. 그걸 듣고 김명곤 선배한테 간 거죠. 그랬더니 선배가 원래 편곡은 너무 단조롭다고 하셨어요. 라인은 잘 빠졌지만 딱 들으면 그냥 평범한 컨트리라는 거죠.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죠. 그 곡이 엄청나게 고민을 많이 한 편곡이에요. 그거, 관악 5중주예요. 관악 5중주로 가요를 편곡한 케이스는 없어요. 리듬은 쿵짝쿵짝 폴카구요, 행진곡. 그 리듬을 썼다는 것도 당시엔 파격이었고, 관악 5중주 편곡도 파격이었어요. 베이스 라인도 현악기 베이스가 아니라 바순으로 들어갔어요. 밴드의 풀사운드는 후렴에서만 나오죠. 기가 막힌 거였죠. 거기서 마케팅적인 요소는 제가 후렴 16마디만 춤을 춘 거예요. 발라드 가수가(웃음), 말도 안 되는 춤을(웃음). 그 춤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침, 저녁 3시간씩 연습해서 만든 춤인데, 그게 겨우 그 춤이에요(웃음). 물론 동작은 굉장히 힘든 동작이었어요. 지금 하라 그러면 안 돼요. 관절이 안 좋아져서(웃음).
윤호준 : 지금의 이상우씨가 있기까지 전 작곡가 박정원씨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분 이야기를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박정원이라는 친구는 저와 대학 동창이에요. 대학 때 같이 밴드를 했었죠. 그 친구는 베이스를 치고 제가 보컬을 하고. 노래 못 한다고 엄청 구박을 받았어요 그 친구한테(웃음). 근데 군대 갔다오고나서 제 노래가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전 군대에서 노래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문선대에 있었거든요. 실제 문선대 요원들은 다 프로들이에요. 그런 사람들하고 있으니까 대학교 때 우리가 했던 거는 애들 소꿉놀이였던 거예요. 군대엘 딱 가니까 완전 프로들인데, 'hotel california'가 연주가 되는 거야. 대학 때 그 곡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기타가 안 돼서 못했거든요(웃음).
물론 고참한테 혼도 많이 났어요, 아마추어처럼 노래 한다고. 기타 치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 형이 아침마다 한탄강을 내려다보면서 두 시간씩 노래 연습을 시켰어요. 당시 연습 요령이, 살짝 어려운 노래를 완벽하게 부를 때까지 하는 거였어요. 그렇게 그 곡을 마스터 하고 나면 다시 그것보다 조금 더 어려운 곡을 골라 두 달 정도 연습하는 식으로 했죠. 그렇게 연습했어요. 그러면서 제 노래 실력이 엄청 늘었습니다. 그때 박정원씨가 내가 제대 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제대하고 갔더니 가요제 나가쟤요. 이제 막 군대 갔다 왔는데. 제정신이냐고(웃음). 야, 대학도 별로 좋은 학교도 아닌데 취직할 생각이나 해라, 우리가 밥이나 먹고 살겠나. 근데 이 친구는 음악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근데 난 아니야, 난 취직할 거야 그랬어요. 사실 음악이라는 건, 그걸로 밥 먹고 살기가 현실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고 가수가 된다는 건 그때만 해도 다른 세상 얘기였으니까. 그래서 거절을 했죠 처음엔. 근데 그 친구가 저를 한 네 번은 찾아왔어요. 그래서 야, 내가 창피해서 말 안 하려고 그랬는데 우리 아버지 사업 망했어 임마. 난 방학 때 돈 안 벌면 학교 등록을 못 해. 네가 책임질 거야? 내가 그랬지(웃음). 당시 큰 카페에서 통기타로 노래 부르며 7~8만원 정도 받았으니까. 그랬더니 지가 할 말이 없으니까 다시 가더라구요. 그리고 다섯 번째 또 찾아왔어요. 야, 우리 아버지가(가요제)떨어지면 네 등록금 대준댔어(웃음). 걔가 좀 사는 집 애였거든요. 햐~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거절을 못 하겠더라구요. 에이, 그래 하자. 떨어지면 한 학기 더 쉬면 되지. 그렇게 나갔는데 돼 버린 거예요. 그 친구도 그걸 계기로 작곡자로 데뷔했고. 나도 그 친구 덕분에 가수가 된 거지.
윤호준: 곡이 정말 좋았어요.
네, 저도 곡이 좋아서 한 거지, 안 좋았으면 끝까지 안 했을 거예요(웃음). 근데 곡을 들어보니까 멜로디가 너무 좋은 거죠. 또 저한테 잘 맞고. 왜냐하면 그 친구는 절 너무 잘 아니까. 학교 때부터 함께 했으니까요. 그 친구가 드라마 <겨울연가> OST 만든 친구예요. 그 이후로 정원이는 계속 음악만 했어요. 평생 직업인 셈이죠.
윤호준: 그러면 1집에 있던 곡들도 과거에 써둔 곡들이었나요?
그렇죠.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같은 곡은 써뒀던 곡이었을 거예요. 1집에 그 친구 곡들이 많았고, 2집에도 몇 있었죠. 이제 3집부터 그 친구 곡이 없기 시작했을 거예요.
윤호준: 4집에 두 세 곡 정도가 있었죠.
아, 4집에도 있었나. 하긴 매 앨범 때마다 절 도와줬으니까요.
윤호준: 가만 보면 당시 ‘핫’한 작곡가들을 다 섭외하셨더라구요. 신재홍씨, 유정연씨 등. 직접 섭외를 다 하신 거예요? 저 사람에게 곡을 받아야되겠다 생각하시고 말이죠.
제 작업 스타일이 어떠냐 하면, 일단 앨범 콘셉트를 구상해요. 그 다음 샘플이 될 만한 팝송들을 선곡해요. 그런 뒤 작곡가들을 만나는데 작곡가 선정 기준은, 이미 떠 있는 사람들과는 일을 잘 안 해요. 그러니까 한 두 곡 히트하고 핫 해지기 시작한, 그런 사람들을 섭외하죠. 왜냐하면 그 때가 제일 ‘물’이 좋을 때거든(웃음). 그래서 그런 작곡가들만 한 스무 명 섭외를 해요. 그러고 ‘자, 내가 이번 앨범은 이런 콘셉트로 가는데 이 (팝송) 스타일들 중에 본인이 잘 쓸 수 있는 곡을 골라 달라’ 얘기하죠. 그러면 ‘형님, 전 몇 번 몇 번 쓸게요’ 이래요. 오케이, 하지만 미안한데 중복으로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부탁을 할 거다, 그래서 그 중에 좋은 곡을 고를 거라고 말합니다. 저희는 워낙 예전부터 선의의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다 보니까요. 그런 식으로 곡을 쫙 추려요. 그러면 거기서 무조건 타이틀이 나옵니다. 그러니 히트 곡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제일 핫 한 친구들이 모여서 성의껏 쓰니까. 저에게 타이틀로 낙점되는 순간 그 친구들은 큰 돈을 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타이틀을 내기 위해 열심히 곡을 썼죠. 그런 식으로 계속 앨범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런 친구들을 항상 눈 여겨 보고 있고, 교감하고, 그 친구들이 어떤 음악을 잘 쓰는지 보죠. 저는 작곡가들에게 3일에 한 번씩 전화를 해요. 작곡가들은 전화 안 하면 작업을 안 해. 글 쓰는 사람들과 똑같아요(웃음). 심할 경우에는 ‘납치’한 적도 있어요. 선밴데,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를 썼던 김지환씨라고. 그 분이 ‘프로듀서계의 대부’였거든요. 근데 이 분이 날짜를 계속 안 지키니까 ‘그러지 말고 형, 나랑 어디 놀러를 가자’ 해서 동해로 가버린 거지.
윤호준: 시나리오 작가들 경우와 비슷하네요?
네, 똑같죠. 그 작업을 얼마나 타이트하게 잘 하느냐에 따라 앨범 발매 시기가 당겨지고 미뤄지고 하는 거예요. 그게 프로듀서의 능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그 분을 2박3일 데리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곡이 딱 나오는 거죠(웃음).
빠른 곡과 느린 곡, 그러니까 ‘이젠’과 ‘비창’ 중 어떤 곡이 더 본인 성향에 맞나요?
저는 느린 노래도 잘 맞고 빠른 노래도,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잘 맞아요. 특히 펑키(Funky), 소울풀 곡들은 되게 잘 맞아요. 왜냐면 박정원씨가 베이시스트였고, 저희가 펑크(Funk) 밴드였어요. 대학교 때 보기 드문 펑크 밴드였죠. 다 헤비메탈을 할 때 우리만 펑크를 한 거예요. 좋게 얘기하면 굉장히 앞서 간 거죠. 박정원씨의 음악적인 역량이 대단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했으니까, 모든 악기를 다 다룰 줄 알죠. 그 친구가 우리 밴드 리더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가 펑크 곡을 많이 부를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이글스(The Eagles) 노래도 다른 애들은 전부 ‘hotel california’ 하는데 우리는 ‘one of these nights’ 이런 거 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소울, 펑키 쪽이 잘 맞게 됐구요. 아니면 아주 슬픈 발라드가 잘 맞는데, 제 음색이 좀 그런 편이래요. 제가 사실 자라온 환경이, 계모 밑에서 컸는데, 그래서인지 슬픔을 표현하는 게 좀 남다른 데가 있다고들 얘기를 해요. 노래도 슬픈 노래가 잘 맞다 얘기를 하고. 그걸 제일 멋있게 소화한 게 바로 ‘비창’이에요. ‘비창’은 제가 생각해도 명곡이고 지금 들어도 싫증이 안 나는 곡이에요. 클래시컬한 곡이 싫증이 덜 나는 편인데, 악기 편성도 소품 형태로 굉장히 단촐했고. 그래서 그런 노래가 지금 들어도 괜찮은 곡인 것 같아요.
윤호준: ‘이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편곡이 참 좋다고 느꼈거든요. 어젯밤 1, 2집을 연속해서 들었는데 1집 때 편곡과 2집 때 편곡 수준 차이가 너무 나더라구요(웃음).
일단 ‘편곡비’가 더블로 차이가 났구요(웃음). 그러니까 2집은 최고 편곡자가 붙었고 1집은 사실, 그렇진 않았구요.
윤호준: 소리(사운드)에서도 많은 차이가 느껴졌거든요.
그렇죠. 우리 때 시퀀서라는 게 처음 나오기 시작했고, 전자 음악이 나오기 시작한 때란 말이죠. 모듈을 얼마나 좋은 걸 쓰고, 펀칭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서 톤이 달라지니까. 샘플러라는 걸 그 때부터 쓰기 시작했으니까요.
윤호준: 확실히 90년 전후 소리는 전혀 다르거든요.
네, 그 땐 정말 장비 싸움이었어요. 지금은 장비가 발달할대로 발달해서 어떤 톤이든 다 나오지만, 그 때는 이 악기가 아니면 없는 톤들이 많았으니까요. 건반의 경우, 그 땐 S60까지 나왔는데 지금은 S90까지 나와 있죠. 근데 S60이 아니면 그 스트링 톤이 안 나와요. 아니면 ‘리얼’을 가져다 써야 하는데 리얼을 직접 쓴 경우는 많지가 않았거든요. 돈이 엄청 드니까.
윤호준: 그럼 편곡 쪽도 직접 유도를 많이 하신 편인가요?
곡이 나오면 편곡자와 상의를 하죠. 어떤 분위기로 갈 거냐 식으로. 그러면 편곡자가 뼈대를 만들어 와요. 그럼 저는 한 가지만 신경 써요. 리듬. 이 리듬 아냐, 리듬 바꿔줘. 자세히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제 노래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리듬은 거의 없을 거예요. 전 같은 리듬으로 가는 노래가 용서가 안 돼요. 너무 지루하니까. 대부분의 좋은 곡들이 다 그렇긴 하죠. 리듬이 곡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니까. 뼈대이기 때문에 그걸 세워놓고 거기에 입혀나가는 일은 편곡자 보단 연주자 노력이 더 커요. 예를 들어 편곡자는 기타를 뮤트(Mute) 시키면서 아르페지오 느낌으로 갔는데, 기타리스트는 그걸 '치카치카' 리듬으로 쪼갤 때 기타리스트의 해석이 훨씬 좋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연주자 역량이 편곡에서 미치는 영향이 크죠.
윤호준: ‘이젠’ 같은 곡도 느리게 부르면 얼마든지 발라드가 될 수 있는 곡이거든요. 그런데 락킹하고 펑키하게 편곡을 하셨잖아요. 박정원씨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곡을 써오신 건지 궁금하네요.
음, 그건 느린 노래로 가면 좀 이상할 걸요? 그래도 되는 멜로디긴 한데, 빠른 노래가 훨씬 예쁠 거예요. 그리고 그 노래는 저도 가끔씩 듣는데, 그 땐 어쩜 그렇게 맑고 깨끗하고 쫙 쫙 뻗는 소리가 그렇게 깔끔하게 나왔는지(웃음). 지금 하라 그러면 못 할 것 같아요. 때 묻지 않은 그 느낌이, 그 땐 몰랐는데 ‘아, 이게 내 큰 장점이었구나’ 싶더라구요. 음정 좋았고, 힘 예술이었고, 목소리 무지 맑았고. 그래서 지금 들으면 되게 신기해요.
윤호준: 제 기억에 2집 첫 활동 땐 ‘나만의 그대’를 부르셨어요. 그러다가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이 대박이 났고, 다시 ‘이젠’으로 또 큰 성공을 거두셨죠. 그래서 ‘이젠’의 성공 때문에 3집에 있는 ‘오! 사라’나 ‘엘리베이터’ 같은 곡들을 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데요, 어떠신지?
그런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구요. 저에게 리듬감 있는 노래가 잘 맞다는 걸 그 때 안 거예요. 저는 무조건 발라드 쪽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리듬감 있는 노래가 더 잘 어울리더라구요. ‘오! 사라’나 ‘엘리베이터’ 같은 노래는 되게 비트 있고 리듬감 있는 노래잖아요. 그게 생각보다 저에게 잘 어울리더라구요. 그게 다 박정원의 영향이었죠. ‘이젠’도 사실 펑키거든요. ‘이젠’의 편곡은 박정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든 거예요. 그건 연주자 힘을 빌린 것도 없고 본인이 다 한 거였죠. 기타도 본인이 생각한대로 디렉션을 해서 연주자에게 치도록 한 거고. 정원이가 편곡자로선 정말 실력있는 친구죠. 예전에 민해경씨의 ‘보고 싶은 얼굴’에서 라틴 리듬도 그 친구 작품이거든요. 그 친구가 베이시스트다 보니까 리듬을 굉장히 잘 썼죠.
아까 잠깐 말씀하신 새 앨범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나요?
앨범을 거의 17~18년 만에 내는 거라 지금 바짝 집중하고 있구요. 작곡가 섭외도 하고 있어요. 근데 그런 건 있더라구요. 제가 히트곡을 많이 냈던 가수다 보니까 예전 히트곡들보다 더 센 노래를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작곡가들이 저에게 의뢰를 받으면 부담을 갖나봐요. 해서 부담 갖지 말고 당신이 잘 하는 걸 써달라고, 그러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상우씨가 생각하는 90년대의 탁월한 음악인 한 분만 추천받고 이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사실, 가요사에서 봤을 때 터닝 포인트 같은 작곡가들과 가수가 있어요. 그들은 대중을 끌어간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은 굉장히 높이 평가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게 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예컨대 저는 조용필 선생님이 우리 가요계를 이끌어왔다고 보거든요. 그러면서 유재하씨가 나왔어요. ‘한국적인 록’은 조용필 선생님이지만 ‘한국적인 팝’을 얘기하려면 유재하씨를 언급해야 하죠. 유재하씨가 나오면서 팝적인 곡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기 시작해요. ‘슬픈 그림 같은 사랑’도 마찬가지고 ‘세월이 가면’도 마찬가지고. 그게 그 때 포인트였어요. 그러면서 이영훈씨도 나오고. 그러다가 또 한 번 음악적으로 풍성했던 시대가 윤상, 손무현, 김현철, 신재홍, 신해철 이런 친구들이 나왔을 때 작곡가들이 물갈이가 한 번 돼요. 이 때가 저랑 함께 움직였던 세대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이 김현철과 신재홍이었어요. 특히 신재홍씨는 해외파이기도 했고 활동을 굉장히 왕성하게 했죠. 김현철씨는 자기 음악을 했으니까. 신재홍씨를 알게 된 계기가 또 박광현씨 때문이었어요. 박광현씨가 저랑 강변가요제를 같이 나갔었거든요. 당시 저는 박광현씨에게 곡을 받고 싶었는데 자기도 앨범을 내야 하니 힘들다, 그래서 자기 친구를 소개해주겠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바로 신재홍씨였고 신재홍씨의 친구가 또 유정연씨였던 거죠. 신재홍씨는 가요에서 잘 안 나왔던 세련된 ‘팝’을 썼던 사람이었어요. 사실 조정현씨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도 처음엔 저한테 온 곡이었어요. 제가 집었던 곡이었죠. 근데 부산 갔다오는 사이 제 매니저가 고추가루를 뿌려 놓은 거예요(웃음). 그 땐 정말 아까웠죠. 완전 타이틀감이었는데. 어쨌든 저는 신재홍씨를 추천하고 싶네요.
이상우씨는 현재 '가난한' 인디 뮤지션들을 비롯, 음악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뮤직 빌리지' 조성에 한창이다. 물론 아들 승훈군에게 '평생 무대'를 만들어주기 위함도 조성 목적 가운데 하나다. 인디 뮤지션들에겐 녹음실을 무료로 대여해주고, 여유가 되는 뮤지션들에게 그 녹음실은 '저렴하게' 대여될 예정이다. 상설 야외 무대도 있어, 공연할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그 곳에 설 수 있다고 이상우씨는 밝혔다. 내년 정도엔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음악인으로서 귀감이 될 정말 중요한 일을 '사업가 이상우'는 하고 있었다.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