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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Oct 12. 2016

슬픔까지도 섹시하게 만들 줄 알았던 가수

이광조 인터뷰


슬픔까지도 섹시하게 만들 줄 알았던 가수, 이광조.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겠지만, 국악/재즈 전문 레이블 오디오가이(Audioguy)는 기어이 그를 다시 한 번 기억하려 스탠다드 재즈 보컬 앨범 [I`m Old Fashioned]를 기획해 세상에 내놓았다. '한국적'이라는 허무한 단서를 붙여야 하겠지만 실제 나는 옛날부터 이광조의 목소리에서 소울과 재즈를 함께 느꼈었는데, 이번 앨범은 그 증거인 것만 같아 꽤나 흥미로웠다. '상처' 같은 곡이 그랬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또한 그랬다. 하물며 '오늘 같은 밤', '즐거운 인생'은 아예 빅밴드와 삼바로 요리하지 않았던가. 머나먼 과거, 잊혀져선 안 될 한 보컬리스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오디오가이 스튜디오를 찾았다.


빅밴드 스윙을 좋아했던 가수 이광조


늘 이광조님의 음색에서 '재지'함을 느꼈습니다. 물론 2004년, 시나트라의 'A Day In The Life Of A Fool'을 부르기도 하셨고, ‘오늘 같은 밤’도 빅밴드 스윙이었긴 했지만요. 이번 재즈 앨범은 그런 기존 음악 행보와 그리 동떨어진 작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약간 섞은 거죠. 한국에선 안 되니까. 우리나라에선 재즈가 아니라 재즈 할아버지라도 쉽지 않잖아요. 근래 들어 재즈 팬이 많아졌다고는 하는데 그래봐야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는 미미한 숫자거든요.


벼르신 작품인가요?
아뇨, 벼른 건 아니구요. 우연히 하게 되었어요. 재즈를 듣는 건 좋아했는데, 할 때는 거부 반응이 많았어요. 왜냐면 팝, 가요 하는 사람이 남의 밥그릇 뺏는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재즈를 한다, 이게 아니고 연주하는 친구들이, 그리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아, 내가 좀 도와줘야 되겠다, 해서 시작이 된 거예요.


한국 대중은 여전히 재즈를 클래식 만큼 어렵고 멀게 여깁니다. 재즈의 매력은 뭘까요?
저에게 재즈는 자유로운(free) 느낌을 줘요. 뭐랄까, 아주 질척대는 분위기. 질척댄다고 해서 퇴폐적인 게 아니라 느낌이 있고, 외로워지는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물론 재즈도 신나는 것도 많지만, 제가 가지는 느낌은 그래요. 제가 살던 샌프란시스코에는 재즈 바가 딱 한 군데 있었어요. 예전엔 많았지만. 거길 갔어요. 아주 작은 바에서 5인조가 나와서 공연을 하는데 굉장히 좋더라구요. 또 샌프란시스코는 안개가 자욱한 도시라 밤에 들으니까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그래도 해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여기 와서 얘기가 나와 하게 된 거죠.


오랜 샌프란시스코 생활을 접고 귀국해 내놓은 이광조의 재즈  앨범 [I'm Old Fashioned] 커버 이미지


음반 정말 좋던데요?
어우, 아니에요. 굉장히 창피하고(웃음). 요즘은 튠(tune)을 제대로 잡고 가는데 비해 이번 앨범은 튠도 하나도 안 잡고, 고치지도 않고 한 거예요. 노래도 다섯 번 불러 끝낸 거고. 그래서 제가 듣기 싫어하는 앨범 중 하나예요(웃음). 너무 창피해서.


선곡은 모두 직접 하신 건가요?
아뇨, 저도 하고 편곡하는 친구도 했고 그랬어요. 제가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곡도 있어요. 가령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같은 곡은 혀가 막 굴러가야 돼요, 너무 바빠서(웃음). 그런 곡은 처음 들어본 거고. 사실 노래는 익어서 해야 하는데 익히질 못하고 한 거라. 몰랐던 노래도 내 몸이 받아들여 나와야 하는데 그렇게는 못 한 것 같아요.


취향은 스윙이신가봐요.
전 빅밴드 스윙을 제일 좋아해요. 근데 이 나라는 빅밴드 쓰기가 굉장히 힘들더라구요 정말(웃음). 할 수 있는 장소도 없고, 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첫 곡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를 들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이광조가 불렀다는 사실을 모르고 들으면 계속 재즈만 해온 보컬리스트로 착각할 정도였거든요. 혹 재즈에 맞게 음색을 가다듬으신 건가요?
그런 건 없어요. 사실 제가 연습을 안 해요. 정말 할 줄을 몰라서 안 하는 거죠.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도 딱 듣고 팝 스타일이 묻어 있으니까 할 수 있겠다 싶어 한 거지, 그게 편곡자 분이 곡을 너무 길게 늘여놓으셔서 노래하는데 무지 힘들었어요(웃음).



연습을 할 줄 모른다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네, 연습이 없었어요. 잘난 척이 아니라, 제가 연습을 힘들어해요. 기타도 못 치지, 악보도 못 보지, 미대 나와서 노래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데 주어지면 열심히는 해요. 단지 연습을 못 해서 항상 여러분께 미안한 거죠. 실제로 1~2년 뒤에 그 곡들을 제가 더 잘 불러요. 녹음할 때 잘 불러야 하는데.


이번 목소리엔 샌프란시스코의 150년 된 아파트와 태평양의 향취가 녹은 건가요?(웃음)
나왔나요?(웃음) 아뇨, 저도 사실 그런 게 나오길 바랐어요. 좀 더 ‘빠다스럽게’ 할려고 했는데, 그러면 또 욕 먹을 것 같아서 굉장히 갈등이 심했어요. 이렇게 부를까 저렇게 부를까 하다 낸 거죠.


녹음하시면서 어떤 곡이 가장 재미있었고 또 어떤 곡이 가장 힘드셨나요?
역시 ‘Let’s do it, let’s fall in love’라는 곡이었는데, 재미도 있었지만 힘도 그 곡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우리 말도 아닌데 다다닥 붙여서 불러야 하니까. 근데 결국 재미있게 나온 것 같아요.


공식 디스코그래피가?
20집이 훨씬 넘었을 걸요 아마. 쓸데 없이 판만 많이 내 가지고, 팔리지도 않는 거(웃음).


이 정력적인 활동은 자신을 다잡기 위한 의식적인 것이었나요?
그렇죠. 사실 남들처럼 밤무대 가서 몸 바쳐서 열심히 하진 않았고, 먹고 살려다 보니 조금씩 했어요. 물론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정말 한 것도 아니죠. 이걸 하지 않으면, 앨범을 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사실 판을 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예요. 굉장히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거거든요 그게. 왜냐면 제가 느낌을 제대로 표현을 못 하면 녹음 후 잠도 안 오니까. 그래도 희한하게 쉴 때가 되면 주위에서 제안이 들어와서 그렇게 계속 내게 된 거죠.



노래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요.
계기랄 건 없었어요. 중학교 때 잠시 학교 합창단을 했었는데 제가 사실 굉장히 수줍어 하고, 남 앞에 서는 걸 두려워 했던 애였거든요. ‘내가 과연 남 앞에서 노랠 부를 수 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제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그래서 ‘어? 어떻게 네가 노래를 할 수가 있냐’면서 되게 신기해해요.


그럼 언제부터 두각을 나타내신 건지? 

대학교 때, 통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던 시절 저는 간첩이었어요, 그걸 못 쳐서(웃음). 한 번은 미대 실기실에서 기타를 치면서 너 노래 한 번 불러봐, 해요. 그래서 그림 그리다 밤 8, 9시까지 흥얼거리곤 했죠. 그 때 홍대에는 가수가 없었어요. 서울대 미대에 가수가 많았죠. 김민기, 현경과 영애, 이정선 같은. 당시 1년에 한 번씩 학교를 번갈아 가며 하던 체육대회가 있었어요. 태능 배밭에서 했는데, 끝나고 배밭에 다 모였어요. 서울대 애들은 가수가 많으니까 나가서 노래하고 난리가 났죠(웃음). 근데 저희는 가수가 없으니까 나가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 때 누가 뒤에서 떠밀어 얼결에 노래를 부른 거예요. 그게 계기가 되어서, 물론 그 때도 잘 불렀던 게 아니고, 쟤 진짜 목소리 희한하다 해서 이정선씨가 ‘너 나랑 같이 해볼래?’ 한 거죠. 네가 코러스 좀 해라, 그렇게 시작이 된 거예요. 


말씀대로 홍대 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이신데 가수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제가 4학년 때 취직 자리 제안이 왔어요. 당시 홍대 미대는 취직이 100%였거든요. 두 군데였는데, 어딜 가야 하나 그러고 있는데 이정선씨가 연락이 와서 ‘너 판 한 번 내 볼래?’ 하는 거예요. 그 때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 나는 가수가 될 팔자는 아니니까 한 장만 내 보자 해서 시작이 됐어요. 그게 제대로 나와줬으면 제가 가수를 하지 않았을 텐데, 3개월 동안 앨범이 안 나오는 거예요, 녹음은 다 끝났는데. 알고 보니 회사 내부에서 알력 다툼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 노래가 너무 어렵고, 창법이 이상했대요. 당시에는 포크와 트로트 밖에 없었거든요. 그 와중에 이상한 걸 들고 나오니까 ‘안 팔리겠다’ 생각이 든 거죠. 옛날에는 동네마다 소매상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이제 가게 앞에 걸어놓거든요. 사실 저는 살면서 홍보라는 걸 못 받아봤어요. 근데 그 때 소매상 아저씨들이 절 알려준 거죠. 이거 괜찮다, 사 봐라 이런 식으로. LP 시절이었죠. 반주 하나, 노래 하나 투 트랙으로 녹음하던 시절.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삐긋하면 다시 처음부터 했던(웃음).  


롤모델로 삼고 싶을 만한, 좋아했던 보컬리스트가 분명 있었을 것 같습니다. 국내든 해외든. 
미안한 얘기지만 국내엔 없었어요(웃음). 하지만 외국엔 정말 많았어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도 너무너무 좋아하고,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도 되게 좋아했고, 바바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도, 어우, 너무 많죠.



77년 솔로로 데뷔하신 뒤 풍선과 해바라기 활동을 하시다 다시 솔로로 돌아오셨습니다. 당시 상황을 듣고 싶네요.
솔로 앨범은 당시 작곡자와 사이가 틀어져서 한 장만 내고 돌아섰구요. 풍선도 제가 나가서 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해바라기는 이정선씨가 저한테 3개월만 코러스를 도와다오 해서 들어간 건데. 3개월이 아니라 6개월이 지나도 사람을 안 구하더라구요(웃음). 그래서 내가 깨고 나왔지. 왜냐면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목소리가 하이(high)인데다 목소리까지 커서. 그 때는 요즘처럼 넌 이 채널, 난 이 채널 이런 게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하려면 저만 저 멀리 떨어져서 녹음을 해야 했어요. 전 그게 너무 싫었어요. 사람들은 별나다 했지만, 저는 정말 힘들었거든요.


해바라기 2집에서 "그 외 guitar를 도와주신" 것에 불과했던 이주호씨가 나중에는 해바라기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잘 모르거든요. 해바라기에 이광조, 한영애, 김영미씨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사람들은 그걸 전혀 모르죠. 30대들도 잘 모르니까. 주호는 군대 가기 전에 해바라기를 잠시 했었어요. 하다가 군대를 갔고 이정선씨가 저에게 3개월만 도와달라 한 거예요. 원래 해바라기는 지금의 듀엣이 아니었어요. 서강대 학생 세 명과 홍대 다니던 저로 구성됐었죠. 그런데 이 세 명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저만 혼자 남게 됐고, 자연스럽게 이정선씨가 이어 받게 된 거죠.


이광조님 인생의 노래는 역시 85년작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을 것 같습니다. 곡을 쓰신 이태열씨는 어떤 분인가요?

지금이야 이 쪽 일을 오래 해서 큰 사람이 됐지만, 그 때만 해도 베이스 치던 친구죠. 하루는 곡을 가져왔어요. 처음엔 곡이 상당히 심심했어요. ‘아~ 당신은~’ 이렇게 나가는데 너무 촌스러워서(웃음) 야, 이건 아닌 것 같다 해서 바꾼 거죠. 시작은 드라마틱하게 가고 멜로디도 조금 바꾼 거예요 사실은. 그렇게 히트를 했죠, 히트는 했는데 지금의 저에게 그 곡은 부르기 싫은 곡이에요. 날 미치게 만드니까. 너무 높아요, 쉬지 않고 계속 올라가는 노래거든요 그게. 그래서 정말 한 끼 먹어선 부를 수 없는 노래죠(웃음).



대표곡이지만 싫은 노래군요(웃음).
네, 노래 부르려고 하면 두려움부터 앞서니까(웃음).


80년대와 90년대 대중가요계를 두루 겪으셨습니다. 두 시대에 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요.
80년대 들면서 굉장히 다양해지기 시작했죠. 90년대에는 진짜 완전히 꽃을 피운 거고. 그리고 2000년대엔 아이돌들이 나와서 장악을 했으니 이제 우리는 뒤로 밀려야지 사실은(웃음). 근데 좀 아쉬운 건 나이 드신 분들이 자기들 것을 좀 찾아야 하는데, 미디어에서 이건 안 보면 안 된다, 안 들으면 안 된다 이래야 시늉을 해요. 자기들 취향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워요. 평가할 줄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자신이 줏대를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좀 약한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도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아요. 하도 안 나타나고, 또 저 스스로 음악을 하기 싫어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젠 악착 같이 나설 거예요. 안 되겠더라구요(웃음).


악착 같이 나선다?
‘복수’랄까요. 음악에 대한, 사회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어요. 너무 편견이 심하고, 왜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다양하다는 걸 모를까 사람들이. 꼭 내 앨범을 사달라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한 번 느껴봐라. 이번에 나온 재즈 앨범 같은 경우도 저는 집에서 듣길 원하지 않았어요. 바 같은데서 흘러나오면 와인 한 잔 마시면서 즐기는, 그런 걸 원했는데 뭐, 되겠죠 이젠. 계속 잘 살아질 테니까.


90년대에 들어서 '그대여 어서와'라는 곡을 윤상씨와 함께 작업하셨어요. 이광조와 윤상. 언뜻 잘 매치가 되질 않는데요.
아, 왜 그 곡을 찍을까. 제일 ‘후졌던’ 곡인데(웃음). 당시에 윤상은 어린애였죠. 그 때 걔가 ‘찍는 음악’을 들고 나왔던 애예요. 지금이야 거장 대접 받고, 예능에도 나오고 그러지만. 그 때만 해도 굉장히 순수한 친구였어요. 근데 작업을 한 번 해보니까 한 곡으로 끝내야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나쁜 마음에서가 아니고, 아, 나랑 안 맞네 그런 차원에서요. 가사 없이 곡을 딱 받았는데 그냥 준비없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 이걸로 끝이겠구나 싶었죠. 우리가 해보면 알거든요.


어떤 인터뷰에서 2000년도에 “노래가 싫어 떠났다”고 헤드라인이 나왔던데, 사실은 노래를 둘러싼 비즈니스가 싫어 떠나신 게 아닌지?
네, 그게 싫은 거죠. 노래하는 게 싫은 건 없어요. 사실 전 사람들을 못 만나요. 지금도 피디 얼굴들을 몰라요. 그냥 방송국 스튜디오에 가면 노래만 하고 나와요. 언젠가는 방송국 관계자들이 그런 말도 했대요. ‘어우, 쟨 뒤에 누가 있는거야? 왜 저렇게 X가지가 없어, 인사도 안 하고’. 아니 내가 알아야 인사를 하든 말든 하죠(웃음). 근데 앞으로는 제가 더 그럴 거예요. 이제는 내가 원하는 걸 할 거니까. 아까 복수한다는 게 그거예요. 음악에 대한 복수를, 한 번 할 거예요. 얼토당토 않은 곡들은 되고, 심혈을 기울인 곡들은 안 되고 이래서. 내 것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이 참 속상하고 슬프고 그러죠.



요즘 가요계를 보고 드신 생각인가요?
옛날부터 많이 들긴 했지만 아, 내가 바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가 잘 해야 복수도 할 수 있는 거지, 잘 못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귀국은 87세 노모가 편찮으셔서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이 편찮으신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멀리 있다 보면 위독하시단 연락을 받고 출발했을 때 이미 늦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영주권 반납을 결심할 때까지.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죠. 그게 값이 얼만데 이러면서(웃음).


당시 오실 때 상황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삶이라는 것에 대해 돌이켜보게 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렇죠. 제가 샌프란시스코 있을 때 매일 바닷가를 갔어요. 나만의 바위가 있을 정도로. 그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나, 그 좁은 데서. 그랬는데 결국엔 다시 이 곳으로 유턴하게 된 거예요(웃음).


복수를 하기 위해?(웃음)
그 복수를 위해선 쉬운 곡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곧 나올 새 앨범 곡들은 다 쉬워요. 옛날에 내가 불러보지 못한 ‘엄마’라는 가사도 있고, ‘그래, 괜찮아’ 같은 것도 있고. 그래서 이제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 쉬운 걸 원하고 있구나. 그런데 저는 쉬운 게 더 어려워요. 표현하기가. 그래서 이번에 정말 애먹었는데, 작곡가가 좋아해줘서 다행이죠.


노래 외에는 무얼 좋아하세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관심도 없고.


(웃음)그림이 있잖아요.
네, 이제 그건 하려고 연필을 무지 사왔어요. 스케치 하려고. 뭐, 좋아하는 거라면 영화 보고, 제가 먹는 걸 좋아하는데 남들은 비싼 걸 선호하지만 전 싸고 맛있는 것들.


예를 들면요?
가령 제가 부산 같은 곳에 가더라도 밀면이나 떡볶이를 찾아 다니죠. 돈을 많이 들이면 당연히 잘 만들겠죠, 재료가 좋으니까. 그런데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맛있게 만들어내는 것, 그게 진짜 잘 하는 거 아니겠어요?



새 앨범은 따로 콘셉트 같은 게 있는 건가요?
콘셉트는 특별히 없구요. 쉽고 정감있는 쪽으로 갔어요. 신보에는 9곡이 들어가는데 4곡 정도가 굉장히 다양하게,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으면 좋아할 노래들이 꽤 있어요. 어떤 곡은 마이애미 해변가에서 부르는 느낌도 있고. 좀 재미있을 것 같아요.


메인 작곡자는 누구?
박호명이라는 작곡자가 있어요. 그 친구가 저한테 와서 이런 곡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하더라구요. 들어보니 괜찮아서 그래, 또 까먹을 각오 하자(웃음), 그러고 시작을 했죠.


(웃음)마지막 질문입니다. 언젠가 후배들에게 '노래를 부르기 싫으면 무대에 올라가지 마라', '쫓기듯 일처럼 노래 하지 마라'고 하셨는데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고, 또 앞으로 불러 나갈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뭐, 글쎄요. 제가 건방지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웃음). 그저 너무 보여주기식, 그러니까 실력도 안 되면서 곡 하나만 띄워서 어떻게 해보자는 요행, 그런 마음을 없애야 할 것 같아요. 진실되게, 설사 그게 오래 걸릴지언정. 입 한 번 쓱 닦고 버리는 휴지 같은 뮤지션, 가수가 되지 않기 위해선 진실되게 노래해야 하고. 너무 남 앞에서 보여주려고만 말고, 연습을, 어우, 제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웃음). 어쨌든 연습을 열심히 해서 그 노래를 자기’화’ 시켜서 보여주는, 그걸 해야할 것 같아요. 저도 옛날엔 어려서 몰랐는데 후배들도 나이 들면 알게 될 거예요.(웃음)


그는 인터뷰 끝에 "노래라는 건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미술 전공을 한 가수다운 비유였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글도 그것과 다를 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깜박거리는 커서 앞에서, 길게는 수 십 분을 문장 하나와 싸워야 하는 고통. 하지만 비워내고 나면 또 그것 만한 기쁨이 없는 보람된 노동. 다시 마이크 앞에 선 이광조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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