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eche Mode [Spirit]
80년대 영국 대중음악의 시작은 신스팝 또는 뉴 로맨틱스에서 비롯되었다. 같은 듯 다른 두 장르는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로부터 일렉트로닉 유전자를 흡수했고 데이비드 보위와 루 리드, 록시 뮤직으로부터는 팝, 디스코, 아트록을 녹인 글램록 성향 외 내면과 외면의 도발적 착상까지 두루 물려받았다. 디페시 모드, 울트라복스, 휴먼 리그를 신스팝에 편입시킬 수 있다면 듀란 듀란과 컬처 클럽은 뉴 로맨틱스 밴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포스트 펑크(Post-Punk)를 기치로 뻗어나간 80년대 영국 음악신의 새로운 경향, 이른바 ‘뉴웨이브(New Wave)의 두 번째 웨이브’였다.
디페시 모드는 바로 그 신스팝 계열의 선두에 있는 밴드로 신보 ‘Spirit’은 그들이 데뷔 36주년을 맞아 내놓은 통산 14번째 작품이다. 여기서 한 가지. 따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들이 신스‘팝’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팝의 개념, 그러니까 듣기 편하고 밝고 신나는 그런 음악(만)을 하는 팀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데뷔작 ‘Speak & Spell’을 내고 2~3년 동안은 이쪽에 큰 관심 없는 사람들도 어깨를 들썩일만한 음악을 한 건 사실이지만 84년작 ‘Some Great Reward’에서 다크 웨이브(Dark Wave)와 인더스트리얼(Industrial)을 다루면서 디페시 모드는 베이스와 미디 비트를 내세운 흥겨운 그루브를 줄이고 대신 깊고 질척이는 음악을 들려주리라는 예고를 했다. 역작 ‘Violator’와 각종 장르를 탐닉한 ‘Songs of Faith and Devotion’ 이후 디페시 모드의 창작 모드는 그렇게 더 축축하고 더 쓸쓸하고 더 염세적이 되었다. 마릴린 맨슨과 데프톤스(특히 프론트맨 치노 모레노), 나인 인치 네일스와 뮤즈, 개리 뉴먼 그리고 람슈타인 같은 헤비메탈 밴드들이 왜 하나 같이 이들 팬을 자처하는지 그들의 음악 진화는 보여주는 것이다.
퍼지 신스로 맥을 풀어나간 첫 싱글 ‘Where's the Revolution?’부터 밴드는 앨범이 얼마나 덜 ‘팝적’일지를 들려준다. 사랑과 사람, 그리고 관계의 철학을 파헤쳐온 디페시 모드가 신작에서 택한 주제는 변화와 혁명, 그리고 존 레논식 사랑과 평화이다. “우린 광신자”라고 말하는 ‘Going Backwards’를 시작으로 제목부터 암울하기 그지없는 ‘Fail’까지, 밴드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지와 사람들이 드러내기 꺼리거나 망설이는 사랑을 찾아 처절한 음악 여행을 감행한다. 과거 피아노 발라드 ‘Somebody’를 짓이긴 듯 느껴지는 인더스트리얼 발라드 ‘Poison Heart’와 데이브 개헌이 먼저 간 데이빗 보위를 추모하며 크루너(Crooner) 보이스를 뽐낸 ‘Cover Me’는 업비트로 처리한 ‘So Much Love’와 살짝 선을 그으며 이번 작품의 전체 공기를 대변하고 있다. 근엄하고 세련된 미래지향적 소리. 지난 20 여 년간 쌓아오고 감당해온 사운드 디자인을 디페시 모드는 이번에도 미련없이 펼쳐보였다.
하지만 이 음반 역시 대부분 작품들의 숙명일 '호불호' 사이에서 웃다 울다 하는 눈치다. 변하지 않아 별로이고 변함이 없어 최고라는 대중 취향의 이중인격. 그나마 '올뮤직'과 '가디언', '모조' 같은 유명 웹진/매거진들이 과감하게 80점 이상을 던진 덕분에 'Spirit'은 객관적 체면치레는 해낸 것으로 보인다.
부정해야 긍정할 수 있는 현실을 사는 우리. 혁명(revolution)과 정신(spirit)을 앞세운 디페시 모드의 신보는 헌정 사상 세 번째 전직 대통령 구속 소식을 들은 오늘 참으로 적절한 배경 음악이 아니었는지. 과거 '멜로디 메이커'지가 앨범 'Some Great Reward'에 보낸 찬사("진정 주목할 만한 발전")를 조금 바꾸어 "진정 주목할 만한 앨범"이라고 나는 이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