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크노트 [Je suis Croque-note]
미국 문화를 좋아하고 영어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곳에 사는 우리가 프랑스에 갖는 감정 또는 이미지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마 한 단어로 요약해야 한다면 ‘낭만’일 것이다. 가령 예술에서, 상업성을 담보하는 미국의 것에 비해 왠지 프랑스의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 낭만을 위한 예술일 것처럼 한국인들에겐 여겨지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마시는 커피와 파리에서 마시는 커피가 다른 이유는 마크 트웨인과 빅토르 위고의 문학세계가 다른 온도를 지니는 맥락일 것이고, 고다르와 큐브릭이 동시대 전혀 다른 세상을 창조해내었다는 이야기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한국인에게 프랑스는, 그곳의 진짜 사정이 어떻든 느리고 여유 있는 낭만의 나라일 가능성이 높다.
뜬금없이 프랑스 얘기를 꺼낸 이유는 지금 소개할 앨범의 주인이 프랑스에서 드럼을 배우고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절 감성을 자신의 예명에 대입했는데 바로 크로크노트(Croque-note)이다. 뜻은 ‘서툰 뮤지션’. 그의 말을 들어보니 “솜씨 좋은 말보다 서투른 말 한마디가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믿어 자신의 음악도 그런 울림 있는 ‘서투른 말’이 되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물론 단순히 그가 프랑스에 살다 와서 프랑스어로 활동 명을 짓고 ‘On Y Va (같이 가요)’ 같은 프랑스어 곡을 불러 그곳의 낭만을 말한 건 아니다. 나는 평소 낭만이라는 것은 느림에서 온다고 믿어왔기에 ‘너에게 닿기를’ 정도를 빼고 철저하게 느린 음악을 데뷔작에 담은 크로크노트를 프랑스와 어떤 식으로든 결부 지으려 한 것이다. 이글스 곡 제목(‘Take It Easy’)을 느림의 대명사인 달팽이와 거북이라는 ‘택길이지’로 해석한 크로크노트 삶의 모토. 그것은 분명 '여유'라고 나는 확신했다.
눈물처럼 울컥하는 허스키 보이스, 기타와 피아노(낙타사막별의 신세빈이 연주했다)가 엇지르는 커다란 여백, 위로와 그리움, 그 사이를 흐르는 공감, 차분한 어쿠스틱 사운드, 곡마다에 뿌리내린 사랑스러운 멜로디. 이아립과 시와가 데미안 라이스를 목격한 이 쓸쓸한 울림은 느린 것이 천대받고 소외되는 현대 사회의 바쁨(방향상실)을 향한 반문 내지는 반대처럼 들린다. 무릇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꺾는 이치와 같달까. 곡 제목을 아예 개 짖는 소리로 지은 ‘멍멍’을 듣고 먹먹해지는 것은 그래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한 서툰 뮤지션의 서툴지 않은 질문처럼 느껴진다.
느림에서 여유로, 다시 여유에서 낭만으로 이어지는 삶의 아름다운 저변을 상실한 사람들을 위한 음악. 마음으로 듣고 가슴으로 깨달을 수 있는 국산 인디팝 음반을 오랜만에 한 장 만났다. 느려지고 늘어지자.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