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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May 30. 201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최이철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시간]은 한국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and the Family Stone)이었던 사랑과 평화의 기타리스트 최이철이 1971년 아이들로 데뷔 이후 낸 첫 솔로 앨범이다. 고 주찬권, 엄인호와 수퍼 세션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한 사이드 프로젝트 외 그가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쳐보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의외다. 의외는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로 최이철 하면 왠지 잘 가다듬은 훵키 뮤직을 들려줄 것 같은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엔 차분하고 낭만적인 재즈가 잠들어 있었다. 한국의 훵크록 거장은 자신의 솔로작을 위해 과거 청계천 음반 가게에서 만나 반한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대신 한 쪽으로 치워두었던 칙 코리아(Chick Corea)를 선택한 것이다.


최이철의 솔로 앨범에서 훵크는 첫 곡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딱 한 번 들을 수 있다. 이후 11곡에서 그의 기타는 사랑과 평화 5집 멤버인 안정현의 건반 및 프로그래밍, 그리고 베테랑 세션 드러머 배수연의 연주와 함께 래리 칼튼(‘하루의 자유’)과 개리 무어(‘유라시아의 아침’), 리턴 투 포에버(‘꿈꾸는 달빛’)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여기엔 최이철 자신이 직접 연주한 아이리시 휘슬과 리코더에 우리 전통 관악기인 중금도 더해져 그가 의도한 앨범의 방향 즉, 동양 음악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흘러내리듯 일그러진 타이틀 ‘잃어버린 시간’에서 다시 ‘어’자와 ‘간’자를 비틀어 최이철 음악 인생에 담긴 곡절을 표현해낸 강찬원의 디자인, 그리고 회색빛 고목 벤치에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거장의 뒷모습을 담은 김동명의 사진 한 장은 사실 이 음반을 듣지 않고도 이 음악을 짐작할 수 있는 힌트들이다. 가령 작품에서 가장 결정적인 멜로디를 가진 타이틀 트랙 ‘잃어버린 시간’의 그 쓸쓸한 분위기에 처해보면 저 글자와 사진 이미지가 말하려 한 것들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한 사람 한 시대의 고독과 은둔이 있고 그 모든 것을 녹여 증발시키는 시간이라는 괴물이 있다. ‘유라시아의 아침’ 같은 어덜트 컨템포러리 사운드가 마냥 밝지만 않은 것은 이 앨범이 가진 그런 노장의 깊고 어둔 성찰이 음악 위에 드리워져 있어서일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가을비’는 그 노골적인 감성 표현으로 보면 된다.


일렉트릭 기타가 우는 순간을 뺀 나머지 순간들, 그러니까 윤승태가 스틸 스트링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할 때 보드라운 나일론 줄을 메단 클래식 기타와 굴곡 없는 프렛리스 베이스를 최이철이 선호한 것 역시도 이 음반이 가진 거의 종교에 가까운 침묵의 지향 때문일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안정현의 신시사이저와 더불어 삼라만상을 조각 짓는 ‘달빛사이로’ 같은 곡에서 그러한 성향은 잘 드러난다. 물론 정정배의 날랜 퍼쿠션과 최이철의 입술이 몰아낸 중금 소리가 안정현의 건반에 가만히 안기는 모습도 애초 이 앨범이 가려했던 길을 잘 묘사해내고 있다. 오르간과 피아노가 똑같이 신비로운 '바람을 타고'는 어느 한 켠 이 음악들의 쉼터 같은 곳이리라.


걸쭉한 훵크 그루브를 맛볼 줄 알았던 음반에서 만난 가슴 벅찬 재즈 뉴에이지의 낭만. 결국 인간 최이철이 잃어버린 시간은 기타리스트 최이철이 되찾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 이 글은 대중음악 전문지 <파라노이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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