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Aug 09. 2017

LP, 음악의 '아날로그 반격'


아날로그는 인간의 본질이다. 리테일 컨설턴트 파코 언더힐의 말처럼 인간은 “오감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육체적 존재”이다. 인간은 먹어야 살고 집이라는 공간이 있어야 인간은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옷을 고르는 행위는 디지털적일 수 있어도 그것을 입을 때 인간은 무조건 아날로그적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관계를 형성하는 근본에는 언제나 신체적 경험이 있다. 이런 것들에 간접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직접적이고 물리적이며 또한 과시적이다.

근래 음악계에선 LP의 부활이 화두다. 너무 많은 선택지가 되레 음악 선택을 방해하는 스트리밍 시대의 풍요 속 빈곤, 소비만큼 소장을 추구하는 인간 본능, LP를 턴테이블에 걸 때 참여감이 가져다주는 모종의 감격, 스트리밍 서비스와 계약에 시큰둥한 톰 요크, 테일러 스위프트가 인정한 LP의 비싸고 배타적인 진품으로서 가치. 이것이 디지털 시대에 LP가 다시 팔리고 있는 대표적인 이유, 근거들이다. 확실히 ‘바늘의 처분’을 기다리는 LP 감상 과정은 음악의 캠프파이어로서 경험의 극치라 할 수 있고, 무언가를 손에 들면 완결된 느낌을 받는다는 한 미국 초등학생의 페이퍼 찬양은 그 극치의 경험을 납득케 하는 강력한 증언이다.

하지만 음악은 인간과 다르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다. 음악은 먹거나 입을 수 없고 사람이 음악 안에서 살 수도 없다. 음악은 귀라는 신체 일부를 통해 듣는 이의 감성을 흔들거나 감정을 건드릴 순 있어도 그 자체 물질이 될 순 없다. 음악으로 빚어진 세상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음악은 있을 수 없는 있음이다. 어떤 면에서 음악은 유령과 같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에게 음악은 그것을 LP로 듣건 CD로 듣건 파일 또는 스트리밍으로 감상하건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안에서 음악은 똑같이 보이지 않지만 들리는 결과물은 같은 음악이다. 가령 LP로 듣는 라나 델 레이의 신작과 MP3로 듣는 그녀의 신작에는 동일한 음악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LP에 집착하는 이유는 재생 행위에 담긴 추상적인 낭만과 만지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성, 그리고 전문가들이 ‘가장 균형 있다’고 말하는 소리의 질감 때문이지 음악이 달라서가 아니다. LP는 육체적인 인간에게 물질적 만족을 주지만 파일과 스트리밍은 편리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정신적 휴식을 준다. 둘은 어느 한 쪽의 부재를 누릴 수 없다. 인간이라면 보통 소유와 편의, 둘 다를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LP 붐은 세계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지난 7년간 600% 이상 성장한 LP 시장은 부정할 수 없는 지구의 현실이고 국내 한 쇼핑몰이 올해 초 3개월 동안 지난해 주문량의 12배에 이르는 턴테이블을 팔아치운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2007년 이후 극적으로 성장한 LP 산업도 그래봐야 전체 음악 산업에서 10퍼센트 미만에 지나지 않는다. (LP의)부활과 (아날로그의)반격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아직은 마니아들의 바람에 더 가까운 현실인 것이다. 침소봉대는 경계되어야 한다.

결국 아날로그의 반격은 정말이지 디지털 기술이 기가 막히게 좋아져 일어난 역설일지 모른다. 어쩌면 지난 수 년간 목격된 LP(를 비롯한 아날로그)의 의미있는 역공은, 사라지진 않았어도 더 이상 대세도 아닌 종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운명이지 않을까. 때문에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아마도 당분간 공정한 대립, 대립하는 공생 관계로 함께 나아갈 것이다. 저자 데이비드 색스 역시 디지털 기술에 반대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님을 서문에서 분명히 밝혔듯 임박해보였던 아날로그의 장례식을 유보시킨 사실 하나만으로도 LP 부활의 가치는 충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인을 위한 가장 사적이고 전문적인 주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