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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ug 28. 2017

음악을 향한, 음악을 위한 필승!

서태지 25주년


서태지. 그를 써야 하는 마당에 정작 그를 표현할 말이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문화 대통령, 천재 따위 수식어는 지루하고 성인가요와 발라드가 주류였던 가요계를 랩 댄스로 재편한 90년대 영웅이라는 찬사는 이젠 그다지 소용없어 보인다. 매번 특정 장르를 소개하고 인용한다는 뜻에서 ‘장르 소매상’이라는 말도 그저 말장난이다. 손석희 표현대로 서태지는 정말 그 이름 석 자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서태지와 아이들 합류 제안을 받았던 이주노는 ‘난 알아요’를 처음 듣고 반향 아니면 무시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결과는 반향 쪽으로 기울었고 서태지는 한나절 만에 앨범 30만장을 팔아낼 수 있는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심지어 1996년 <전환시대의 논리>로 유명한 고 리영희 선생에 이어 ‘청소년 문화의 새 지평을 연 X세대 우상’이라는 이유로 <경향신문>이 발표한 ‘광복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리스트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90년대 초중반 그와 아이들은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다. 대한민국의 사회와 문화에 그토록 깊고 진한 흔적을 남긴 존재는 그때까지도 여태까지도 없었다. 90년대. 그 시절, 나 또한 피 끓는 청소년이었다. 그의 데뷔부터 은퇴까지를 오롯이 실시간으로 보며 나 역시 그 노래 그 춤을 따라 부르고 추었다. ‘하여가 200만장’이라며 내 일처럼 기뻐했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이 글이 더 부담스럽고 막막하다. 많이 안다고 여긴 것이 더 많은 것을 가리는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그럼에도 나는 써야 한다. 서태지와 함께 25살을 더 먹은 지금 내가 그의 데뷔 25주년을 축하해줄 수 있는 길은 이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72년 2월2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어머니 강명숙, 아버지 정상규씨 사이 1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난 서태지(본명:정현철)는 중학교 2학년 때 5인조 스쿨밴드 하늘벽을 결성하며 음악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조용필과 들국화를 좋아했던 정현철은 그 어린 나이에 작사, 작곡, 편곡, 베이스, 보컬을 전담하며 일찌감치 밴드 리더로서 자질을 증명했다. 서태지는 바로 이 시절이 이후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등학교 진학 후 음악을 자신의 인생 목표로 삼은 서태지는 음악을 하는 데 있어 학교 교육이란 전혀 불필요하게 느껴 서울북공고(현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를 스스로 박차고 나왔다. 이때 그의 나이 17세. 자퇴 후 활화산이라는 록밴드를 거쳐 이중산의 소개로 당시 신중현이 운영하던 클럽 우드스탁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렸지만 시나위 2집을 통째로 연주할 줄 알았던 이 핏덩어리 베이시스트를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픽업, 서태지는 시나위 정식 멤버로서 4집에 참여하게 된다. 돈도 필요없고 함께 연주만 할 수 있어도 좋았다는 그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을 터. 치렁치렁 긴 머리의 멤버들 모습부터 들리는 음악까지 철저한 헤비메탈이었던 시나위 4집에서 서태지는 베이스는 물론 드럼 편곡까지 담당했다. 과학경시대회에서 상까지 탔던 어릴적 손재주가 조금이나마 발휘된 순간이다.


서태지를 세상에 알린 <특종! TV연예>. 그들은 '신곡무대'라는 코너에서 역대 최하 점수인 7.8점을 받았다.


하지만 서태지와 김종서가 함께 몸담았던 시나위는 오래 가지 못했다. 공연 사기를 당한 것이다. 어린 서태지는 공연 당일까지 무대가 완성되지 않아 우왕좌왕 했던 그 상황을 겪으며 아마도 헤비메탈 밴드 베이시스트로서 불안한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실제 그는 록커이면서 팝, 블랙뮤직에도 귀를 열어두고 있던 터라 신대철과 음악 견해차 때문에라도 서태지는 시나위에 오래 머무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부활과 더불어 80년대를 평정한 국내 대표 헤비메탈 밴드의 전성기는 김종서와 서태지가 나가면서 조용히 막을 내렸다.


시나위를 탈퇴한 서태지는 무궁화밴드라는 팀에 잠시 몸담은 뒤 정통 헤비메탈이 아닌 록과 랩, 팝을 접목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매니저였던 최진열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서태지는 어머니가 방에 넣어주는 밥만 먹으며 6개월 동안 랩 연습과 컴퓨터 음악 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박남정과 프렌즈 출신의 두 댄서 양현석과 이주노를 만난 것은 그 얼마 후의 일이다.


곡과 안무를 모두 준비하고 대중의 심판을 받기 위해 서태지와 아이들이 출격한 곳은 임백천이 사회를 맡은 MBC <특종! TV연예>(92년 4월11일)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 주에 발매된 신인 가수 음반들을 소개한 뒤 그 중 한 곡의 주인공을 직접 스튜디오로 불러 들어보고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는 ‘신곡무대’ 코너에 출연했다. 이들은 헤비메탈 기타 리프가 삽입된 랩댄스 곡 ‘난 알아요’를 선보였지만 심사단의 평은 냉랭했다.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을 쓴 작곡가 하광훈은 “신경을 안 쓴 것 같은” 멜로디 라인을 지적했고 김국환이 부른 ‘타타타’의 양인자는 진부한 가사를, 연예평론가 이상벽은 노래를 묻어버린 과격한 댄스를 불편해했다. 그나마 서태지의 출신(시나위)을 아는 선배 뮤지션 전영록만이 평가 자체를 대중에게 돌리며 응원해주었다. 평점은 10점 만점에 7.8점. 이 코너 역대 최하 점수였다. 듀스(Deux)와 함께 한국어 랩의 보편화에 불을 지핀 이 희대의 곡은 처음엔 적잖이 홀대를 당했다.


'하여가'가 수록된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은 당시에만 2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가요계를 초토화 시켰다.


물론 이 방송이 나간 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물구나무 섰는지는 여러분이 직접 보았거나 들은 그대로이다. ‘난 알아요’ 단 한 곡으로 스무살 청년 서태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인기와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당대 슈퍼스타 자리에 올라섰다. 참고로 세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출연한 첫 방송이라고 잘못 알려진 <특종! TV연예> 에피소드는 데뷔 이후 한 달 여가 지난 때로, 실제 그들의 첫 무대는 같은 해 3월14일 방영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 뒤 석 달 여 사이 명동에 옷 구경하러 갔다가 인파에 둘러싸여 교통이 마비될 정도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햇수로 1년이 지나고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이 세상에 나온다. 이미 단 한 장 앨범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터라 이들을 향한 세상의 관심은 그 무엇보다 뜨거웠다. 1년 전 자신들을 알려준 프로(<특종! TV연예>)를 통해 ‘하여가’ 뮤직비디오가 처음으로 공개됐고 이것은 당시 10대 팬들로부터 ‘난 알아요’를 넘어서는 폭풍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스래쉬메탈과 랩, 국악과 춤이 한데 어우러지며 ‘하여가’는 그야말로 현상이 되었는데 한 가지 흠이었다면 테스타먼트(Testament)의 기타 솔로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쓴 이태섭의 기타 솔로였다. 이는 빼도박도 못할 명백한 카피여서 지적 후 서태지 자신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Seotaiji and Boys II]는 의미있는 앨범이었다. 여기에는 ‘하여가’ 외에도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을 좋아하는 서태지가 [Dangerous] 비트를 흉내 낸 ‘죽음의 늪’, 흉내가 아닌 동시대적 레이브(평론가 이대화의 표현)였던 ‘수시아’, 스윙하는 서태지 ‘마지막 축제’ 등이 있었다. 당시 서태지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


'교실이데아'는 서태지 자신이 온몸으로 느낀 대한민국 교육 현실의 참담함을 정면에서 바라본 곡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세 번째 앨범은 헤비 일렉트릭 기타 리프로 도배한 ‘Yo! Taiji’로 문을 열며 이 앨범이 ‘록커 서태지’의 것이 되리라는 걸 암시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통일의 바람과 제도권 교육에의 일침이 뒤섞여 있었다. 팀 피어스(Tim Pierce/기타)와 조쉬 프리즈(Josh Freese/드럼)라는 일류 세션 뮤지션들 이름이 크레딧에 있었고, 당시 잘 나가던 디제이 큐버트(DJ QBert)와 크래쉬(Crash)의 안흥찬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장르에서라기보다 서태지 스스로 음악적 대안이라 생각한 측면에서 이 앨범 속 음악은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이라 공식 진단되었다. 랩메탈이라고는 하지만 ‘교실이데아’는 70년대 훵크와 하드록에 빚진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보단 나중에 ‘울트라맨이야’에서 시연될 콘(Korn)의 그루브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거기엔 세상을 뒤흔들겠다는 의도가 아닌 중학교 3학년 때를 정점으로 서태지 자신이 온몸으로 느낀 ‘엉망진창’ 한국 교육제도를 향한 일갈이 담겨 있었다. 팀 피어스의 멋진 기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발해를 꿈꾸며’를 포함, 뚜렷한 정치사회적 주제 때문에 정작 ‘내 맘이야’의 드라이브감이나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치열한 구성, ‘영원(永遠)’에서 클래식 시도가 묻힌 감이 없진 않지만 이때 사회 참여적인 모습은 서태지 자신이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고 말한 4집 활동기까지 쭉 이어졌다.


그리고 95년 10월5일. 서태지와 아이들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이 나온다.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를 참고한 것이 분명한 ‘슬픈 아픔’, 비스티 보이스(Beastie Boys)의 랩 스타일과 플로우를 참고했으되 록 기타를 타고 전혀 다른 세상을 펼친 ‘필승(必勝)’, 역시 사이프레스 힐(Cypress Hill)의 그림자가 분명하지만 주제와 비트에 반론이 들어있는 ‘Come Back Home’,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사전심의제를 물먹인 ‘시대유감(時代遺憾)’이 대표한 이 작품을 끝으로 서태지는 ‘아이들’과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신대철이 이후 ‘은퇴선언’이라는 곡으로 비꼰 바로 그 사건이 이듬해 1월31일 방송을 탔고 팬들은 큰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른 듯 느꼈던 24살 당시 상황에 대한 지금 서태지의 변을 들어보면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랬던 것 같다고 한다. 충분히 견딜 수 있었고 헤쳐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지혜가 부족했다는 뜻이리라. 80년 6월, 젊은 시절 고민과 번민으로 조국을 떠난 안건마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까. 서태지와 양현석, 이주노는 미국으로 가는 경유지인 괌에서 인사를 나누고 끝내 각자 길을 떠난다.


'필승'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댄스그룹에서 록밴드로 변신한다. 물론 이주노(베이스)와 양현석(드럼)의 퍼포먼스는 말 그대로 퍼포먼스였을 뿐이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하고 서태지가 미국으로 떠난 그해 말 별안간 특종 기사가 터진다. 당연히 서태지 측은 낭설이라며 강경 대응했지만 이후 진실로 밝혀진 해당 특종은 오보라는 누명을 쓴 채 그대로 묻혀버렸다. 하지만 97년 10월, 서태지는 이지아와 미국에서 혼인 신고를 실제로 했다. 진짜 결혼을 한 것이다. 이를 서태지는 10 여 년을 넘게 계속 부인해오다 2013년 재혼 발표 후 한 예능 프로에 출연해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상처 받은 이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사생활이기 때문에 감춰온 일이 죄는 아니겠으나 거물급 스타로서 팬들을 기만한 일은 분명 도의적으로 비난받을 여지가 있었다. 그래도 그처럼 자신의 개인사를 물고 늘어지는 언론이 서태지는 더 싫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결혼 생활과 별거 생활이 공존했던 98~2000년 사이 서태지는 은퇴를 번복하고 솔로 앨범 두 장을 내놓았다. 5집 [Seo Tai Ji]는 거의 외부와 접촉을 차단한 채 음악으로만 자신의 복귀를 알린 작품이고 6집 [울트라맨이야]는 콘과 림프 비즈킷(Limp Bizkit)이 유행시킨 뉴 메탈, 얼터너티브 메탈 사운드를 전면에 도입한 앨범이었다. 근래 윤하가 리메이크 한 ‘Take Five’가 있는 5집은 희망을 위한 절망, 긍정을 위한 부정이라는 서태지의 음악 철학이 반영된 가장 서태지다운 앨범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벗어난 그가 앞으로 어떤 음악을 펼쳐나갈 지에 대한 강력한 실마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자신이 힘들었던 때 만든 음악이어서인지 이후 라이브에서 서태지는 ‘Take Five’ 외 다른 ‘Take’ 곡들은 드물게 들려주었다.


'Take Five'는 서태지 솔로 1집, 통산 5집의 대표곡을 넘어 이후 라이브에서도 주요 레파토리가 된다.


‘울트라맨이야’와 ‘대경성 (Feel the Soul)’, ‘탱크’와 ‘인터넷 전쟁’이 대표하는 6집은 서태지를 다시 한 번 표절 도마에 오르게 했다. 콘과 림프 비즈킷의 판박이라는 얘기다. 곡에 따라 툴(Tool)과 콜 챔버(Coal Chamber)도 거론되었다. 물론 표절 논란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서태지를 둘러싼 카피와 표절 소동은 1집 때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부터 ‘소격동’의 처치스(Chvrches)까지 그의 작품들 마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당연하다. 그는 항상 특정 시기의 특정 장르에 영감을 받아 그 장르를 소화시키는 식으로 자신의 창작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의심과 비판은 그의 음악이 감내해야 할 숙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표절은 남이 만든 작품의 부분 또는 대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것처럼 속이는 것인데 반해, 서태지는 다른 뮤지션의 분위기와 스타일만 빌려와 재조합해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림프 비즈킷의 프레드 더스트는 ‘울트라맨이야’를 듣고 표절은 커녕 되레 서태지의 보컬을 칭찬했고, 사이프레스 힐도 “음악을 제대로 들어보긴 한 거냐”며 표절 여부를 물어온 측을 민망하게 했다.


서태지의 음악을 표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심증만 가졌지 물증은 없다. 뭔가 비슷하긴 한데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비슷한지를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못한다. 좋게 말하면 서태지가 영리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의 작법이 교묘한 것이겠다. 분명하지 못한 건 서태지 쪽도 마찬가지다. 잊을 만 하면 불거지는 논란의 여지를 왜 그는 계속 방치하는 것일까. 지난 번 기자회견에서 표절 의혹에 대해 “해명이 불필요”하다고 한 건 말 그대로 불필요한 해명이었다. 그는 적극 해명해야 한다. 본인 말대로 그것이 하루종일 강연하는 일이 되더라도 이 일은 그냥 덮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다. 음악을 듣고 판단하라니. 그 판단이 계속 표절을 의심케 하지 않나. 대중은 전문가가 아니다. 그것은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해명해야 할 일이다. 림프 비즈킷과 사이프레스 힐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곡을 해당 뮤지션들에게 직접 들려주고 표절이 아니라는 답을 받아내든지, ‘Girl You Know It's True’를 쓴 작곡자들이 표절이라고 할 땐 재반박 하거나 그것을 감내하면 그만이다. 프로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무엇이 무서운가.


'Come Back Home'은 사이프레스 힐의 'Insane in the Brain'과 비교되며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에는 문방구에서 인형을 훔치곤 했던 서태지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


다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서태지는 없던 장르를 개척하는 뮤지션이 아니라 있던 장르들을 요리해 그 안에 자신의 생각과 감성을 녹이는 뮤지션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어딘가에서 들어봤을 확률이 높고 거의 표절에 가깝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서태지의 음악을 서태지의 문화사적 가치만큼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서태지의 음악을 들을 때 내 느낌은 과거 ‘Come Back Home’ 표절 시비에 직접 대응하며 예로 든 판테라(Pantera)와 테스타먼트(Testament)를 데스 메탈(Death Metal) 밴드라고 말하는 것을 지켜본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 역시 전문 뮤지션이기 전에 아마추어 리스너이다. 서태지는 장르를 묻지 않고 그저 자신이 좋아했던 음악들을 기반으로 자신과 대중이 함께 만족할 만한 음악들을 만들어왔다. 세상은 그걸 가리켜 레퍼런스 또는 영향(Influence)이라고 말한다. 서태지가 미국에 머물 때 콘과 림프 비즈킷의 공연을 즐겨보며 그들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보스톤(Boston)의 ‘More Than A Feeling’ 기타 리프를 듣고 ‘Smells Like Teen Spirit’을 썼다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얘기다. 서태지의 음악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팬들이 금과옥조 마냥 여겨온 ‘난 알아요’를 미국 현지인들은 그저 흔하디 흔한 ‘삼류 미국 음악’ 쯤으로 이해한다는 한 재미 강사의 증언을 기억한다. 약관의 서태지는 다른 음악들을 적극 참고한 것이지, 그것들을 그대로 베낀 것은 아니다.


그렇게 또 한 번 표절 후폭풍이 있고 4년 후 서태지의 일곱 번째 작품이 나왔다. [Issue]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태지의 앨범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멜로디에 6집에서 물이 오른 헤비니스가 듬뿍 녹아있다. 드러머 헤프 홀터(Heff Holter)의 쫄깃하고 현란한 플레이, 용호상박 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비트의 교차, 무엇보다 ‘Live Wire’와 ‘로보트’, 그리고 ‘0(Zero)’ 같은 좋은 곡들이 있다.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음향 엔지니어로서 서태지의 그릇이 더욱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바로 이 7집을 통해서였다. [Issue]는 그때까지 서태지 음악을 집대성 해놓은 13년 전 명반이었다.


'Live Wire'는 뮤직비디오도 좋다.


서태지 스스로 ‘네이처 파운드’라는 장르로 자평한 [Atomos]는 그 장르명처럼 가장 자연에 가까운 소리와 연주를 지향한 앨범이다. 스네어 리듬을 잘게 쪼개는 고스트(Ghost Note)의 명수 혜승(Pia)이 스튜디오 드럼에 앉았고 바세린(Vassline) 출신 최현진이 피아 활동으로 혜승이 빠져나간 서태지 밴드 자리에 정식 드러머로 눌러앉게 된다. 피아만 아니었다면 혜승이 훨씬 어울릴 자리였는데 조금 아쉬웠던 기억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렇게 [Atomos]는 [Issue]와 함께 표절 시비를 비껴간 서태지의 몇 안 되는 앨범으로 남았다. 송라이팅과 프로덕션 수준이 보기좋은 균형을 이룬 8집을 뒤로 하고 서태지는 이제 40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데뷔 15주년은 진작에 넘겼고 20주년, 25주년을 준비해야 할 불혹의 나이대를 코앞에 둔 것이다. 2011년, 이지아와 법적으로 완전히 갈라서고 서태지는 다시 새로운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다. 상대는 8집 수록곡 ‘Bermuda (Triangle)’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이은성. 대중에겐 드라마 <반올림>과 영화 <국가대표>로 낯이 익었을 배우다. 2008년 한 인터뷰에서 “있어도 밝힐 수 없다”고 서태지가 말한 사람이 이은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다던 서태지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혜승의 리듬 쪼개기 진수를 맛볼 수 있는 'Moai'


'소격동'에는 서태지보다 아이유가 더 어울렸다는 게 중론이다.


서태지와 이은성. 둘 사이에는 딸이 한 명 있으니 태명은 삑뽁이, 이름은 정*담이다. 2014년 가을에 발표한 9집 [Quiet Night]는 바로 그 딸을 위한 앨범으로, 재킷부터 자신의 딸이 6~7세가 된 모습을 상상해 담은 것이다. 록이라는 기본 골격에 일렉트로닉과 신스팝 소스를 많이 뿌린 이 앨범으로 서태지는 오랜 시간 잊고 살았던 자아 찾기의 첫 발을 내디뎠다. 1992년에서 2017년까지 25년간 서태지는 참 많은 가십을 겪었고 또 거기에 맞서 왔다. 그동안 만든 곡들은 또 얼만큼이던가. 안티와 팬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기에 어쩌면 서태지에게 영원한 자기 편, 진짜 가족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족과 한국에 정착한 만큼 이제 더 이상 칩거도 은둔도 없을 것이라 믿는다. 중요한 건 음악이므로 이대로 25년 더 발전한 음악 계속 들려줬으면 좋겠다. 그토록 해보고 싶다는 재즈도 포함해서 말이다.



서태지 디스코그래피


서태지와 아이들 (1992)

‘난 알아요’는 서태지 말에 따르면 의도하지도, 준비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괴물 같은 곡이었다. 이 한 곡이 92년 이후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 새긴 의미는 크고 깊다. 때로는 숭배의 대상으로 한편으론 논란 거리로. 제작자 유대영은 표기상 ‘Producer’였지만 사실상 그룹 영입과 제작에만 관여했을 뿐, 음악적 프로듀싱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 작사(양현석이 쓴 ‘이 밤이 깊어가지만’ 제외), 작곡, 컴퓨터 프로그래밍, 편곡과 일부 기타 연주 모두 서태지가 한 것이다. 장혜진과 김종서가 코러스에 참여했고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의 색소폰은 이정식 솜씨다. ‘난 알아요’ 외 테크노 트랙 ‘환상 속의 그대’와 글쓴이의 애청곡 ‘내 모든 것’이 따로 히트했다. ‘내 모든 것’에서 기타는 손무현이 쳤고 AC/DC의 ‘Back in Black’을 샘플링 한 ‘Rock N’ Roll Dance’에서 기타는 신대철의 연주다. ‘난 알아요’는 당시 방송 3사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 1위 자리를 싹쓸이 하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서태지는 이 앨범 한 장으로 국내 음악계를 넘어 문화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된다.


Seotaiji And Boys II (1993)

제작(Executive Producer)이 유대영에서 서태지 자신으로, 레코딩 스튜디오가 테크노 태지 스튜디오(Techno Taiji Studio)로 바뀐 것이 일단 눈에 띈다. 기획사와 아티스트 사이 불공평 계약 관행이라는 쓴맛을 본 서태지. 이 앨범부터 서태지는 음악 외 매니지먼트 수완까지 발휘하며 서태지와 아이들에 관련된 모든 상황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한다. ‘난 알아요’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하여가’를 비롯 나중에 런 디엠씨(Run-D.M.C.)의 ‘King of Rock’과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우리들만의 추억’, 청소년 약물 문제를 다룬 ‘죽음의 늪’, 전작의 ‘이제는’을 잇는 감성 발라드 ‘너에게’, 시대를 반영한 일렉트로닉 넘버 ‘수시아’, 서태지 스스로 앨범에서 가장 ‘서태지적’이었다고 말한 ‘마지막 축제’까지 모든 곡이 팬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덕수의 태평소와 ‘너에게’에서 이정식의 색소폰, ‘하여가’에서 이태섭의 기타 솔로 정도를 뺀 모든 악기를 서태지가 직접 다루었다. 작사, 작곡과 어레인지는 물론이다. 바야흐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성기였다.


Seotaiji And Boys III (1994) 사진출처:매니아디비

예약만 100만장이었다. 음악평론가 강헌의 말처럼 서태지는 이제 “조용필 같은 스타가 됐는데, 옛날 김민기, 노찾사(노래를찾는사람들)나 할 것 같은 비주류의 의제”를 끌고 와 음악에 담았다. 바로 ‘발해를 꿈꾸며’와 ‘교실이데아’다. 두 곡의 파장은 컸다. 도발적이고 직설적인 가사에 정치권은 불편해했고 교육계도 난색을 표했다. 서태지는 자신의 위치가 정치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을 것이다. 이 앨범은 메탈리카(Metallica)를 흠모하는 록커 서태지가 록을 탐닉한 앨범이다. ‘아이들의 눈으로’와 ‘영원’은 쉼터일 뿐이다. 팀 피어스, 조쉬 프리즈라는 이름은 보다 완벽한 연주와 소리를 바란 프로듀서 서태지의 욕심을 보여주었고, 디제이 큐버트는 힙합을 향한 서태지의 갈망을 반영한 이름이었다. ‘내 맘이야’라는 곡 제목은 이 앨범의 주제이기도 했다. 그는 고 신해철이 솔로 활동으로 일군 지명도를 바탕으로 넥스트(N.EX.T)에서 했던 것처럼 지난 두 장 앨범으로 일군 인지도를 등에 업고 자신이 하고 싶던 음악을 마음껏 펼쳐보였다. 춤에서 헤드뱅잉으로 서태지가 조금씩 방향을 틀면서 랩댄스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정체성도 조금씩 희미해져갔다. 한편, 서태지가 직접 기타를 친 ‘교실이데아’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탄 숭배’ 촌극은 비틀즈(The Beatles) 때도 있었던 백워드매스킹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Seotaiji & Boys IV (1995)

‘필승’ 같은 곡에서 들려준 소리 디자인은 음향 엔지니어로서 서태지의 욕심처럼 보였다. 공윤이 가사에 딴지를 건 ‘시대유감’에서 가사를 통째로 날리며 사전심의제도를 박살낸 서태지는 본인도 모르게 제2의 정태춘이 된다.(‘시대유감’은 96년 가사가 들어간 싱글로 따로 발매되어 80만장이 팔렸다.) 하지만 ‘Come Back Home’이 사이프레스 힐의 ‘Insane in the Brain’과 비교되며 서태지는 또 한 번 표절 시비와 맞닥뜨렸다. 비-리얼(B-Real)과 서태지의 랩 톤이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이는 서태지도 인정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인정할 수 없었고 급기야 사이프레스 힐 측으로 ‘Come Back Home’ 음원을 직접 보내 표절이 아니라는 답을 받아내며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이후 비스티 보이스와 비교되며 또 한 번 표절 의혹을 받게 되는 ‘필승’은 이 앨범의 대표곡이었다. 서태지의 뇌리에 담긴 다양한 음악 소스를 끄집어 내보인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김종서와 함께 부른 ‘Free Style’도 조용히 인기를 얻었다. 이듬해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은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우리(서태지와 아이들)가 시도할 수 있는 건 다 보여주었다는 그때 은퇴 변은 그러나 내(서태지)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아직 남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Seo Tai ji (1998)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을 등진 가장 큰 이유는 1년 미만 시간에 정규 앨범 한 장을 계속 내놓아야 하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었다. 과거 찍었던 CF 제품 이름처럼 그에겐 ‘자유시간’이 필요했다. 세상과 단절한 2년 여 뒤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나타난 서태지. 물론 나타난 건 사람이 아니라 음악과 음반 뿐이었다. 그는 보컬, 기타, 베이스, 키보드, 샘플, 스크레치까지 모두 혼자 해내며 진정한 원맨밴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신랄한 가사와 게으른 비트가 어울린 ‘Take Two’, 과거 ‘Yo! Taiji’에 해당할 리프 소품 ‘Radio’, 6집을 예고하는 뉴메탈 트랙 ‘Take Three’, 건조한 기타 톤과 투박한 드럼 톤이 돋보이는 ‘Take Four’, 그리고 이 앨범을 대표하는 ‘Take Five’(이 곡의 메인 기타 리프는 스매싱 펌킨스의 'Today' 것과 비슷하다는 의심을 샀다) ‘Take Six’까지. 자유와 고독이 어떤 식으로 조화할 수 있는지를 서태지는 이 한 장으로 들려주었다.


울트라맨이야 (2000)



기타 톤만 잡는데 두 달. 사람이 연주한 듯 들리는 드럼 편곡은 프로그래밍을 거친 것이다. 타이틀 ‘울트라맨이야’는 원래 ‘울트라매니아’로 하나에 미친 사람들, 이른바 ‘덕후’를 칭하는 마니아들을 뜻했다. 서태지는 어감에서 울트라맨이 떠올랐던 것이고 문방구에서 인형을 자주 훔쳤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은 뮤직비디오에까지 일본의 그 유명 캐릭터를 반영하였다. 인디 신에 있던 몽키(베이스)와 락(기타), 9집까지 서태지와 관계를 이어가는 TOP(리드기타/백킹보컬), 그리고 조쉬 프리즈가 소개해준 드러머 헤프 홀터가 서태지 밴드의 라인업을 꾸몄다. “나는 해외 뮤지션(림프 비즈킷이나 콘 등)에 비하면 발톱의 때도 안 된다”는 당시 서태지의 자학은 이 앨범이 저들 음악과 비슷하다는 의혹을 짐작한 데서 나온 자백 비슷한 것이었다. 서태지 앨범들 중 가장 인상적이고 일관된 그루브, 에너지가 이 작품에는 있다. 특히 ‘인터넷 전쟁’의 가사는 역대 서태지 가사들 중 손에 꼽을 만한 것이었다. 추상적이고 불교적인 재킷 아트 디렉터는 다름 아닌 전상일. 과거 넥스트의 앨범 재킷들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아마도 6촌 형이었던 고 신해철과 관계에서 비롯된 섭외였지 않나 싶다. [울트라맨이야]는 3년 뒤 다시 녹음되어 [Seo Taiji 6Th Album Re-Recording & Etpfest Live]라는 더블 앨범으로 재발매된다. 완벽주의자 서태지다운 행보였다.


Issue (2004)

헤프 홀터의 맛깔 나는 드러밍과 서태지의 멜로디 감성이 제대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이때까지 가장 길었던 4년 공백은 왕성한 국내 활동으로 상쇄되었고 머틀리 크루(Motley Crue)의 호쾌한 맛에 드럼 앤 베이스 가루를 뿌린 ‘Live Wire’는 이후 서태지 라이브에서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붙박이 곡이 된다. 스토커의 심리를 음악으로 푼 ‘Heffy End’와 낙태와 여성인권을 논한 ‘Victim’의 들썩거림, 자라서 로보트가 될 아들의 운명 앞에 무너지는 엄마의 마음 ‘로보트’, 어쿠스틱 기타로 추억하는 지난 사랑 ‘10월4일’, 서태지 자신에겐 애증의 현실일 음악 비즈니스계를 비판한 ‘F.M Business’, 마이클 잭슨처럼 피터팬이 되고 싶었던 서태지의 바람 ‘0 (Zero)’. 모 평론가의 말처럼 이 작품 속엔 그 어떤 계산도 강박도 인공도 없었다. 다만 살려고 몸부림 치는 한 뮤지션의 절박한 음악적 고민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서태지가 대답을 심어두었다. “정말 모르니, 차라리 꺼져버리라고 말해줘 나에게.” ‘Heffy End’의 가사다.

Atomos (2009)

서태지 밴드의 멤버가 바뀌었다. 디아블로 출신 베이시스트 강준형이 몽키의 자리를 대신했고 기타 자리는 TOP이 홀로 맡게 되었다. 대신 각종 건반과 미디 조작에 능한 김석중이 들어와 사운드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드러머는 건강상 이유로 탈퇴한 헤프 홀터 자리에 최현진이 들어왔다. 단, 녹음은 피아의 양혜승이 했다. 양혜승은 ‘Moai’에서 현란한 드럼 앤 베이스 비트를 어쿠스틱 드럼으로 재연하며 대단한 리듬 쪼개기 능력을 보여주었다. 앨범에서 가장 시원한 사운드를 담은 ‘Bermuda (Triangle)’에서 드러밍도 혜승의 존재감을 묻어낸다. 사운드는 7집에 비해 다소 호리호리해졌다. 하지만 ‘Human Dream’ 뮤직비디오를 통해 서태지가 ‘쫄핑크뿌찢춤’까지 추며 지난날을 돌이켜보려 했음에도 이 앨범은 평단에게도 대중에게도 그리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다. 6, 7집에 비해 임팩트가 약했던 음악과 세월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앞서 발매한 두 싱글 수록곡들이 이 앨범의 2/3 이상이었다는 사실도 그 결과에 일조했을 것이다.


Quiet Night (2014)

9집에선 멤버 한 명이 더 바뀌는데 버클리 음대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닥스킴(Docskim)이다. 물론 앨범에서 키보드는 서태지가 모두 치고 닥스킴은 피아노만 서태지와 나누어 연주했다. 살벌한 정치 전장이었고 서태지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동네를 소재로 한 ‘소격동’을 첫 싱글로 내세웠다. 이 곡은 두 편의 뮤직비디오로 연출되었는데 하나는 서태지 자신이 부른 것, 다른 하나는 아이유가 부른 버전이었다. 서태지는 아이유의 목소리를 일컬어 “보물 같은 보이스 컬러”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소격동’마저 처치스라는 스코틀랜드 신스팝 밴드와 유사성을 이유로 표절 시비에 휘말리며 서태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홉 번째 나의 동화’라고 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special thanks to)에서도 표현했듯 앨범은 마치 팀 버튼(Tim Burton) 풍 잔혹동화 느낌을 갖게 한다. ‘Christmalo.win’이나 ‘Prison Break’에선 서태지만의 냉소가, ‘90s ICON’과 ‘잃어버린’, ‘비록(悲錄)’에는 불혹에 접어든 서태지의 자조와 반성이 드리워져 있다. 요컨대 본작은 신스팝을 뼈대 삼아 8집의 일렉트로닉, 리듬 분해를 여전히 추구하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물론 이것을 ‘서태지 사운드’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늘 그래왔듯 10집에서 그가 또 어떤 음악 카드를 빼들지는 서태지 본인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그루버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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