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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ug 16. 2017

다프트 펑크에게 전한 대답

Arcade Fire [Everything Now]


아케이드 파이어의 데뷔작 ‘Funeral’은 피치포크(Pitchfork)가 라디오헤드의 ‘Kid A’에 이어 두 번째 최고라 공언한 2000년대 대표 명반이었다. 그것은 연인 사이인 윈 버틀러와 레진 샤사뉴가 각각 떠나보낸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한 필사의 장송곡이었고 뉴메탈과 이모(Emo)가 휩쓴 2000년대 록 신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그러면서도 낯선 제안이었다. 장르에 장르를 덧대고 장르로 장르를 대체한 이 중요한 자취는 바로크 팝과 아방가르드의 뒷덜미를 낚아챈 반동적 아트록이었다.


데뷔가 너무 화려해 자칫 앞길이 순탄치 않을 법도 했다. 소포모어 징크스니 뭐니 하며 쉬 가라앉을 수도 있었을 밴드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그러나 기우였다. 밥 딜런과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미국적 모티프를 깔고 간 두 번째 작품 ‘Neon Bible’로 이들은 더 유명해졌고 혹자가 “아케이드 파이어의 ‘OK Computer’”라고 말한 3집 ‘The Suburbs’는 그 어렵다는 영국과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까지 찍고 만다. 이는 인디 밴드라는 정체성의 한계를 부수고 순수 음악과 실력만으로 일궈낸 기록적인 쾌거였다.


이들 음악은 과거를 탐닉하면서도 늘 현재를 품었다. 그렇다고 마냥 지금에 머무는 것도 아닌, 그들은 언제나 더 멀리에 있는 자신들의 음악을 동경했다. ‘porno’가 수록된 전작 ‘Reflektor’에 이어 신작 ‘Everything Now’ 역시 그런 밴드의 성향이 짙게 반영된 작품이다. 한마디로 이번 음악은 심각한 예술을 빗금 치고 그냥 예술을 즐기겠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장르는 변명일 따름에 음악 자체가 명분인 듯한 이 정서는 결국 음악을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들을 더 생각하겠다는 밴드의 의지로 읽힌다. 예전 같았으면 아날로그 챔버팝 쪽으로 비틀었을 ‘peter pan’과 ‘chemistry’ 같은 곡에 밑밥으로 넣어둔 디지털 레게 비트는 그 좋은 예로, 보스턴 글로브(The Boston Globe)는 그러나 이 두 곡을 아케이드 파이어 역대 최악의 곡이라고 깔아뭉개버렸다. 그 정도는 아닌데, 좀 심한 처사다.


더불어 타이틀 트랙 ‘everything now’의 일렉트로닉, 댄서블 성향 역시 다프트 펑크와 펄프 멤버가 참여했다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인디라는 무거운 갑옷을 완전히 벗어던지겠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아니, ‘creature comfort’는 정말 다프트 펑크와 펄프가 만난 음악이다. 16비트 디스코 리듬에 70년대 팝 코러스, 현악과 키보드의 아우성을 담은 ‘signs of life’도 그렇고 아케이드 파이어의 신보는 레트로가 유행하는 현 시대를 사운드로 진단한다. ‘infinite_content’의 낭만과 ‘put your money on me’의 멜로디까지. 발표한 앨범 다섯 장 모두를 범작 이상으로 잉태해낸 이들 음악은 더이상 마니악 하지 않다. 이제는 온전히 대중에게 안길 준비가 된, 충분히 쉽고 즐거운 음악이다. 팬이자 관찰자로서 나는 이를 적극 환영한다.


어쩌면 아케이드 파이어 같은 밴드에게 장르의 조합과 해체는 정체성 확립의 다른 말일지 모른다. 그들은 장르에게 등 돌린 적 없고 장르 역시 그들을 붙잡지 않는다. 아이티(Haiti)의 라라 뮤직(Rara Music)에 영감 받든, 별빛 같은 하우스에 심취하든 아케이드 파이어는 세상 단 하나인 자신들만의 음악을 기어코 빚어낸다. 이번 앨범을 들으며 나는 롤링스톤(Rolling Stone)이 ‘Reflektor’에 건넨 평가(‘다프트 펑크에게 전한 대답’)를 4년 더 보류해야 했다고 생각했다. ‘electric blue’가 있는 이 앨범이야말로 바로 그 대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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