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신드롬, 1972
17년 만의 신보, 30년 만의 10집이다. 국내 하드록, 헤비메탈계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밖에 없고 또 반드시 알아야 할 이름 블랙 신드롬. 새 작품이 강산이 두 번 변하기 직전까지 나오지 않은 이유는 멤버들의 건강 상태와 온라인에 헤게모니를 내준 이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음반 시장의 불황 때문이었다. 슬럼프라는 괴물은 밴드 블랙 신드롬을 꽤 오랫동안 괴롭혀왔다. 하지만 이 앨범은 김재만의 말처럼 100% 정규작은 아니다. 가령 ‘I Was A Rock’은 김재만이 기타 솔로를 쳐준 이용원의 곡 ‘I Was A Punk’를 새로 연주한 것이다. 김재만은 이 곡을 “슬레이드 스타일의 경쾌함이 느껴지는 곡”이라고 자평했다. 또 블랙 신드롬의 주요 레퍼런스인 AC/DC 냄새가 물씬 나는 ‘I’m Your Man’은 데뷔작 [Fatal Attraction]에 수록된 곡이며, 스래쉬메탈 트랙 ‘Compulsion’과 드라이브감 넘치는 ‘Man On Fire’는 2003년작 [Official Bootleg]에서 먼저 이름들을 알렸던 곡이다. 이러한 자체 리메이크는 최영길의 베이스 솔로곡 ‘Gravity’의 진중함과 살짝 거리를 두며 과거와 지금을 은근히 잇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은 후배들의 대거 참여에서도 진하게 느껴진다. 모던한 레드 제플린을 지향한 ‘Bible Black’에 모습을 비친 박근홍(ABTB)을 비롯 이용원, 킹스턴루디스카, 김지영(메스그램), 만쥬(만쥬한봉지), 이교형(플라잉독), 권혁장(페이션츠) 등이 선배의 재기를 도왔다. [Episode]에선 도합 두 차례 브라스 세션을 들을 수 있는데 ‘Bible Black’엔 권혁장이 신스 브라스를 먹였고, ‘Rock Out’에는 킹스턴 루디스카가 직접 생브라스를 덧칠했다. 덕분에 음악들은 더 풍성해졌고 선후배 사이 정은 더 도타와졌다. 100% 정규 앨범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앨범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역경과 불황을 뚫고 다시 헤비메탈을 하겠다는 블랙 신드롬 멤버들의 열정 때문이다. 영어 가사를 쓰지 않으면 바운스나 라임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박영철의 말, 록 밴드는 ‘빠다스럽게’ 해야 한다는 김재만의 신념이 이 밴드를 겨우 잠에서 깨워냈다. “사람은 자신의 임무가 끝나지 않았을 때는 결코 죽지 않는다.” 선교사 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말이다.
1972는 ‘일렉트로닉 포크’라는 소스를 내걸고 하염없는 소리의 바다를 펼쳐낸다. 폴린틸드는 그런 그의 음악에 “깊은 고독을 마주해 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가사와 멜로디”라는 극찬을 보냈다. 보컬, 코러스, 어쿠스틱 기타, 키보드, 프로그래밍을 모두 1972 혼자서 해낸 ‘Cloud Of Bliss’로 빗장을 푸는 앨범 [따듯한 바람]은 신인 1972의 느긋한 자기증명이다. 수수한 듯 어떤 슬픔을 머금은 그의 보컬은 차분한 어쿠스틱 트랙 ‘마음’을 딛고 타이틀 넘버 ‘따듯한 바람’에서 기어코 무너진다. 무표정한 기타와 건반의 동어반복 위에서 빠직거리며 부서지는 멜로우이어의 드럼 프로그래밍이 왜 1972의 음악에 ‘일렉트로닉’이라는 전제를 달아야 하는지를 들려준다. 이어지는 ‘벽’과 ‘섬의창문’은 1972가 주로 어떤 장르를 지향하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결정적 대목이다. 두 곡에서 뻗어나오는 드림팝의 지독한 나른함은 음악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똑같이 무장해제 시킨다. 느린 왈츠 리듬과 SoSo의 상냥한 어쿠스틱 피아노가 ECM레이블 재킷 같은 사진에 걸린 ‘Fallin’ My Star’ 역시 그 느린 정서를 그대로 가져간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날씨’는 이 앨범의 백미다.
1972의 맑은 나일론 기타와 아투라스 스타세프스키(Arturas Stasevskis)의 수줍은 트럼펫, 부진철의 소심한 피아노 독백이 모든 음악적 정황을 80년대 어떤날과 맞닿게 한다. 여기서부터 앨범은 조금씩 밝아진다. 물론 그 밝음이란 것도 박명일 따름이지, 대낮의 쨍쨍함은 아니다. ‘날씨’ 옆에 선 ‘푸른 바다를 달리다’도 앨범이 자랑할 만한 트랙이다. 마찬가지로 포근한 나일론 기타와 트럼펫과 멜로우이어의 드럼 프로그래밍을 엮었다. 때로는 유희열 같기도 하고 때로는 조동익 같기도 하다. 1972의 뿌리는 이쯤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를 가로지른 한국형 소프트팝을 사랑하는 뮤지션임에 틀림없다. 윤상이 떠오르는 ‘달빛에 입술’은 그 꼭대기에 신스팝이라는 일렉트로닉 소스를 좀 더 흩뿌렸을 뿐이다. 1972는 20여 년 장르 터울을 극복해 바로 지금, 자신의 음악으로 이끌어냈다. 해오(HEO)의 허준혁이 ‘간격’에서 피처링을 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활한 고독이라는 정서적 공통 분모 아래 장르적 공감이 가져온 필연이었다. [따듯한 바람]은 따듯한 MQS를 통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음반이다. MQS는 여기서, 섬세하게 짜여진 소리의 기운과 여운이 듣는 사람의 행운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