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Jan 06. 2016

가까이 있었기에 더 아픈 그 이름 '첫사랑'

<무지개여신> & <건축학개론>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은 설레면서 슬프다. 설렘과 슬픔이 함께 하는 첫사랑은 그래서 맵다. 눈물이 난다. 떠올리면 그립고 그리워서 슬픈 두 사람의 이야기. 쿠마자와 나오토 감독의 <무지개여신>(2006)과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2012)이 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첫사랑

<무지개여신>에서 기시다 토모야(이치하라 하야토)의 첫사랑 아오이(우에노 쥬리)는 죽어서 온다. 언젠가 둘이 함께 바라보았던 “이상한” 무지개(기상캐스터는 이를 ‘환수평 아크’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를 다시 찍어 아오이에게 문자로 보낼 때 아오이는 이미 비행기 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첫사랑을 죽이고 시작하는 영화의 도입부는 그래서 은근히 충격적이다.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맨얼굴의 비극으로 영화가 시작되면서 관객은 또 관객대로 약속된 눈물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토모야와 아오이 사이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죽어서 온 <무지개여신>의 첫사랑과 달리 <건축학개론>의 첫사랑 서연(수지/한가인)은 15년 뒤 '살아서' 승민(이제훈/엄태웅)을 찾아온다. 의사 남편과 이혼하고 편찮은 부친의 남은 생을 제주도에서 함께 보내기 위해 집짓기를 부탁하러 온 서연. 하지만 승민은 시작부터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서연을 알아보지 못하고 집도 “해본 적 없다”며 거절한다. 하지만 서연에게 있어 이 집은 반드시 승민이 지어(주어)야 하는 집이다. 왜일까. 그래서 <건축학개론>도 <무지개여신>처럼 반드시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영화이다.

    

첫 만남

과거로 돌아가야 하므로 <건축학개론>과 <무지개여신>은 똑같이 플래시백(Flashback) 기법을 썼다. 차이라면 그 과거가 얼마나 먼 지 정도이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토모야와 아오이는 레코드점에서 처음 만난다. 아오이의 아르바이트 동료를 마음에 두었던 토모야가 ‘스토커’로 소개되는 장면이다. 이것이 연이 되어 같은 대학에 다니던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급기야 토모야는 아오이의 단편 영화 <The End Of The World> 주인공까지 맡게 되면서 둘의 ‘이야기’는 궤도에 오르게 된다.  

<건축학개론>이 플래시백으로 찾아간 곳은 90년대 중반 한 대학 강의실. 그 곳에선 영화 제목이 된 건축학개론 강의가 한창이다. 승민은 같은 정릉에 사는 서연에게 한 눈에 반하고 자신이 사는 곳을 스케치 해오라는 개론 과제를 계기로 서연과 조금씩 가까워진다. 건물 옥상에서 이어폰을 나눠 들은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두 사람을 감싸고 그렇게 우정의 기억은 조금씩 사랑의 추억으로 쌓여나간다.  

-고백

아오이와 토모야는 살아서 고백하지 못한다. 아오이는 토모야의 연애편지를 대필하며 뒷바닥에 몰래 써둔 글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만 그 글을 토모야가 읽었을 때 아오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영화 내내 억눌려 있던 슬픔이 토모야의 오열과 함께 터지고, 관객 역시 시작부터 죽은 주인공의 늦은 사랑 고백 앞에서 눈시울을 붉힌다. 이처럼 <무지개여신>에서 고백은 완성되지 못한 채 내내 영화를 겉돌다 끝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이다.

승민과 서연은 아오이, 토모야 커플과 달리 살아서 고백하지만 그 고백은 이미 유통기한이 다 된 고백이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는 승민과 이혼녀 서연이 주고 받은 감정은 <무지개여신>과 똑같이 너무 늦은 것이었다. 서로를 좋아했고 또 서로가 좋아했다는 걸 알았지만 표현하지 못한 그 시절. 김광석의 노래처럼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이 되어버린 두 사람의 이별은 그래서 아오이의 죽음으로 깔린 복선처럼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부재

직장 상사의 권유를 받들어 미국 LA로 떠난 아오이는 처음부터 없었다. 토모야가 문자를 보낼 때 아오이는 살아있었지만 토모야의 문자를 받고 아오이는 죽는다. 세상의 멸망을 주제로 찍은 자신의 영화 속 마지막 대사(“끝난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가 현실이 된 순간, 첫사랑을 이야기 하는 영화<무지개여신>은 첫사랑의 부재를 떠안고 비틀거린다. 비행기 속에서 다 타버린 아오이의 휴대폰 배터리가 숨쉬기를 멈추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부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첫사랑이란 결국 부재를 전제 하는 만남이었다. 곁에 없어야 살아남는 사랑,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다.

애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승민과 아버지와 함께 제주도로 떠난 서연. 대학 시절 첫 눈 오는 날 정릉의 빈 집에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어긋나게 지킨 탓에 직접 건네진 못했지만 택배로 도착한 그 때의 전람회 1집과 낡은 시디플레이어는 서로의 부재를 조용히 달래준다. <무지개여신>에서와 마찬가지로 첫사랑은 <건축학개론>에서도 그렇게 떠나고 또 희미해진다. 운명의 첫사랑이  부재의 운명에 직면하면서 사랑은 달콤함이 거세된 채 그리움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고 보면 아오이처럼 꼭 물리적으로 죽어야 죽음인 것만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음은 결국 서로가 곁에 없다는 것이지 않을까. 토모야와 아오이, 승민과 서연은 그래서 슬프도록 닮은 커플, 안타깝게 닮은 첫사랑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