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여신> & <건축학개론>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은 설레면서 슬프다. 설렘과 슬픔이 함께 하는 첫사랑은 그래서 맵다. 눈물이 난다. 떠올리면 그립고 그리워서 슬픈 두 사람의 이야기. 쿠마자와 나오토 감독의 <무지개여신>(2006)과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2012)이 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첫사랑
<무지개여신>에서 기시다 토모야(이치하라 하야토)의 첫사랑 아오이(우에노 쥬리)는 죽어서 온다. 언젠가 둘이 함께 바라보았던 “이상한” 무지개(기상캐스터는 이를 ‘환수평 아크’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를 다시 찍어 아오이에게 문자로 보낼 때 아오이는 이미 비행기 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첫사랑을 죽이고 시작하는 영화의 도입부는 그래서 은근히 충격적이다.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맨얼굴의 비극으로 영화가 시작되면서 관객은 또 관객대로 약속된 눈물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토모야와 아오이 사이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죽어서 온 <무지개여신>의 첫사랑과 달리 <건축학개론>의 첫사랑 서연(수지/한가인)은 15년 뒤 '살아서' 승민(이제훈/엄태웅)을 찾아온다. 의사 남편과 이혼하고 편찮은 부친의 남은 생을 제주도에서 함께 보내기 위해 집짓기를 부탁하러 온 서연. 하지만 승민은 시작부터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서연을 알아보지 못하고 집도 “해본 적 없다”며 거절한다. 하지만 서연에게 있어 이 집은 반드시 승민이 지어(주어)야 하는 집이다. 왜일까. 그래서 <건축학개론>도 <무지개여신>처럼 반드시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영화이다.
- 첫 만남
과거로 돌아가야 하므로 <건축학개론>과 <무지개여신>은 똑같이 플래시백(Flashback) 기법을 썼다. 차이라면 그 과거가 얼마나 먼 지 정도이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토모야와 아오이는 레코드점에서 처음 만난다. 아오이의 아르바이트 동료를 마음에 두었던 토모야가 ‘스토커’로 소개되는 장면이다. 이것이 연이 되어 같은 대학에 다니던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급기야 토모야는 아오이의 단편 영화 <The End Of The World> 주인공까지 맡게 되면서 둘의 ‘이야기’는 궤도에 오르게 된다.
<건축학개론>이 플래시백으로 찾아간 곳은 90년대 중반 한 대학 강의실. 그 곳에선 영화 제목이 된 건축학개론 강의가 한창이다. 승민은 같은 정릉에 사는 서연에게 한 눈에 반하고 자신이 사는 곳을 스케치 해오라는 개론 과제를 계기로 서연과 조금씩 가까워진다. 건물 옥상에서 이어폰을 나눠 들은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두 사람을 감싸고 그렇게 우정의 기억은 조금씩 사랑의 추억으로 쌓여나간다.
-고백
아오이와 토모야는 살아서 고백하지 못한다. 아오이는 토모야의 연애편지를 대필하며 뒷바닥에 몰래 써둔 글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만 그 글을 토모야가 읽었을 때 아오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영화 내내 억눌려 있던 슬픔이 토모야의 오열과 함께 터지고, 관객 역시 시작부터 죽은 주인공의 늦은 사랑 고백 앞에서 눈시울을 붉힌다. 이처럼 <무지개여신>에서 고백은 완성되지 못한 채 내내 영화를 겉돌다 끝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이다.
승민과 서연은 아오이, 토모야 커플과 달리 살아서 고백하지만 그 고백은 이미 유통기한이 다 된 고백이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는 승민과 이혼녀 서연이 주고 받은 감정은 <무지개여신>과 똑같이 너무 늦은 것이었다. 서로를 좋아했고 또 서로가 좋아했다는 걸 알았지만 표현하지 못한 그 시절. 김광석의 노래처럼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이 되어버린 두 사람의 이별은 그래서 아오이의 죽음으로 깔린 복선처럼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부재
직장 상사의 권유를 받들어 미국 LA로 떠난 아오이는 처음부터 없었다. 토모야가 문자를 보낼 때 아오이는 살아있었지만 토모야의 문자를 받고 아오이는 죽는다. 세상의 멸망을 주제로 찍은 자신의 영화 속 마지막 대사(“끝난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가 현실이 된 순간, 첫사랑을 이야기 하는 영화<무지개여신>은 첫사랑의 부재를 떠안고 비틀거린다. 비행기 속에서 다 타버린 아오이의 휴대폰 배터리가 숨쉬기를 멈추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부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첫사랑이란 결국 부재를 전제 하는 만남이었다. 곁에 없어야 살아남는 사랑,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다.
애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승민과 아버지와 함께 제주도로 떠난 서연. 대학 시절 첫 눈 오는 날 정릉의 빈 집에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어긋나게 지킨 탓에 직접 건네진 못했지만 택배로 도착한 그 때의 전람회 1집과 낡은 시디플레이어는 서로의 부재를 조용히 달래준다. <무지개여신>에서와 마찬가지로 첫사랑은 <건축학개론>에서도 그렇게 떠나고 또 희미해진다. 운명의 첫사랑이 부재의 운명에 직면하면서 사랑은 달콤함이 거세된 채 그리움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고 보면 아오이처럼 꼭 물리적으로 죽어야 죽음인 것만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음은 결국 서로가 곁에 없다는 것이지 않을까. 토모야와 아오이, 승민과 서연은 그래서 슬프도록 닮은 커플, 안타깝게 닮은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