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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Oct 02. 2018

가을의 장르, 발라드

* 이 글은 음악취향Y '발라드 싱글 100'에도 실렸습니다.



세월이 가면 - 최호섭



《로보트 태권브이》(1976)를 외치던 철없던 아이가 떠난 사랑을 그리며 어른이 된 순간, 「세월이 가면」이 태어났다. 가사를 쓴 최명섭과 곡을 쓴 최귀섭은 다름 아닌 그의 형제였고, 《로보트 태권브이》의 음악감독 최창권은 놀랍게도 그들의 아버지였다. ‘음악 가족’이라는 소박한 카테고리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난 이 불멸의 발라드는 지금도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과 가수들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불리며 음악팬의 실시간 환호를 이끌어낸다. 소중했던 사랑. 잊기 싫고 잊을 수도 없고 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그 시간, 그 추억 앞에 한 남자가 무너지고 있다. 세월 앞에서 옛사랑은 타인이 되고, 터질 듯 그리움은 절규가 되어 밤하늘을 찢는다. 무릇 돌아올 수 없는 건 아쉽고 그리운 법. 사랑이라 더 그럴 것이다.



바람이 분다 - 이소라



무뚝뚝한 피아노 인트로. 가사는 언어의 몽타주다. 칼 같았던 김훈의 글처럼 짧고 더딘 문장들을 삼키는 이소라의 목소리는 떨리고 꺾이다 끝내 울음이 된다. 「바람이 분다」는 한 편의 단편영화 같은 곡이다. 시 형식을 빌어 무덤덤한 내러티브, 실연한 주인공의 등 뒤엔 카메라 한 대가 유령처럼 따라 붙는다.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지는 사랑의 비극. 부는 바람, 젖은 하늘, 자른 머리에서 하나 둘 솟는 그 서글픈 파편들을 카메라는 주섬주섬 챙긴다. 다르게 적혔지만 천금 같았던 추억을, 나만 달라진 어제와 같은 세상을, 그리고 불어오는 텅빈 풍경을 카메라는 꾹꾹 눌러 담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람이 분다」는 보이는 곡이다. 귀를 적시는 음(音)을 넘어 가슴 속까지 저미는, 그런 ‘천금 같은’ 발라드다.



사랑할 수록 - 부활



교통사고는 김재기를 지웠고, 지워진 김재기는 이 곡에 새겨졌다. 「사랑할 수록」은 김태원의 곡이지만 이 곡은 김재기가 불러야 했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1986)를 이승철이 불러야 했던 것보다 더 큰 당위가 이 곡 속엔 있는 것이다. 내리고 비운 듯 허탈한 김재기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시가 되고 음이 됐다. 사랑하면 할 수록 상대에게 아픔이 될 수 밖에 없는 감정의 딜레마는 동생 김재희를 포함한, 김재기 이후 부활 보컬들이 쉽게 표현해낼 수 없는 성역 같은 것이었다. 무엇이 그의 목소리에 그토록 아름다운 절망을 불어넣었던 것일까. 130만 장이라는 당시 앨범 판매고는 한 보컬리스트의 마력적인 목소리가 빚어낸 한 록밴드의 슬픈 경사였다. 1994년. 내 기억보다 좀 더 오래된 얘기다.



나에게로의 초대 - 정경화



신촌블루스 출신의 정경화와 케이투의 이태섭이 만나서일까. 곡의 성향은 실제로 블루스와 하드록을 반씩 머금은 느낌이다. 90년대 발라드의 주요 공식이었던 신시사이저와 피아노의 호흡은 어느새 정경화의 섬세한 목소리 앞에서 안개처럼 부서진다. 사랑은 ‘환상 속의 그대’여서 사랑은 꿈과도 같다. 너는 신비롭고 그래서 나는 너를 초대할 뿐이고, 그런 너는 어둠 속의 빛 같은 존재다. 거칠고 섹시하게, 낙차 큰 정경화의 표현력은 저 모든 감정들을 순식간에 내뱉고 쓸어 담기를 반복한다. 이른바 록발라드의 전형을 빌어 또 다른 록발라드의 전형을 일궈낸 이 곡 안에 한국 여성 보컬리스트의 혁명이 있었다면 과찬일까. 이 곡을 카피해 본 여성들은 필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마지막 사랑 - 박기영



‘시작’으로 사랑에 들떴던 박기영이 이 곡에선 ‘마지막’이라 믿었던 사랑을 노래한다. ‘단 한 번이라도~’에서 시작되는 곡의 클라이막스는 언제 들어도 아련하고 또 아프다. 한 차례 코러스를 삼킨 곡에 힘을 보태는 드럼과 일렉트릭 기타마저 슬픈 지점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또 한 번 날아오른다. ‘너를 위.해.비.워.둔.내.맘.속’을 따라오는 피아노 라인과 짧고 굵게 해치운 록킹한 마무리는 훌륭하다. 후회는 사람이 느끼는 가장 이기적인 감정이다. 후회는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또는 스스로를 꾸짖기 위해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감정. 이 노래는 후회와 사랑은 닮았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의 썰물 - 임지훈



하모니카의 낭만도 통기타의 청춘도 모두 이별이다. 비수처럼 날카로웠던 이별의 말 앞에 쓰러진 한 남자의 절망이 이 곡에 있다. 썰물처럼 빠져 나간 사랑의 빈 자리, 검붉은 노을 물들인 굵은 눈물. 슬픔과 그리움의 감정은 이끼처럼 곡 구석구석에 붙박여 있다. 임지훈의 털털한 목소리는 그 감정의 응어리를 하나하나 힘겹게 풀어낸다. 울음도 웃음도 아닌 것이, 웃음 섞인 울음이나 울음 섞인 웃음으로 헤어짐의 슬픔은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점잖거나 해탈의 기운마저 느껴지는 뒤늦은 고백처럼도 들린다. 밀물과 썰물은 인정사정 없는 자연의 이치다. 사랑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도 그 자연을 닮았다. 밀물일 땐 세상 다 가진 것 같다가도 썰물일 땐 세상 다 잃은 듯 느껴진다. 



내 사랑 내 곁에 - 김현식



영화 《내 사랑 내 곁에》(2009) 속의 종우는 루게릭을, 현실의 현식은 간경화를 앓다 세상을 떠났다. 떠날 때 둘은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래서 같은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음악이 아프고 슬픈 건 듣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로움과 고통이 뒤범벅된 김현식 답지 않은 김현식의 목소리에 한 번, 세상에 하나 뿐인 ‘그대’에게 기대려 하는 지친 자의 절규에서 또 한 번 우리는 아프고 슬프다. 1990년 11월 1일, 그가 세상을 떠나고 이 곡은 ‘국민의 노래’가 되었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할지도 모를 바이올린 연주는 동네 애들도 다 흥얼거릴 정도였고, 따라 부르는 이들은 아파서 ‘가버린’ 김현식의 목소리를 부러 흉내 내며 이 곡을 애창했다. 그러나 육체와 내면의 고통을 뒤로 하고 그가 떠난 뒤, 비틀거릴 음악팬이 안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 신승훈



앞선 3장의 앨범으로 대학 시절 첫사랑을 떠나 보낸 신승훈. 그러므로 이 곡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그 후로 오랫동안」은 기존 신승훈표 발라드들보다 좀 더 침착하고 덜 격앙돼 있다. 경험이 아닌 상상에 기댄 서글픈 메타포는 그러나 여전히 매력적이어서 당시에도 지금도 많은 연인들(또는 여인들)에게 고독의 순간, 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우연처럼 닮았던 비와 눈물, 곡의 주인공은 떠난 그 사람이 그립다. 하늘이 울면 남은 그도, 떠난 그 사람도 울 것이라는 이 동화 같은 설정은 자칫 작위적으로 보일 법도 했지만 신시사이저의 울창한 멜로디는 그것을 기적의 사랑 이야기로 둔갑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이 한 곡으로도 신승훈은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마지막 사람’이 될 자격이 있다.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 신해철



불안한 미래를 함께 하자고 말하기 미안해 선택한 이별은 전화를 하려다 수화기를 놓으며 깨달은 연인의 공백으로 암시된다. 곡의 시작이다. 시작은 조촐하고 평화롭고 적막하다. 하지만 그 슬픔은 무표정한 합창 형식을 빌어 감정에 충실한 코러스 라인까지 일관된 감정선을 이룬다. ‘너’는 ‘내’ 마음 속에 있지, 여기엔 없다. 그래서 힘껏 안아볼 수도, 지켜줄 수도 없다. 이것이 이 곡의 비극이다. 신해철 특유의 사색, 특유의 감성, 특유의 목소리와 멜로디가 모두 어울렸다. 아레나 록 스타일이 몸에 밴 탓에 곡은 기본적으로 웅장하며, 철학도답게 사랑은 ‘긴 시간’과 ‘스쳐가는 순간’을 거친 삶의 한 부분일 뿐임을 강조한다. 넥스트로 향하던 길 위에서, 신해철은 한때 발라드 가수의 대명사였다. 



아마도 그건 - 최용준



돌아보면 아쉬운 사랑의 기억이 담담한 독백으로 물들어 간다. 사랑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지 몰라 사랑은 내내 음악을 겉돌고 구겨진 추억은 아픔과 떨림 사이에서 점점 희미해져 간다. 사랑이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엇갈린 서로의 시간들이 바로 사랑이었을 거라고 노래하는 이는 목놓아 운다.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 남아 있는 자의 미련. 아, 사랑은 그런 것일 거라고, 금방이라도 열린 문틈으로 다가올 것 같은데 이내 스산한 바람처럼 지나쳐 버리는 사랑, 그것은 아픔이라고 이 곡은 멍하니 읊조린다. 신촌뮤직의 ‘꽃미남’이었던 최용준을 일순 스타덤에 서게 한 이 슬픈 사연엔 여백이 많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사람의 감정의 여백, 떠난 그 사람의 존재의 여백, 그리고 화려하지 않게 서러운 음악의 여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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