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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Oct 17. 2018

데스메탈코리아: 신대철 인터뷰


시나위 신대철(기타) 메일 인터뷰     


라우드니스의 등장을 일본 헤비메탈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면, 한국 헤비메탈의 막을 올린 팀은 시나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글쓴이가 한국 밴드의 일본 라이브를 태어나 처음 본 건 시나위의 99년 일본 투어였으니까.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시나위 유일의 원년 멤버이자 부동의 기타리스트인 신대철은 자신의 밴드 뿐 아니라 예술가의 권리 향상 및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따져보면 그것은 오래도록 ‘록의 불모지’라 불린 한국에서 하드록/헤비메탈이라는 장르를 정착시킨 선구자로서 긍지와 책임감의 결과는 아니었을지. 그런 거물에게 살짝 긴장하며 인터뷰를 제안했고, 신대철은 바쁜 와중에도 제안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근래 SNS에서 제법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그는 인터뷰에서도 달변을 자랑, 그 내용을 활자화 했더니 무려 1만 2000자에 육박했다.     



미즈시나 테츠야(<데스메탈코리아: 한국 메탈 대전> 저자, 이하 ‘테츠야’): 한국산 하드록/헤비메탈 1세대 밴드로서 시나위는 일본에서도 잘 알려진 밴드다. 하지만 밴드 이름이 뜻하는 바를 잘 모르는 일본인은 여전히 많다고 생각하는데. ‘시나위’란 무속인이 하는 음악을 뜻하는 게 맞는가?     


신대철(이하 ‘신’): 밴드 이름의 유래는 한국에서도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다. 영문 표기는 ‘SINAWE’지만 이건 정확한 한국어 발음과 차이가 좀 있다. ‘SHINAWE’라 쓰는 게 한국어에 더 가까운 발음일 거다. 지적한대로 시나위는 무속인이 하는 음악을 뜻하면서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해져온 무악(巫樂)을 가리킨다. 요컨대, 한국 남부지역에서 유래한 무악 장르 중에서도 즉흥적인 환상음악을 시나위라 부른다. 물론 처음 밴드를 결성했을 때 이 단어는 나에게 그리 친숙하진 않았다.

     

테츠야: 당신의 부친 신중현님도 미국 보스턴 명문 버클리 음대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유명 록 기타리스트다. 역시 부친의 영향으로 기타를 쳐야겠다고 생각한 건가? 그외 어떤 기타리스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신: 그렇다. 아버지가 유명한 뮤지션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큰 영향을 받았다. 우리 집엔 항상 기재가 있었고, 음악도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있는 환경이었다. 아버지의 공연에도 여러 번 갔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때문에 결정적인 일이 발생하고 만다. 물론 나는 박정희를 좋아하지 않는다.(웃음) 알다시피 당시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박정희는 독재자로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엇이든 금지 시켰지. 당시 아버지는 그런 박정희에게 미움을 사 부득이 활동중지를 당하고 말았다. 이 건에 관해 얘기하자면 책 한 권 분량이 되는데, 당시 자식 입장에선 외출이 잦았던 아버지가 집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아버지에게 기타를 배우게 된다. 아버지의 칩거가 내가 기타를 시작하게 된 이유인 셈인데, 그래서 농담으로 “박정희 덕분에 나는 기타리스트로서 대성했다” 말하기도 한다. 해외 아티스트 중 가장 먼저 영향 받은 사람은 지미 헨드릭스다. 때때로 그의 앨범을 듣고 있자면 마법 같은 기타 음색에 매료되곤 했다. 에릭 클랩튼도 알았지만 결국 레드 제플린을 계기로 ‘나도 밴드 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4~6학년 정도였던 것 같다.     



테츠야: 시나위를 결성한 83년 당시 당신은 고등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6·29 민주화선언(1987년) 전 전두환 정권기로 매우 힘든 때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시대에 어떻게 시나위로 대표되는 한국산 헤비메탈 밴드 1세대가 등장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신: 83년에 나는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스쿨밴드를 하고 있었지만 멤버들과 실력 차가 많이 나서 하고 싶은 곡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좀 더 실력 있는 연주자를 영입하려던 차 이른바 ‘리허설 스튜디오’에 출입하며 밴드 멤버들과 알게 됐다. 그렇게 시나위가 결성된 거다. 80년대 한국에선 밴드 붐이 일고 있었다. 누가 기타를 잘 치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딥 퍼플을 커버 하면 교내 영웅이 됐던 시대였지. 한 마디로 록 밴드를 하는 일이 가장 쿨 했던 시절이었다. 우리에게 그런 상황(전두환 정권기)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음악이었고, 그 중에서도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것이 가장 멋져 보였다.      


테츠야: 80년대 한국은 기재나 스튜디오 설비가 부족했던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시나위의 데뷔작 [Heavy Metal Sinawe]는 2007년 <경향신문>이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32위에 올랐다. 당시 힘들었던 이야기나 제작 과정에서 에피소드를 들어볼 수 있겠나?     


신: 80년대 한국에는 레코딩 스튜디오라는 게 몇 곳 없었다. 시나위 데뷔앨범은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것으로, 지금 돌이켜보면 꽤 규모가 컸던 곳이었다. SSL 콘솔과 Studer 멀티트랙 레코더, 그리고 널찍한 레코딩용 부스도 있었다. 물론 문제가 없진 않았다. 한 명 뿐이었던 스태프가 헤비메탈 앨범을 제작해본 경험이 없었던 거지. 인터넷이 있는 요즘이야 여기저기 정보가 넘쳐나지만, 우리가 데뷔작을 만들 때만 해도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재밌는 뒷얘길 하자면, 하루 만에 앨범 전곡을 녹음한 일이다. 곡에 따라선 리허설이라 생각하고 연주한 것이 그대로 앨범에 수록된 경우도 있다.(웃음) 그런 이유로 지금 다시 들어보면 조잡한 연주가 많아 개인적으론 매우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있다.     



테츠야: 시나위 데뷔 앨범에 수록된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지금도 많은 밴드들이 부르는 록 송가다. 이 곡을 썼던 당시 에피소드나 반향 같은 것에 관해 말해주겠나?    

 

신: 어느날 한 레코드 회사 오너가 와서 “시나위 앨범을 만들고 싶다”더라. 나는 반신반의 했다.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본격 하드록/헤비메탈 앨범을 낸다는 건 먼 나라 일로만 생각되던 때였으니까. “자네들이 쓴 오리지널 곡이 있겠지?” 그 오너가 물어왔고 나는 “물론 있습니다” 대답했지만, 사실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1~2곡 정도였을까. 아마 86년 1월 정도였던 것 같은데, 레코딩 스튜디오는 다음 달로 이미 준비돼있었다. 나중에 보니 다 오너의 수완 덕분이었다.(웃음) 그렇게 우린 그 오너로부터 되도록 빨리 앨범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 그렇게 헐레벌떡 만든 곡 중 하나가 바로 ‘크게 라디오를 켜고’였다. 처음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땐 레코딩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감사했는데, 데뷔 앨범 발매 후 엄청난 반응이 왔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돼 있더라’는 말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당시에도 다양한 밴드들이 있었지만 우리처럼 특정 장르를 지향하는 밴드는 드물었다. 아예 시장이란 게 없었지. 특정 장르 음악으로 앨범 전체를 채운다는 건 당시로선 획기적인 실험이었을 뿐더러 그런 야심을 가진 뮤지션도 없었다. 달리 말하면 우리 같은 전례에 후발 밴드들이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듣고 자란 세대는 음악적 실험을 주저하지 않으니까.     


테츠야: 전두환 재임 중(1980~88년) 한국 음악 업계에선 ‘건전가요’를 음반에 반드시 수록해야하는 의무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건전가요는 언제부터 의무화 됐고, 언제 폐지된 건가?   

  

신: 건전가요 수록은 박정희 재임 말기인 1979년부터 의무화 됐다. 그건 음악업계에의 탄압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정권에서도 수록 의무가 답습됐지만 아마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에 폐지됐을 거다. 데뷔작을 만들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여러 건전가요들 중 어떤 걸 골라 앨범에 넣을까를 검토하는 순간이었다.     


테츠야: 80년대 한국 헤비메탈 씬의 여명기에 서울 ‘파고다 극장’을 메카로 시나위, 부활, 백두산 등 1세대가 자웅을 겨뤘다고 들었다. 특히 부활의 김태원과 백두산의 김도균, 그리고 당신까지 3명은 한국판 ‘G3’로 불리며 2003년에는 3명이 함께 [D.O.A]라는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86년에 함께 데뷔한 당신들 셋은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했나, 아니면 친했던 사이였는지?     



신: 종로 파고다 극장은 원래 연극 전용 극장이었다. 거기서 처음 라이브를 한 밴드는 ‘혼(魂)’이라는 팀으로 딥 퍼플을 커버하는 밴드였다. 당시 파고다 극장은 경영난을 겪고 있었는데 혼의 공연에 많은 관객이 몰린 거다. 이게 평가를 받으며 다양한 밴드들이 파고다 극장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시나위나 부활도 선 적이 있다. 김태원, 김도균씨는 그때 알게 된 사람들이다. 84~85년 무렵인데 앨범 데뷔 전이었다. 그들과는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확실히 우리는 라이벌로 여겨지곤 했는데 그건 매스컴이 만든 이미지였을 뿐이다. 말씀하신대로 그들과 나는 한국판 ‘G3’로 활동한 적도 있다. 일종의 프로젝트 밴드로서 즐겼는데 김태원씨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서 정력적인 활동으로까진 이어지지 못했다.

     

테츠야: 일본도 80년대는 헤비메탈 붐이 일었던 시기로 라우드니스, 바우와우, 앤섬(Anthem), 어스쉐이커, 쇼-야(Show-Ya) 등이 하나둘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80년대 한국에선 일본의 대중문화가 받아들여지지 못했는데, 일본 씬의 동향은 알고 있었나?     


신: 몇몇 비공식 루트를 통해 일본 동향은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에게 일본 밴드들은 경이적이었다. 라우드니스나 바우와우 등은 대부분 한국 록 마니아들이 알던 존재였던 데다, 그들은 80년대 한국 밴드들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특히 라우드니스 곡들은 당시 한국 밴드들이 뻔질나게 카피했었다. 부활의 김태원씨도 라우드니스의 광팬이었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부활의 데뷔 앨범 재킷 뒷면에 “라우드니스에 도전장을 던진다”고 썼을 정도였다. 나는 89년 라우드니스의 첫 내한공연도 보러 갔다. 마이크 베세라(Michael Vescera)를 프론트맨으로 영입한 2기 라인업이었는데 정말 끝내주는 퍼포먼스였다. 바우와우(Vow Wow)로 이름을 바꾸기 전 바우와우(Bow Wow) 시대도 나는 알고 있다. 98년이었나, 일본을 찾았을 때 야마모토 쿄지(바우와우 기타리스트)를 만나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     



테츠야: 김종서, 서태지와 함께 아메리칸 하드록을 지향한 4집 [Four](1990)는 일본 토이즈 팩토리(Toy’s Factory)에서도 라이센스 발매가 됐었다. 이걸 계기로 시나위를 처음 알게 된 일본인들도 많았을 거라 짐작하는데, 당시 상황을 좀 들어볼 수 있겠나?

    

신: 당시 매니저와 레이블 쪽으로 토이즈 팩토리에서 제안이 온 건 기억나지만, 세부 내용까진 잘 모르겠다. 일본의 모 매니지먼트사가 시나위를 영입하고 싶어 했다는 얘길 들은 적은 있다. 공교롭게도 김종서와 서태지가 탈퇴해 없던 이야기가 돼버렸지만.     


테츠야: 시나위 데뷔작에서 노래한 임재범이나 김종서, 그리고 서태지는 이후 대중음악계에서 스타가 됐다. 그들의 활약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과는 지금도 좋은 관계로 지내는지?     


신: 보통 함께 활동했던 멤버가 떠났을 땐 서로 대립한 끝에 탈퇴한 패턴이 많지.(웃음) 지금 심경을 표현하자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랄까, 딱히 그들과 각별한 사이는 아니다. 확실히 임재범이나 김종서, 서태지는 대중적 인기는 얻었지만 그들이 음악적인 성취를 이뤘는지는 잘 모르겠다.     


테츠야: 손성훈이 마이크를 잡았던 5집 [매 맞는 아이](영문 제목은 [Whipped Child], 1995)와 김바다와 함께 한 EP [Circus](1996)부터 시나위는 조금씩 얼터너티브록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내가 처음 시나위를 들었던 것도 이 시기였는데, 왜 음악이 변한 건가?     


신: 손성훈이 가입한 5집은 시나위라는 이름으로 6년 만에 냈던 작품이었다. 90년대 중반은 그런지가 유행했던 때로, 개인적으로도 사운드 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걸 해볼 필요를 느꼈다. 마치 레드 제플린이 8집 [In Through The Out Door](1979)에 ‘Carouselambra’를 수록한 것처럼. 이런 변신은 잘못하면 옛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지만, 항상 비슷한 곡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테츠야: 김바다가 참여한 6집 [Sinawe 6/은퇴선언](1997)은 한국에서 2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안다.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는 H.O.T.(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엑소, 샤이니 등의 선배격 남성 5인조 아이돌 그룹. 90년대에 ‘한국판 스맙(SMAP)’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S.E.S.(소녀시대, 에프엑스의 선배격 여성 3인조 아이돌 그룹으로, 슈라는 멤버는 재일교포이기도 하다. 98년 일본에서도 음반을 낸 적이 있다) 등이 데뷔했고, 조금씩 케이팝 열풍이 시작된 때인데, 앨범 제작 당시 그 정도로 앨범이 팔릴 것이라 예상을 했나?     


신: 마치 여섯 장 째 앨범이 마지막 히트작인 것처럼 들리는군.(웃음) 어떤 앨범이 많이 팔릴지를 예상하는 건 힘든 일이다. 물론 많은 애정을 쏟아 만든 앨범에는 좋은 반응이 따르게 마련이지. 특히 6집을 만든 당시는 거의 1년 동안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지냈을 정도니까. 지금도 많은 후배들이 6집 수록곡들을 커버 하고 있다.     



테츠야: 시나위의 첫 일본 공연은 99년 5월이었는데, 그 전에 대철씨 홀로 시나 앤 더 로켓츠(Sheena & The Rokkets)의 결성 20주년 공연에 게스트로 온 적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노래하던 시나(Sheena)는 3년 전에 세상을 등졌지만, 아유카와 부부와 친분을 갖게 된 사연을 들어볼 수 있을까?

     

신: 97년이었나. 시나위 6집을 내고 활동할 무렵 일본에 사는 영국 기자 프레드 바코(Fred Varcoe, 전 <Japan Times> 스포츠부 매니저)가 한국의 록씬을 취재하러 방한했었다. 그의 인터뷰에 몇 차례 응했는데, 마침 그 분 여친(지금의 아내)이 한국인이었던 거다. 그래서 친해지게 됐고, 프레드는 98년 후지 록페스티벌에 나를 초대했다. 물론 페스티벌에 출연하기 위한 게 아니라 단순히 보러 간 것뿐이었다. 거기서 시나 앤 더 로켓츠의 공연을 보게 됐는데 백스테이지에서 아유카와 마코토를 소개 받았다. 그 뒤 그들의 결성 20주년 공연에 출연해달라는 제의를 받았고 함께 공연하게 된 거다.(98년 11월23일, 시모키타자와 ‘Club QUE’에서) 프레드 집에도 초대 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적잖이 마셨던 기억이 난다.(웃음) 이후 그들과는 한동안 못 만났는데, 시나의 부고를 들었을 땐 많이 슬펐다. 사실 조금 전에 당시 통역을 해준 친구를 통해 마코토(鮎川誠)씨의 최근 사진을 봤다. 정말 반갑더라. 언젠가 일본에 갈 기회가 되면 마코토씨를 꼭 만나고 싶다.     



테츠야: 시나위의 99년 첫 일본 투어는 지금은 없는 신주쿠 버진 메가 스토어(Virgin Mega Store)에서 언플러그드 라이브로 진행됐고, 스카파-!(*スカパ-!, 영문 표기는 SKY PerfecTV!. スカパ-JSAT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유료 다채널 방송, 스트리밍 동영상 서비스 브랜드)의 한류전문 채널 KNTV가 주최한 ‘한국대중문화예술제’ 등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등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시나위 라이브를 본 것도 그 시기였는데, 일본 관객들과 뮤지션, 일본의 대중음악 시장 전반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     


신: 일본 관객들, 무대 모든 것이 부러웠다. 일본 대중음악 시장은 정말로 크고, 뮤지션들도 저마다 피땀 흘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테츠야: 시나위의 두 번째 일본 투어는 같은 해(99년) 말 도쿄와 오사카에서 이어졌다. 윤도현과 함께 했던 투어로, 도쿄 무대는 온 에어 웨스트(ON AIR WEST, 현 츠타야 오-웨스트(TSUTAYA O-WEST))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 에피소드 같은 게 있다면?     


신: 사실 라이브 자체는 즐길 수 없었던 공연이었다. 당시 보컬이었던 김바다가 갑자기 피부병에 걸려 아픈 얼굴로 무대에 섰거든.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 퍼포먼스 자체도 별로였다. 아쉬운 부분이 많았지.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시나위 데뷔 앨범 재킷을 한 손에 들고 사인을 요청해오더라고. 그땐 솔직히 좀 감격했다. 음악을 하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을 정도로.     


테츠야: 시나위의 최신작은 미니앨범 [Mirrorview](2013)다. 2년 뒤 김바다와 다시 만나 서울에서 ‘완전체’라는 공연을 했고. 역시 시나위의 전성기는 김바다가 프론트맨이었을 때인가라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는데 그와 재결성한 사연, 그리고 이후 활동 계획에 관해 들어볼 수 있을까?    

 


신: 2012년 MBC에서 방송한 인기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시즌2>에 출연하면서 김바다와 다시 플레이 하게 됐다. 프로 뮤지션이 과제 곡을 받아 상대와 겨루는 토너먼트 방식 프로였지. 나는 밴드 형식으로 출연 제의를 받아 시나위로서 김바다와 매주 출연했다. 단, 우린 서로 다른 소속사에 있어 당시 재결성은 어디까지나 1회성 프로젝트였을 뿐이었다는 게 함정이다. 그저 방송 상 콘셉트였고, 우리가 재결성 하는 모습을 그들이 촬영하길 원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다음해 발매한 [Mirrorview]는 당초 계획대로 만든 앨범으로 김바다는 참여하지 않았다. 2015년 재결성은 팬들의 뜻에 따랐던 것이고, 급기야 한국 내 록페스티벌에서도 함께 연주한 것이다.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지금 그는 별도 소속사에 있고 조금 복잡한 문제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결국 그의 소속사인 에버모어 뮤직(Evermore Music)과 관계는 친밀하다 말할 수 없기에 당분간 김바다와 재결성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근래 나는 시나위 활동 외, 작은 프로젝트를 즐기고 있다. 블루스 기타리스트 한상원, 찰리 정과 함께 블루스 파워(Blues Power)라는 유닛을 결성해 가끔씩 라이브 공연을 한다.

      

테츠야: 시나위 데뷔작 발매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났다. 이렇게 오랜 기간 당신이 기타리스트로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신: 음, 글쎄...... 아마 모두가 비슷하겠지만,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테츠야: 시나위의 가사는 기본적으로 한국어다. 당신들과 같은 해 데뷔한 백두산은 2집 [King Of Rock’N Roll]에서 영어 가사에 도전했었다. 현재 한국 헤비메탈 씬에선 데뷔 때부터 영어 가사만 쓰는 밴드들이 늘고 있는데, 모국어 가사를 고집하는 이유라도 있나?     


신: 딱히 모국어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그저 영어를 잘 모를 뿐.(웃음). 그래도 한국 팬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곡을 썼는데 영어 가사를 쓰면 과연 메시지가 잘 전달될까? 확실히 요즘엔 영어 가사를 쓰는 젊은 밴드들이 늘고 있지만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다. 왠지 한국에선 정확한 가사를 들려주는 일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지 않나 싶다.


테츠야: 당신은 김도균,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목경과 함께 2013년에 펜더 USA(Fender USA) 커스텀샵을 방문, 한국 기타리스트로선 처음으로 펜더 USA 커스텀샵에서 만든 스트라토캐스터(Stratocaster)를 기증 받았다고 들었다. 기뻤던 순간이었겠다.     


신: 아, 매우 기뻤다. 기타 헤드 뒷면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참고로 펜더 USA로부터 커스텀 기타를 최초로 기증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아버지였다. 2대가 펜더 USA 커스텀을 기증 받은 사례는 아마 세계 최초가 아닐까 싶은데. 이 역시 명예로운 일이다.     



테츠야: 앞서 말했다시피 부활의 김태원, 백두산의 김도균, 그리고 당신 세 명은 한국판 ‘G3’로 불린다. 당신들보다 뒤에 등장한 한국 기타리스트들, 예컨대 이현석이나 김세황, 지하드의 박영수 같은 속주 기타리스트들을 의식하는 편인지? 혹시 그들과도 친하게 지내는가?     


신: 그들에게 호감은 갖고 있지만 딱히 라이벌이라 생각진 않는다. 꽤 과거에 네오 클래시컬 주법을 연습한 적이 있는데 나에겐 맞지 않더군. 지금은 그런 연주는 하지 않는다.     


테츠야: 최근 당신은 뮤지션들의 권리향상을 위한 ‘바른 음원 협동조합(이하 ‘바음협’)’ 이사장, KBS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 <탑밴드> 심사위원을 맡았고 또 서울 복합 문화 공간 ‘플랫폼창동61’의 기획운영에도 관여하는 등 후배들을 서포트 하는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특히 플랫폼창동61은 익스피어리멘탈 메탈 밴드 잠비나이, 하드코어 밴드 바셀린 등의 활동 거점이 됐지. 이런 활동들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신: 바음협을 설립한 동기는 디지털 음원의 수익배분 방법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잘 모를 것 같은데, 한국에선 2006년 무렵부터 디지털 음원 매출이 피지컬 음반 매출을 눌렀다. 그러면서 뮤지션 측에 불리한 시스템이 잉태된 거다. 이미 한국 음악 매출의 90% 이상은 디지털 음원의 몫이 됐다. 상황이 이런데도 뮤지션들은 음악을 만드는 데만 열중하느라 자신들을 둘러싼 시장 환경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았다. 귀찮은 숫자나 통계, 익숙하지 않은 전문용어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설마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 이 문제를 사회 전반에 제기하고 불공평한 시스템의 시정을 호소하는 흐름으로 가져가려 했다. 최종적으론 법 개정을 촉구하자는 결론에까지 이르러 국회의원에의 진정 활동도 했다. 마침 2017년 한국에선 대통령 선거가 일찍 치러질 때여서 절호의 기회라 여겼고, 당시 유력 후보였던 문재인 현 대통령에게도 진정을 넣었었다. 현행 한국 저작권법의 결함을 의원입법을 통해 시정할 수 있도록 요청한 거다. 이건 나 개인을 위한 게 아니라 한국 뮤지션전원을 위한 활동이기 때문에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주고 있다. KBS <탑밴드>는 가능성 있는 아마추어 또는 무명 밴드를 발굴하기 위한 음악 프로였는데, 심사위원으로 출연해 즐거웠다. 특히 <탑밴드> 시즌1에선 게이트 플라워즈라는 신예 얼터너티브/포스트그런지 밴드를 발굴해 호평을 받았는데, 나는 그들의 첫 정규앨범 [Times](2012)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이런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세상이 보다 나은 쪽으로 나아가는데 역할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복 받은 커리어를 이어온 건 어쩌면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고. 플랫폼창동61에선 음악감독 역할을 맡았는데, 서울 홍대에서 열릴 ‘마포 페스티벌’이라는 이벤트도 제작할 예정이다.      



테츠야: 지난 30년 한국의 음악 씬, 한국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터넷, SNS가 음악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말해 달라. 가령 근래 당신은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사회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일본에선 애플 뮤직이나 스포티파이에서 시나위 전작들 대부분을 만날 수 있다.     



신: 내가 처음 기타를 연주했을 때는 아날로그 음반 시대였다. 그리고 90년대 CD 시대를 지나 21세기 디지털 오디오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나는 음악업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전부 봐온 셈이 됐다. 90년대 말에 인터넷이 등장해 실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건 그야말로 음악업계에 있어 MTV를 능가하는 충격이었지 않나 싶다. 인터넷 등장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시대다. 한국의 록씬은 현재 위기다. 내가 젊었을 때 록은 단순히 머리를 길러 기타를 메고 여성 팬들과 만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업계구조도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지금 업계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음악 장르는 세분화된 끝에 되레 몰개성을 불러왔다고 본다. 특히 케이팝이 대세인 한국 내 세분화 된 음악 장르에는 빛이 들지 않아 시장에서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인터넷이 나오고 이런 흐름은 더 현저해졌다. 왕년의 밴드가 가졌던 신비감 같은 것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한편으론 든다. SNS는 인터넷 시대를 상징하는 새로운 미디어다. 과거엔 신보를 내면 홍보해줄 만한 기존 미디어를 찾았는데 현재는 뮤지션이 발매 전 직접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보를 올리고 있다. 이 역시 큰 변화다. SNS의 장단을 정의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어쨌거나 이전과는 달라진 세상에서 살게 됐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정액제 음원 서비스는, 이것도 결과론이긴 하지만 음악을 죽인 유통수단이라고 본다. 실제 애플뮤직이나 스포티파이 같은 비즈니스 모델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생겼다. 한국 독자의 정액제 음원 서비스가 시작된 계기는 그 전에 만연하던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대책으로서였다. 한국 음악업계가 불법 다운로드를 뿌리 뽑기 위해 짜낸 아이디어가 바로 저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였다. 즉, 불법 다운로드 대신 조금이라도 돈을 내고 들으라는 거다. 2000년대 초는 피지컬 CD와 정액제 음원 서비스가 공존했었지만, 결국 가격경쟁력이나 편의성에서 우위였던 정액제 음원 서비스가 시장을 완전히 먹어버렸다. 그로 인해 이전엔 당연했던 앨범 제작이라는 행위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일본 시장 사정은 모르겠지만, 한국에선 이미 앨범 제작에 노력을 쏟지 않는다. 싱글 발매가 대부분이다. 이건 록밴드에겐 치명적인 상황이다. 더 이상 진지하게 앨범을 만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쓴 곡을 해외에 전할 수단으로서 애플뮤직이나 스포티파이가 무조건 좋다고 생각할 순 없다. 보다 적절한 방법이 더 많이 있지 않을까.     


테츠야: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부터 53년이 지났다. 하지만 한일관계는 영토 문제나 역사인식의 차이로 여전히 냉랭하다.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모습, 양국의 리더 또는 정치가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신: 외교관계에 관해 질문을 받으니 마치 정치 평론가가 된 기분이다.(웃음) 물론 나는 정치 문외한이지만 우린 누구라도 평화와 공존에 관해 생각하고 또 노력하길 바라고 있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 정세도 외부에서 보면 전후 보수정권이 너무 오래 집권 중이지 않나. 그건 아마도 일본 국민들이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한국와 일본에 좀 더 진보적인 리더가 나타난다면 양국 관계에도 진전이 있지 않을까 싶다.     


테츠야: 한일관계는 복잡하지만 시나위의 일본 공연을 기다리고 있는 일본인 팬도 있을 거라 본다. 마지막으로 이후 활동 계획, 그리고 일본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신: 일본에서도 시나위가 알려져 있고, 시나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기회가 있다면 꼭 일본에 다시 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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