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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Oct 23. 2018

'이별 아닌 이별'을 부른 90년대 아이콘

90년대 초 ‘이별 아닌 이별’이라는 노래로 스타덤에 올랐던 가수가 있다. 이범학. 오태호의 발라드 ‘마음의 거리’로 좀 더 멀리 갈 줄 알았던 그의 행보는 그러나 어느 순간 멈춰버렸고, 그렇게 세월은 어느덧 2010년대 중반까지 와버렸다. 3년 전, 폴 맥카트니와 조용필을 좋아했던 그를 그가 운영하는 일산 마두동 해물요리 전문점 ‘미몽’에서 만났다. 이 인터뷰는 그때 나눈 얘기들이다.

 

90년대를 대표하는 곡 '이별 아닌 이별'이 담긴 이범학의 데뷔작. '이별 아닌 이별'은 이색지대라는 팀에서 함께 활동한 오태호의 곡이었다.


‘이색지대’라는 팀으로 데뷔를 했다. 밴드 음악을 하고 싶었던 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 밴드로 시작했다. 그래서 밴드 음악이 자연스러웠고. 이색지대는 내가 군 제대 후 복학 준비할 때 보컬을 구한다 해서 우연히 합류하게 되었는데, 요즘 유행하는 오디션이었다.     


오디션에서 어떤 곡을 불렀나? 기억이 날 지 모르겠다(웃음).     

김현식씨의 ‘변덕쟁이’랑 다섯 손가락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을 불렀던 것 같다.     



폴 맥카트니(Paul McCartney)를 보고 가수를 꿈꾼 것으로 안다. 국내에선 누구를 좋아했나?     

지금도 조용필 선배님을 좋아한다. 나 뿐 아니라 아마 가수들이 제일 존경하는 분이 바로 조용필 선배님일 거다. 


이유가 뭘까?     

꾸준함. 그리고 음악이 늘 앞서 간다는 것이다. 사실 30년 전 선배님 곡들은 지금 들어도 구식처럼 들리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음악적인 역량이 대단하신 것 같다.     



이범학의 또 다른 히트곡 '마음의 거리'가 담긴 두 번째 앨범. '마음의 거리' 역시 오태호의 곡이다.

2집 이후 왜 그렇게 오래 쉬었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2집을 만들 때 소속사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소속사 보다는 당시에는 몰랐던,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다른 루트를 통해 해봐야겠다는 막연한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제작도 안 해본 사람이 제작을 하려 했으니,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 주위 사람들로부터 ‘딜’ 같은 게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 본의 아니게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하기도 했고. 결국 모든 게 운이었던 것 같다.     



1집은 템포가 있는 ‘이별 아닌 이별’을 타이틀 트랙으로 쓴 반면, 2집은 ‘마음의 거리’라는 차분한 발라드를 대표곡으로 내놓았다. 본인의 의지였나?     

두 곡 모두 오태호씨 곡이다. 오태호씨가 원래 이색지대 멤버였다. 나보다 먼저 밴드에 있었는데, 이후 이승환씨 곡이 유명해지면서 바빠졌다. 그래서 ‘이별 아닌 이별’을 남기고 팀을 먼저 나갔다. 자연스럽게 1집이 잘 되면서 태호에게 다시 부탁을 했는데 무엇보다 ‘마음의 거리’라는 곡 자체가 되게 좋았다. 템포나 장르 구분을 하려는 의지는 당시엔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그 곡이 좋았기 때문에 타이틀 곡으로 썼던 기억이다.     




‘이별 아닌 이별’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낸 곡이라는 기사를 봤는데, 이건 어떤 의미인가?     

그 곡은 이미 있었다. 이색지대라는 팀에 내가 제일 마지막에 합류했다. 본래 리드 싱어가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팀을 탈퇴했고 내가 오디션을 통해 들어간 건데, 그 곡은 이미 세팅이 되어 있었던 거다. 나만 연습해서 앨범을 낸 거라 사실 내 의사에는 전혀 없던 곡이다.     


본래 하고 싶었던 음악은 그럼 어떤 거였나? ‘내 사랑 그대’ 같은 재즈 피아노가 가미된 스타일이었는지?     

재즈는 욕심은 있는데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아서 힘들다. 록하고 발라드, 그러니까 록 발라드였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은.     


90년대 가요계와 2000년대 이후 가요계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90년대엔 앨범이 하루에 수 십장이 나왔었는데, 주류가 정해져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댄스, 트로트, 발라드 등 몇 명이 주도했던 것 같다. 반면 2000년, 2010년대엔 다양해졌고. 노래하는 친구들 실력도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다양해져서. 나 같은 경우는 연습할 곳이 없어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소리 지르면서 그렇게 연습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무대뽀’로 한 거다, 체계 없이 내가 좋아서 그냥. 어쩌면 노력의 반만 했어도 터득할 수 있는 걸 당시엔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에 좀 오래 걸리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이대팔]과 [부장의 잔소리]라는 싱글은 어떻게 내게 된 건지 궁금하다.     

20 여 년 동안 알고 지낸 소속사 사장, 그 분도 사실은 내 후배랑 연결된 지인이다. 그 분이 곡을 들려줬는데 그 곡이 좋아서 하게 된 거다. 사실, 스타일을 바꾸기가 쉽진 않았다. 그래서 내 스스로 자기 합리화랄까,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이 한 가지 더 늘었다 생각하고 시작을 했는데 의외로 분위기가 좀 안 좋았다. 구체적으로 얘기할 순 없지만. 그래서 결과적으론 안 하니만 못한 게 아닌가 싶다. 활동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고. 칼을 뽑아 무도 제대로 자르지 못한 느낌이 든다. 물론 노래는 계속 하고 있지만.     


당시 트로트를 “음악적 도전”이라고 했는데 뮤지션 이범학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음악은?     

새로운 걸 준비해야지. 계속 구상 중이고. 하지만 나도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앨범을 낼 기회가 점점 줄어들 것 같다 냉정하게 말해서. 물론 앨범은 낼 거다. 그게 내 직업이니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서진 않았지만 트로트 쪽은 아닐 것 같다.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걸로 다시 시작할 거다.     



미몽(味夢)이라는 이 식당을 열게 된 계기를 물어봐도 될까?     

내가 음식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내 아내가 음식을 참 잘한다. ‘이거 나만 먹기엔 너무 아깝다’ 생각 끝에 하게 된 거고. 사실 진작 했어야 되는 건데, 내가 부업을 한 적이 없다. 공연이나 방송이 없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 같이 만들면서 소일 거리로 한 번 해볼까, 그렇게 큰 고민 없이 시작은 쉽게 했다. 그렇게 재밌게, 알콩달콩 하고 있는 중이다(웃음).     


연기도 하는데 ‘연기자 이범학’의 위치는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     

(웃음)글쎄, 내가 연기자라고 하기엔 좀,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여기저기 맛만 좀 본 상태지. 재밌는 작업인 것 같다. 사실 ‘주변인’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은데, 일반인보단 많이 알고. 내가 해오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열망 같은 건 있다. 노래도 일종의 연기여서 노래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말씀.     

‘팬이었다’는 말도 좋은 말이지만 ‘아직도 팬이다’라는 말이 나에겐 가장 좋은 말일 거다. 내가 늘 추구하는 것 중 하나는 실망을 드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거다. 욕심인지 당연한 얘기인진 모르겠지만. 일상에서도 음악적인 면에서도. 사실 [이대팔] 음악이 과거 팬 분들껜 실망을 주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당시엔 최선이었다 생각하고 후회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 곡도 내 자식 중 하나이기 때문에. 자식을 버릴 순 없지 않나. 그래서 항상 내 레퍼토리에 있을 거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이범학으로 활동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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