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Oct 07. 2019

진저 베이커

Ginger Baker from Cream 1939.8.19 – 2019.10.6


모든 록 드러머들은, 비록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진저 베이커에게 영향을 받아왔다.

닐 피어트(러쉬)

 

그는 위대한 드러머였고, 그 시절 우린 모두 크림의 팬이었다. ‘Sunshine Of Your Love’는 엄청난 곡이었다.

브라이언 윌슨(비치 보이스)


진저 베이커가 사망했다. ‘드럼의 마왕’으로 불렸던 그. 진저는 화제작 <조커>에 삽입돼 화제가 된 ‘White Room’을 남긴 록 트리오 크림(Cream)의 드러머였다. 한땐 나이지리아의 영웅 펠라 쿠티와 아프로 비트를 탐닉했고, 진저 스스로는 언제나 재즈 드러밍에 심취했다.


진저 베이커는 단순한 록 드러머가 아니었다. 세간이 그를 ‘최초의 슈퍼스타 록 드러머’라 부른 건 그가 록 밴드에 몸담고 있어서였지 그의 드러밍이 록을 지향했기 때문은 아니다. 진저의 드럼은 언제나 스윙을 머금고 있었고 비밥과 하드밥 사이를 아슬아슬 넘나들었다. 그는 게리 무어를 불러 또 다른 크림을 만들 줄도 알았지만 빌 프리셀, 찰리 헤이든 같은 재즈 뮤지션들과도 기탄없이 어울릴 수 있는 드러머였다. 진저는 에릭 클랩튼과 잭 브루스가 아니어도 웨스 몽고메리, 폴 챔버스와 함께 블루노트에서 팀을 꾸려도 됐을 만큼 재즈를 알았다. 진저가 살아서 그의 드럼 독학에 약간의 여백을 만들어준 필 시멘을 비롯해 아트 블래키, 맥스 로치, 엘빈 존스, 필리 조 존스, 베이비 돗즈 등을 영향 받은 드러머들로 언급한 이유도 다 그래서였다. 록과 재즈, 그리고 아프로 비트. 혹자의 말처럼 진저는 때문에 어떤 장르로부터도 자유로운 ‘저스트 드러머’였을지 모른다.  


1968년 로열 앨버트 홀에서 진행한 크림의 마지막 콘서트. 진저의 젊은 시절 'toad'는 강하고 맹렬했다.


2005년 로열 앨버트 홀에서 성사된 크림 재결성 공연. 진저 베이커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격인 'toad'를 멋지게 해치운다.


귀신같은 날(生) 드러밍을 들려준 존 본햄(레드 제플린)의 ‘Moby Dick’보다 3년 앞서 록 드럼을 부검한 ‘Toad’는 진저 베이커 하면 반드시 소환되는 곡이다. 그리고 이 곡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플리가 진저를 추모하며 왜 ‘자유와 야성’을 언급했는지에 대한 가장 합당한 근거다. 그것은 고작 네 살 때 [Wheels Of Fire]를 들은 데이브 롬바르도(슬레이어)가 태어나 처음으로 접한 더블 베이스 드러밍 사례였다. 치밀하고 혁신적인 리듬의 서사를 바람 같은 폴리리듬에 실어 조직적인 콤비네이션 필인에 모조리 쏟아 넣은 그 연주 앞에서 무참했을 이는 롬바르도 외 스튜어트 코프랜드(폴리스), 빌 브루포드(킹 크림슨), 닉 메이슨(핑크 플로이드)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진저 베이커의 플레이에 ‘Wild’라는 수식어를 즐겨 쓴다. 실제 그렇다. 진저의 드러밍엔 야성이 넘치고 그의 꼼꼼한 터치는 한 결 같이 거칠다. 동시대 진저에게 필적할 만한 드러머는 지미 헨드릭스의 친구 미치 미첼 정도 말곤 없었다. 그래서 나는 ‘드럼의 마왕’보단 ‘드럼의 야생마’라고 그를 부르고 싶다. 만성 폐쇄성 폐 질환과 관절염을 앓아오다 2016년 심장 절개 수술까지 겪은 끝에 끝내 눈을 감은 위대한 드러머. 20일 뒤 다섯 번째 기일을 맞는 우리네 마왕이 자신의 영웅이었을 진짜 마왕을 저 세상에서 영접할 상상을 하니 한 편으론 흐뭇하고 한 편으론 서글프다. 세계 드럼계 큰 별이 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태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