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가라오케(カラオケ)라는 일본 문화가 ‘노래방’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세상은 은밀히 요동 쳤다. 굳이 악기를 배우지 않아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없어도 마음껏(그것도 남들 앞에서 남들과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는 음악 리스너들이 LP에서 CD로, CD가 다시 MP3로 대체될 때 겪었던 혼돈에 맞먹는 문화적 격변이었다. 오직 사람의 영역이리라 의심하지 않았던 음악 연주에도 기계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절 노래방을 제패한 곡이 있었으니 바로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였다. 노래를 만든 사람은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이승환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이상우의 ‘하룻밤의 꿈’을 작곡한 오태호, 노래를 부른 사람은 철장미(Iron Rose)라는 헤비메탈 밴드를 거쳐 군입대 전 객원 보컬로 피노키오에 잠시 몸담은 김성면이었다. 그는 나중에 케이투(K2)라는 팝록 프로젝트로 대중과 더 깊은 호흡을 나누게 된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 역시 ‘사랑과 우정 사이’에 반해 피노키오 1집을 샀고 그 1집을 닳듯이 들었다. 물론 나는 김성면이 작사, 작곡한 같은 앨범 속 ‘어느 가을날의 시’를 더 좋아했지만 그래도 ‘사랑과 우정 사이’를 더 많이 듣고 따라 부른 건 어쩔 수 없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너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가슴 벅찬 노랫말과 멜로디, 그 유리알 같은 노랫말을 깨질세라 감싸며 불렀던 김성면의 섬세한 목소리는 당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이후 군입대 한 김성면은 ‘잃어버린 너’와 ‘슬프도록 아름다운’이 담긴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 K2 1집을 군에 있으면서 대중에게 선물했고, 앨범은 30만장 이상이 팔리며 ‘사랑과 우정 사이’의 여파 또는 그 곡을 부른 김성면의 가치가 한때의 인기가 아님을 증명했다.
2020년 5월 26일. 내가 머물고 있는 경남 진주에 잠시 들른 K2 김성면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특정 세대에게 특별한 감정(혹은 감성)을 선물한 그 시절 스타 가수에게 나는 20년 이상 길을 잃었던 질문들을 하나씩 건넸다. 그는 생각보다 밝은 사람이었고 달변이었으며 그만큼 힘든 시기도 겪은 터였다. 어려도 너무 어렸던 나의 90년대 초반을 장식해준 고마운 사람 김성면. 그를 만났다.
김성대(이하 ‘김’): 처음 음악을 접한 기억,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부터 들어보자.
김성면(이하 ‘K2’): 여의도 고등학교를 나왔다. 남녀공학이었는데 축제 기간 강당에서 한해 선배들이 공연하는 모습, 또래들이 라이브 반주로 음악 하는 걸 처음 듣고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드럼 치면서 노래 불렀던 오석준 형을 보며 밴드를 해보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짝궁이 민방위 훈련 사이렌이 울리면 지하도에 앰프를 갖다 놓고 기타 연습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너 기타 쳐? 난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한다, 그렇게 생애 첫 오디션을 아파트 옥상에서 치렀다. 당시 나는 내 목소리 키(key)가 높은 줄 몰랐는데 마그마의 ‘해야’를 불렀더니 친구가 “너 키가 굉장히 높구나” 그렇게 같이 하자 해서 시작하게 됐다. 그 친구와 밴드를 했을 땐 잘 나가는 1진 밴드들이 이미 있었고 우린 2진에 가까운 팀이었다. 그렇게 1진과 섞여 밴드 생활을 해나갔다. 블랙 신드롬, 시나위, 백두산 같은 1세대 헤비메탈 밴드들이 종로 파고다 예술극장에서 활동하던 시절 얘기다.
김: 초기엔 카피도 많이 했을 건데 주로 어떤 음악을 했나.
K2: 잉베이 말름스틴, 머틀리 크루, 건스 앤 로지스 등을 카피 했다. 블랙 사바스와 주다스 프리스트도 했던 기억이 난다.
김: 아이언 로즈(철장미)라는 헤비메탈 밴드 보컬로 활동했다. 1988년도 컴필레이션 앨범 [Friday Afternoon 34.55Min]엔 ’Rain(비야)’이라는 곡을 수록하기도 했는데. 당시 음악을 전업으로 생각한 건가.
K2: 전업으로는 생각 안 했다. 사실 제가 중학교 때까진 공부를 잘 한 편이었다. 반장, 회장도 번갈아가며 지냈고.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께 “이대로만 가면 성면이는 서울대에도 무난히 들어갈 것”이라며 보다 나은 학군인 여의도 쪽을 추천해주셨다. 그렇게 여의도 고등학교엘 간 건데, 결국 난 아버지 몰래 음악을 계속 한 것이다. 그러면서 팬들도 생기고 이렇게 나가는 게 내 인생에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끝내 대학에 가서도 나래(NARAE)라는 락동아리에 들어갔고 후배들은 제가 작곡한 곡으로 경연대회에 나가곤 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노래 쪽을 더 깊이 파고 싶어 통기타 서클에 들어갔다. 어쩌면 극(헤비메탈)과 극(포크)의 음악을 거치며 지금의 목소리가 만들어진 셈이다.
김: 20대 초반 때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걸로 들었다. 그래서 음악 노선도 바꾼 것으로 아는데. 혹 부친 일이 아니었다면 계속 헤비메탈을 했을 건가.
K2: 그건 아니다. 그땐 헤비메탈이 유행하던 시절이어서 즐겨 듣고 부른 거다. 어릴 때 난 차라리 팝송을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부엌에서 라디오를 틀어두고 일을 하셨는데 어느날 낵(The Knack)의 ‘My Sharona’가 흘러나왔다. 가슴이 뛰었고 그 이후로 스스로 주파수를 찾아가며 열심히 팝을 듣기 시작했다. 중학교 땐 아바도 좋아했다.
김: 1992년 피노키오에 객원 보컬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뮤지션 삶이 시작됐다.
K2: 말씀하신 것처럼 22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돼야 했다. 일단 인디를 벗어나 오버로 진출해 집에 보탬을 주고 군대를 가야겠다 생각해 피노키오에 합류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나는 나중에 솔로 활동을 할 계획이니 앨범 한 장에만 객원으로 참여하겠다는 거였다.
김: 케이투(K2)의 서막이 임박했던 시점이다.
K2: 피노키오 활동이 끝날 때쯤 멤버들이 다 나왔다. 나와 함께 곡을 쓴 안정훈은 포지션을 만들었고 나는 K2를 만들었다. 기타를 맡았던 안정훈이 나가고 피노키오 마지막 활동은 이태섭과 함께 했다. 그런데 막판에 합류시켜 미안해지더라. 그래서 K2까지 함께 하게 된 거다. 그렇게 피노키오 1집 활동을 끝내고 군대를 갔다. 56사단 군악대에서 18개월 복무 했는데 퇴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K2 1집 녹음을 병행, 발매까지 할 수 있었다.
김: 사람들은 보통 김성면을 보컬리스트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나에게 김성면은 ‘어느 가을날의 시’를 쓴 엄연한 싱어송라이터였다. ‘나’나 ‘별.밤 그리고…’ 같은 곡도 공동 작곡을 했고. 혹시 작곡 공부는 따로 한 건가.
K2: 따로 한 건 없다. 그땐 지금처럼 실용음악과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라, 제가 아는 모 뮤지션은 그래서 국악과엘 다녔었다. 그냥 노래하며 자연스럽게 곡을 쓰게 됐다.
김: 중학생이었던 나는 피노키오 1집에서 ‘어느 가을날의 시’와 ‘다시 만난 너에게’를 특히 좋아했다.
K2: ‘다시 만난 너에게’는 사연이 있는 곡인데, 당시 소속사에서 드라마 ‘질투’ 주제가 같은 걸 만들어야 된다(뜬다)고 했다. 나름 락커(Rocker)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멤버들은 싫다고 했지만 소속사 대표의 말을 마냥 거스를 순 없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만든 노래가 ‘다시 만난 너에게’다. 가사는 팬들이 보낸 편지들 중 괜찮은 문구들을 발췌 정리해 내가 쓴 것이고 '그리움에~'로 시작하는 마지막 코러스는 창작이다.
김: ‘어느 가을날의 시’는 어떻게 쓴 건가.
K2: 건반 쳤던 이은호라는 친구가 연주하던 어떤 팝송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 K2 1집 곡 ‘슬프도록 아름다운’도 피노키오 연습실에서 안정훈이 연습 후 혼자 건반으로 팝송을 치고 있는 걸 듣다 ‘어 잠깐만’ 하며 떠오른 첫 구절을 발전시킨 것이다.
김: ‘사랑과 우정 사이’를 쓴 오태호씨 말에 따르면 이 곡은 원래 김민우씨 3집 앨범 데모곡으로 주었다 거절 당한 뒤 평소 친분이 있었던 김성면씨가 합류한 피노키오 앨범에 선물로 준 곡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당시 기획사 측과 다른 멤버들이 이 곡을 썩 탐탁지 않게 여겼다 들었는데.
K2: 그게 오태호씨가 보낸 원본이 워크맨(walkman, 일본 소니사가 1979년 7월 1일에 첫 발매한 세계 최초 소형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 겸 플레이어-필자주)으로 녹음한 통기타 데모 버전이어서 그랬던 거다. 멜로디와 가사의 중요도를 늘 5:5로 생각해온 저로선 ‘사랑과 우정 사이’는 가사도 좋고 편곡만 잘 하면 무조건 될 곡으로 들렸다. 참고로 ‘사랑과 우정 사이’를 사람들이 ‘원조 차트 역주행송’이라 부르는 이유는 곡을 발표하고 2년이 지난 1994년도에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 1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김: 95년, 드디어 K2의 시대가 열린다. 함께 한 이태섭은 앞서 말한 88년도 컴필레이션에서 안면을 텄을 아발란쉬의 기타리스트였다.
K2: 맞다. 말씀드렸듯 이태섭은 K2 이전 포지션을 결성한 안정훈 대신 피노키오 1집 활동 때도 기타리스트로 함께 했다. 주위에선 10만장 이상 판매가 힘들 거라 예상한 K2 데뷔작은 그 예상들을 뒤엎고 결국 30만장이 나갔다.
김: ‘K2’의 뜻은 무엇인가.
K2: 듀스, 서태지 등 짧은 이름들이 유행했던 당시 나도 피노키오보다 짧은 이름을 찾던 차에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지만 가장 오르기 힘든 봉우리는 K2”라는 한 친구의 말을 들었다. 멋진 말이었고, 나도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나만의 봉우리를 갖고 싶단 생각으로 K2를 팀 이름으로 쓰게 됐다.
김: 대중은 ‘잃어버린 너’ ‘슬프도록 아름다운’ 같은 발라드를 좋아했지만 록 마니아들은 ‘Mornin’ After’ ‘황금제국’ 같은 헤비메탈 트랙도 반겼다.
K2: 두 곡은 모두 이태섭이 썼다. 특히 ‘Mornin’ After’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보고 쓴 가사인데, 가사 쓴 이가 제 군대 고참이었다. 경희대학교 체육대학 태권도 학과에 다녔던 김형수라는 인물로, 글을 썼던 사람이다. 그는 이 곡으로 작사가 데뷔를 해 이후 정경화의 ‘나에게로의 초대’를 썼고 김민종의 ‘널 위한 나’를 저와 공동 작사 했다.
김: 3집 ‘그녀의 연인에게’ ‘유리의 성’을 히트시키고 2000년 영화 [가위] OST, 2001년 드라마 <그 여자네 집> 삽입곡 ‘하나 뿐인 사랑’ 등으로 활동하며 3년을 보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때에 조금 의아한 공백기였다.
K2: 피노키오 때와 K2 때 모두 소속사로부터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 그렇게 엄청난 인기를 누린 ‘사랑과 우정사이’도 나에겐 10원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K2 때도 여의도 고등학교 3년 후배 손지창 등 소속 가수들이 다 떠날 때 난 혼자 의리 지키려다 손해를 봤다. 그래서 2002년도에 친동생과 새로 회사를 차렸고 거기서 3.5집 [Time To Time]과 4집 [Sweet Storm]을 따로 냈다.
김: 하지만 ‘헤이 유’와 ‘사랑을 드려요’라는 킬링 트랙들이 있었음에도 시기 탓이었는지 4집은 이전에 비해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K2: 앨범 완성도에 욕심을 내 1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였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참여 라인업만 봐도 강현민(일기예보, 러브홀릭)을 비롯해 기타리스트 김세황(넥스트)과 함춘호, 이상순(롤러코스터)과 이근형, 드러머 강수호와 이수용, 베이시스트 이태윤과 김영석, 신현권, 키보디스트 이현석, 최태완, 표건수, 작사가 강은경, 조은희였는데. 돌이켜보면 경제적 문제로 앨범 홍보를 전혀 못한 탓이 컸다. (김성면은 2008년 파산 신청을 했고, 이듬해 법원으로부터 면책 결정을 받았다-필자주)
김: 4집 참여진에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의 이름이 보인다. 넥스트와 친했나보다.
K2: 4집 때 노바소닉이 나와 함께 활동을 해줬다. 이들과는 친했지만 고 신해철 씨와는 따로 친분은 없었다. 물론 나중에 그의 추모 콘서트에는 함께 했다.
김: 히트곡들 외 성면씨가 특히 아끼는 K2 곡들이 있다면.
K2: 4집에 있는 모든 곡들을 아낀다. 3집도 마찬가지. 기본적으로 저는 다른 가수들보다 2~3배 공들여 앨범을 제작해왔다고 자부하는 쪽이다. 그 결과는 어땠는지 모를 일이지만.
김: 1집 ‘잃어버린 너’와 ’슬프도록 아름다운’ 2집 ‘그들만의 슬픔’과 ‘소유하지 않은 사랑’, '재회' 3집 ‘그녀의 연인에게’와 ‘유리의 성’까지 K2 1~3집 시기, 그러니까 95년부터 99년까진 말 그대로 김성면의 전성기였다. 한 달에 축제 무대만 30번 이상, 그래서 ‘대학가의 H.O.T.’로 불린 것도 그래서다. 되돌아보면 그 시절,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K2: 제가 대학가 축제 문화를 바꾼 게 뭐냐면 다른 가수들이 2~3곡 부를 때 저는 이 관객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1시간을 불렀다는 거다. 그게 부질없는 짓은 아니었구나 생각이 드는 건 4년 전 JTBC ‘투유 프로젝트-슈가맨’ 출연 뒤 영상 아래 “우리 학교 축제에 왔을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같은 댓글들을 봤기 때문이다. 보면서 스스로도 뭉클해 눈물을 흘렸는데, 제대로 활동 안 한지 10여 년이 됐는데도 아직 절 기억해주시는 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김: 그리고 여태껏 5집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물론 2007년 드라마 ‘일단뛰어’에서 ‘너무나 아프다’, 디지털 싱글 ‘해원가(解寃歌)’, 2017년 디지털 싱글 ‘눈빛만 들려’와 ‘친구끝 연인 시작’, 지난해 에메랄드 캐슬과 함께 발표한 ’가장가’와 ‘그녀의 연인에게’를 쓴 김윤식 작곡가에게 15년 전 받은 ’외치다’ 싱글 정도는 발표했지만. 이 공백 아닌 공백을 언제쯤 깰 예정인가.
K2: 일단 ‘땡큐’라는 싱글을 한 장 더 내고 신곡을 포함한 베스트 앨범(기존 곡들을 새로 부르고 다시 편곡한)을 LP와 음원으로 발표할 계획이다. 5집은 그 다음이다.
김: 목 관리는 따로 하고 있는지.
K2: 목을 오래 푸는 편이다. 축가 한 곡을 부를 때도 2~3일 전부터 목을 풀기 시작하고 콘서트가 있으면 한 달 전부터 술을 끊는다. 나는 내가 마음에 들 때까지 부르고 또 부른다. K2 3집까지, 서울스튜디오에서 작업할 때 길게 부를 땐 18~20시간까지도 불렀다. ‘슬프도록 아름다운’의 경우엔 14시간을 불렀던 기억이 난다. 방송 출연 때도 1시간 반 정도 목을 풀고 음향 리허설을 끝내고 다시 대기실에서 3시간 정도 목을 푼 뒤 카메라 리허설을 끝낸다. 그 뒤에도 계속 목을 풀다 비로소 본방 무대에 선다. 노바소닉과 4집 활동 할 때 베이스 치는 김영석은 그런 절 보고 “목 좀 그만 풀어라” 할 정도였다.(웃음)
김: 아시다시피 김성면씨의 노래는 90년대 노래방붐을 타고 당시 남성들, 정확히는 10~20대 남학생들이 특히 많이 따라 불렀다. ‘케사사(K2를 사랑하는 사람들)’라는 팬클럽과 더불어 당신을 좋아했고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K2: ‘외치다’ 가사에도 나오듯 그간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을 잘 견뎌냈으니까 이젠 무대와 음악에만 신경쓰며 살고 싶다. 다른 것들까지 신경써야했던 과거는 떨쳐내고, 좋은 음악 좋은 무대 만드는 일에만 매진하고 싶다. 그렇게 팬들과 소통하고 그런 팬들과 세상에 선한 역할(자선)을 해나가는 일도 이루고 싶은 바람 중 하나다. 참고로 오는 7월 17일엔 에메랄드 캐슬과 함께 경남 사천 락 페스티벌 무대에 서고, 11월 21일엔 경상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단독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많은 성원, 관심 부탁드린다.
*사진=(주)성우 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