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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Jul 02. 2020

삶과 시간을 노래하다

텔레플라이 3집 [그랬고, 그렇게 언제나]

힌두교와 불교의 '만다라'가 보이는 텔레플라이 3집 앨범 커버. 프론트맨 김인후의 작품이다.


세 번째 앨범이다. 척박한 씬에서 대중이 잘 모르거나 어려워하는 음악을 하며 여기까지 온 텔레플라이에게 일단 조건없는 응원의 박수를 먼저 보낸다. 솔직히 말해 1집은 그들의 색을 내기엔 어딘가 모자랐고, 2013년 미니앨범 [Avalokitesvara]도 주제 면에선 그들다웠지만 음악에선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훈수'가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들의 진짜 시작은 2집 [무릉도원]부터였을지 모른다. 이 작품에서 텔레플라이 또는 김인후(보컬, 기타, 작사/곡)는 그야말로 자신이 추구했던 사상과 장르를 가장 주체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해냈었다. 당시 이들이 앨범의 출처에 괜히 ‘자체제작’을 첨부하진 않았을 터. 결국 그 표기는 ‘이 앨범부터가 진정한 우리 음악’이라는 선언과 같았다. 이어 이듬해 낸 두 번째 미니앨범 [달빛에 눈먼 자들]은 더 무르익고 절제된 블루스 록을 들려주며 텔레플라이라는 밴드가 자신들의 색깔 혹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또 다른 출발선에 섰다는 걸 예감케 했다. 그리고 이번 3집은 바로 그 예감에 대한 걸출한 자기증명처럼 들린다.


음반을 걸면 ‘워크맨’이라는 곡이 LP의 검은 침묵을 가장 먼저 깬다. 이들 음악에 사이키델릭이라는 단서를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근거가 될 아지랑이 같은 기타 인트로 이후 조금은 낯선 관악기가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서양의 피리 플룻이다. 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연주는 플루티스트 김수환의 솜씨로, 한 내성적인 아이(김인후)가 어머니가 사주신 워크맨으로 꿈과 행복을 탐닉한 시절 느낀 설렘을 정처없이 흐르는 멜로디에 잘 녹여내고 있다. 이 플룻 연주는 곡 중후반에서 완전히 다른 서정적 기류를 형성하는 실로폰 같은 멜로디 훅과 함께 곡에 살가움을 더했다. 또 김인후가 막판에 짧게 도발한 기타의 몸서리는 톰 모렐로를 좋아한 자신의 과거를 듣는 이들이 슬쩍 엿볼 수 있게 한 기억의 단면처럼 보인다. 드러머 오형석이 이끄는 곡의 전체 리듬은 이전에도 이들이 즐겨한 레게 느낌에 간간이 아프리칸 스타일도 뒤섞여 천천히 출렁인다.(이 느낌은 맥락은 조금 달라도 나중 곡 ‘너의 미소를 보여줘!’에까지 이어진다.) 허정현이 시작부터 제시한 베이스 프레이즈는 얼핏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1991년에 연주한 ‘Mellowship Slinky In B Major’라는 곡을 떠올리게 한다. 레게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 자유롭고 흥겨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눈치 챘겠지만 이 앨범은 김인후의 자기 고백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내지는 방식에 관한 생각을 노래한 ‘그림자’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곡들이 김인후의 경험, 그가 처했던 상황을 다뤘다. 두 번째 곡 ‘나도 알아’도 마찬가지다. 김인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나도 알아’의 영문 제목은 바로 ‘Blues For Me’. 영원할 것 같던 친구도 사랑도 신념도 결국 순간에 불과해 세월에 따라 변해갈 수 밖에 없음을 말한 이 곡의 기타 연주에서 우리는 웨스 몽고메리와 조 패스, 찰리 정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김인후가 말한 “모두의 블루스”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웃게 만드는 좋은 사람들을 김인후 역시도 자신의 힘(음악)으로 웃게 만들고 싶다는 ‘너의 미소를 보여줘!’는 제목처럼 발랄한 프레이즈로 듣는 사람을 미소짓게 만든다. 으쓱거리는 레게 리듬을 찢고 신중하게 터져나오는 김인후의 기타 솔로는 그의 말처럼 내밀한 정수만을 추구하는 바둑의 한 수를 연상시킨다. 이런 그의 블루스에선 하울링 울프나 지지탑, 로버트 크레이의 느낌보단 앨버트 콜린스가 ‘Cold Cold Feeling’ 같은 곡에서 들려준 정서가 더 진하게 묻어난다. 이 곡은 김인후가 이번 앨범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녹음한 트랙으로 알려져 있다.  


‘별을 따라간 소년’의 또 다른 제목은 ‘B612’인데 그 유명한 어린왕자가 사는 소행성이다. 김인후가 “꿈과 잠재력이 가득했던 시기, 성장이라는 고통에 잘 적응하지못해 일어난 반작용이 이상한 낙천성으로 자리한 때를 노래했”다고 밝힌 이 곡은 앨범에서 가장 재지한 지점으로, 드럼과 베이스가 지탱하는 텅빈 공간감과 김인후의 기타 솔로로 확인되는 꽉찬 기타 톤이 편안한 대비를 이루며 곡을 반투명으로 만든다. 중간에 더해진 김인후의 허허로운 휘파람이 가장 개인적인 속사정을 다룬 곡임을 조용히 암시하고 있다.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기타 솔로가 하릴없이 지미 헨드릭스의 ‘Little Wing’을 떠올리게 하는 ‘주책없는 눈물’은 “어느 가을날 종로의 포장마차”라는 구체적인 장소 설명에 ‘Dear Friend’라는 영어 제목이 겹치면서 자연스레 ‘친구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주책없이 흘린 눈물’을 추억한 곡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곡에는 이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타 솔로가 숨어 있는데, 왈츠로 템포가 바뀌는 후반부에서 그 솔로는 기탄없이 펼쳐진다.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슬프면서 아름다운 멜로디 연주로, 때문에 들으며 ‘좀 더 길었으면’ 한 바람이 있었다.


다음 트랙은 ‘그림자’로 남과 나를 볼 때 되도록 같은 기준, 그러니까 태양과 달빛 어디에도 스미는 그림자를 바라보면 결국 남는 건 각자 주장과 입장, 사연 뿐이라는 주장을 담은 곡이다. 슬라이드 바로 힘차게 문을 여는 이 곡은 덕분에 앨범에서 가장 정통 블루스에 가까운 넘버로 들린다. 이는 스튜디오 합주로 원테이크 녹음을 지향한 밴드의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기도 한데, 역시 곡 중반부를 달구는 김인후의 후련한 기타 솔로가 마지막 거친 리프 톤과 더불어 트랙의 숨통을 터주고 있다.


끝으로 김인후가 자신의 신념이라고 밝힌 ‘흐르는 강물처럼’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가져온 한 구절(대성약결기용불폐, 大成若缺 其用不弊) 즉, 크게 이룬 것은 모자란 듯 보여도 그 쓰임은 끝이 없다는 말을 지난 앨범의 곡 ‘블루스의 왕(King Of The Blues)’과 결부시켜 이야기를 풀어가는 트랙이다. 영어 제목처럼 이 곡을 통해 그는 블루스의 왕을 넘어 블루스와 '불멸(lmmortality)' 하리라는 “신의 영역”을 음악으로 토해낸 듯 보인다. 김인후와 텔레플라이가 늘 천착해온 동양사상 아래 날것의 호연지기가 그야말로 강물 같은 기타 연주를 타고 나풀나풀 흘러간다.


언젠가 한 심리학자는 “좋은 음악은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익숙한 음과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음이 서로 조화롭게 중첩돼 음악의 전체 의미를 듣는 이의 내면에서 솟아오르게 만든다”고 했다. 텔레플라이의 3집이 그런 음악이다. 익숙하되 생소하고 겉의 의미는 깊은 내면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이들의 음악은 항상 “그랬고, 그렇게 언제나”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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