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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Sep 16. 2020

가을방학의 음악적 정점

가을방학 [세상은 한 장의 손수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창궐로 마냥 푸르고 높을 수만은 없는 2020년 가을 하늘. 그 하늘 아래 세상을 방학이라 부르는 인디팝 듀오가 돌아왔다. 다정한 멜로디, 정교한 편곡, 생활 속 망상에서 건져올린 비범한 가사.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모든 게 그대로인 그 음악이 전염병으로 멈춰선 세상을 향해 나지막히 미소를 건네 온다. 가을방학의 네 번째 앨범이다.


가을방학은 하나의 브랜드다. 그들은 비치 보이스와 스피츠, 틴에이지 팬클럽의 팝 여운을 벗삼아 언제나 가을방학다운 음악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 안엔 평범한 듯 특별한 일상이 있고 어느 시절 아련한 추억이 있으며, 세상이 꺼져버릴 듯 아쉬운 이별도 있다. 그런 그들 음악의 정서는 그리움, 회상, 슬픔이다. ‘아픈 건 이쪽인데요’를 설명하며 계피가 말했듯 “슬픈 가사와 밝은 리듬이 주는 간극을 통한 아이러니”를 머금은 가을방학의 음악은 그래서 듣는 사람이 신나게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가을방학을 듣는다는 건 내 마음이 따뜻해질 준비가 됐거나 내 가슴이 무너질 준비가 되었다는 말과 같다. 과거 ‘근황’의 노랫말처럼 “만남이라는 사치를 누리다 헤어짐이라는 오만을 부린 우리”는 그래서 모두 가을방학 음악의 그늘 아래 발 하나쯤은 걸치고 있는 것이다.


가을방학 음반들은 늘 잘 만든 팝 앨범이었다. 탁월한 팝 감각을 지닌 송라이터 정바비 덕분이다. 그런 정바비가 이젠 공연을 등진 채 곡 쓰고 다듬는 일(스튜디오 멤버)에만 전념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무대에서 그 곡을 소개하고 알리는 일은 이제 계피의 몫이다. 그래서일까. 애덤 스미스가 244년 전 주목한 ‘분업’의 미덕이 가을방학의 정책으로 자리 잡은 뒤 나온 첫 앨범은 범상치 않다. 늘 비슷했지만 그럼에도 달랐던 가을방학의 음악이 한 차례 정리되는 느낌이라면 맞을지. 정바비와 계피는 5년 만의 신보에 자신들 역량과 열정을 모두 쏟아 부은 모습이다.



역시 가을방학 하면 멜로디다. 희망을 노래한 첫 곡 ‘새파랑’부터 싱글 ‘루프탑’과 함께 리마스터링을 거친 ‘그대로, 그대로’까지 여섯 트랙을 흐르는 사이 멜로디는 한 순간도 음악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다. “세상 좁다”는 뜻의 스페인 관용구를 제목으로 쓴 ‘세상은 한 장의 손수건’에서 정바비는 숨 쉬듯 코드를 선택하고 음표를 그려나가는 자신만의 음악적 경지를 보여준다. 은근한 유행처럼 최근 국내 팝 앨범들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윤상 식 90년대 감성을 훔친 ‘끝말잊기’에서도 그는 듣는 사람들이 짐작한대로 보컬 멜로디를 순수하게 또는 순순히 써내려 간다. 설익은 이별과 농익은 이별 모두에 바치는 ‘끝말잊기’는 1집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와 2집의 ‘잘 있지 말아요’, 3집의 ‘사하’를 잇는 4집의 킬링 트랙이다.


물론 그런 멜로디를 가사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냐면 그건 또 아니다. 시(詩)를 위한 소재 선택에서 정바비는 대한민국 인디 음악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인물. 두 번째 곡 ‘설탕옷’의 경우 그는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블랙 커피와 설탕이라는 향긋한 비유로 달콤쌉싸름한 사랑 고백을 해낸다. “종점이 누군가에겐 첫 역임을” 알고 “졸업장 없는 졸업”도 있다고 노래하는 ‘사랑없는 팬클럽’에서도 작사가 정바비의 섬세함은 고스란히 드러나며, 독서인지 정리인지 모를 “꽂아둔 순서만 바꾸는” 책 정리 시간을 노래한 ‘한 권도 줄지 않는 정리의 마법’은 누가 들어도 ‘동거’나 ‘좋은 아침이야, 점심을 먹자’류의 정바비식 생활 관찰 일기다. 아프리카의 사막(‘나미브’)과 스페인의 성주간(聖週間, Semana Santa)을 가사로 옮긴 정바비는 소박한 왈츠 곡 ‘아픈 건 이쪽인데요’도 슬프고 재밌게 공감할 수 있는 이별 이야기로 막힘없이 풀어낸다. 마치 9와 숫자들의 ‘엘리스의 섬’처럼, ‘나미브’는 음악 없이도 그 존재감을 뽐낼 수 있는 그 자체 한 편의 잘 쓴 시다.



미니앨범 ‘실내악 외출’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가을방학이 편곡에도 얼만큼 공을 들이는지도 알 거다. 단순히 플룻과 클라리넷, 콘트라베이스를 활용해 흥미롭다는 게 아니라 곡 끝에 여행스케치 같은 “빈티지 코러스”를 넣은 ‘설탕옷’처럼 어떻게 해야 해당 곡을 오롯이 완전체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디테일 차원에서 편곡의 무게감이다. 이번 작품에선 싱어송라이터 홍갑과 건반주자 고경천(고경천은 이 앨범의 공동 프로듀서이기도 하다)이 힘을 보탰는데, 홍갑은 짙은을 초대해 보사노바 명인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을 오마주 한 ‘반얀나무 아래’에서 자기 몫을 다했고, 고경천은 끝말 잇기로 끝말(이별)을 잊어보려는 ‘끝말잊기’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고경천은 ‘새파랑’과 ‘반얀나무 아래’에서 멋진 건반 솔로도 들려준다.


그렇게 2020년의 가을방학은 언제나처럼, 그때 그, 내가 알고 당신이 아는 그 모습 그대로인 음악을 들고 다시 우리 곁을 찾았다. 따뜻하고 소박한, 그러면서 슬픈 일상의 팝 사운드. 굳이 단어 하나를 더 수식 하자면 그것은 여지껏 들어온 가을방학 작품들 중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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