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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ug 03. 2020

곽윤찬 [i am Melody Vol.2]



하나님은 음악에 삼위일체 개념을 심어놓으셨어요. 삼화음이 그것이죠. 그런데 찬송가는 왜 사성부(소프라노, 알토 등)일까요. 세 파트는 하나님의, 나머지 한 파트는 우리 몫이에요. 하나님은 멜로디 부분을 맡기실 거 같아요. 우리를 쓰시고 드러내길 원하시니까요. 드러나는 나(멜로디), 대문자로 Melody죠. 쓰임 받으려면? 겸손해야죠. 그래서 나를 소문자로 쓴 거예요.

곽윤찬 (<국민일보> 2010년 5월23일자 인터뷰 인용) 


음악은 벙어리다. 음악은 말(言)이 없기 때문에 말과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평화롭다. 말이 없어 자유롭다. 말은 오해와 갈등, 분쟁과 구속을 동반한다. 말은 일방적일 때 단정짓거나 명령 또는 폭력이 된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정치와 종교를 통해 긴 시간 목격하고 또 경험해왔다. 대화와 말은 다른 것이다. 하나는 둘 이상의 말이고 또 하나는 혼자의(말 그대로) 말이다. 하물며 음악과 말이 어떻게 같겠는가. 나는 곽윤찬의 이 앨범이 벙어리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들어가는 말이 길었다. 나는 이 앨범이 잘 들리지 않는다. 음악보다 말이 너무 많은 앨범이다.


이 앨범은 두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여러 보컬들을 통한 곽윤찬의 음악적 실험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찬송가를 통한 곽윤찬(과 친구들)의 신앙고백일 것이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 그의 실력에 무슨 토를 달랴. 나는 다만 그의 음악이 종교적인 말들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아 안타까웠을 뿐이다. 무릇 음악이란 곡조로 하는 대화라고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종교의 말은 대화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겐 거부할 수 없고 거역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곽윤찬 같은 크리스찬이라면 진리가 담긴 이 앨범이 매우 만족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곽윤찬의 음악과 대화를 하고 싶은 비(非)크리스찬들에겐 게스트들의 가슴 벅찬 찬양이 그저 음악 청취를 방해하는 잡음이 될 수도 있다. 과연 이 앨범은 누구를 위한 앨범인가. 



나는 약한 자에게 힘을 주는 재즈가 좋다 

곽윤찬


동의한다. 나도 그런 곽윤찬의 재즈를 좋아했고 그 재즈를 듣고 싶었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재즈의 화음은 신의 위로다" "재즈의 악센트는 신의 은총이다"에서 나는 민망해졌다. 이 앨범은 결국 약한 자에게 힘을 주는 재즈가 아니라 어린 양을 구원하는 신의 위로인 셈이다. 곽윤찬이 크리스찬이라는 것과 자신의 앨범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건 온전히 그의 자유다. 다만 그 정서를 공유할 수 없는 순수 음악팬들에게 이 앨범은 조금(또는 매우) 불편하게 다가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 글은 시작됐다. 


사실 그닥 공감할 수 없는 말들을 헤집고 겨우겨우 걸러 들은 음악은 거의 완벽에 가깝다. 용병 세션들의 리듬과 코러스는 섬세하고 세련됐다. 드문드문 때론 활기찬 곽윤찬의 피아노는 명불허전이며 그가 프로듀서로서 뽑아낸 사운드는 발군이다. 다만 '주'를 찬양하는 저 일방적인 말들은 자꾸만 기독교인이 아닌 내 귀를 괴롭힌다. 나얼, 다이나믹 듀오, 버블 시스터즈, 김범수, 박지윤, 조승우 씩이나 불러 놓고 왜 그는 굳이 음악적 고해성사를 한 것일까. 그 속마음 알 길이 없지만,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자유이지만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곽윤찬이라는 이름을 보고 앨범을 산 재즈팬들이 음악을 음악으로만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이 앨범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자 단점일 것이다. 


고백컨대 이 앨범에서 내가 듣고 만족한 유일한 음악은 말이 없는 끝 곡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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