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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Sep 14. 2020

블러와 오아시스를 통해 본 브릿팝 연대기

이경준 <블러, 오아시스>


블러와 오아시는 다르다. 세상이 그들을 ‘라이벌’로 기억하는 건 한 시대 특정 음악 경향을 함께 선두에서 이끌었기 때문이지, 두 팀의 음악이 비슷했기 때문은 아니다. 핑크 플로이드와 매드니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과 휴먼 리그에 일렉트로닉, 힙합, 덥(Dub), 월드뮤직을 입힌 블러의 퓨전 팝과 레드 제플린에 섹스 피스톨스, 라스(The La’s)와 스미스(The Smiths), 마크 볼란을 덧칠한 오아시스의 로큰롤 펑크는 아예 뿌리부터 달랐다. 심지어 같은 펑크를 좋아해도 블러는 클래쉬를, 오아시스는 잼(The Jam)을 편애 했으니. 두 팀의 레퍼런스에서 그나마 겹치는 부분이라면 비틀스와 킹크스, 스톤 로지스 정도였다. 블러와 오아시스의 음악을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소닉 유스에 영향 받은 너바나와 헬멧(Helmet)을 동경한 실버체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쨌거나 90년대는 얼터너티브 록, 그러니까 미국의 그런지와 영국의 브릿팝 시대였다. 물론 그런지(Grunge)라는 단순 범주로 싸잡아 얘기할 순 없지만 북미엔 너바나를 비롯한 이른바 ‘시애틀 4인방(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가든)’과 스매싱 펌킨스, 스톤 템플 파일럿츠, 컬렉티브 소울 같은 밴드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영국에선 마찬가지로 음악 색은 다르지만 같은 시대를 걸은 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 펄프, 라디오헤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같은 밴드들이 90년대 월드 록의 반쪽을 책임지고 있었다.


책 ‘블러, 오아시스’는 그 중 브릿팝 신을 주목, 필드를 이끈 아이콘들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두 팀의 역사를 통해 브릿팝의 연대기를 추적한 책이다. 셰드 세븐, 엘라스티카, 샬라탄스, 맨선 같은 동시대 밴드들과 트래비스, 콜드플레이 같은 포스트 브릿팝 팀들이 함께 다뤄지는 건 그래서다. 책 제목에 경쟁 구도(블러 VS 오아시스) 대신 쉼표(블러, 오아시스)를 붙인 것은 설령 그러한 설명이 곁들여 졌더라도 이 책이 무조건 두 공룡 밴드의 대결과 승패에만 주목하지 않겠다는 작은 암시같은 것이다.


무릇 글이라는 건 글쓴이의 끈기 있는 취재와 지난한 고찰을 거쳐야 비로소 단단해질 수 있다. 그런 단단한 문장들이 모여 빈틈 없는 문단이 되고, 그 문단들이 또 챕터를 이뤄 비로소 책 한 권이 된다. 이는 음악도 마찬가지여서 창작자의 학습과 주관, 의지와 취향이 치열히 반영 될 때 비로소 세상에 없던 새로운 소리 세계를 펼쳐낼 수 있다. 이처럼 기존 것으로부터 자신만의 결과물을 끄집어 낸다는 점에서 집필과 작곡은 다른 듯 닮았다.



그래서 저자 이경준은 글로 작곡을 하는 이야기꾼이다. ‘애서가’로서 오랜 독서를 통해 다졌을 단단한 문장력으로 그는 90년대 브릿팝을 조합하고 또 해체한다. 그는 이 책에서 브릿팝 관련 원서들과 잡지, DVD와 음반, 인터넷 기사라는 서말 구슬을 두루 꿴 뒤 그 위에(거의 스포츠 중계에 가까운) 자신만의 해석을 얹어 독자적 비평을 펴냈다. 확신에 찬 단문으로 치고 나가는 그의 글엔 일말의 망설임이나 군더더기가 없다. 저자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추상적 인상 비평, 주관적 개똥 철학을 지양하고 다양한 인용과 통찰에 기반한 구체적 분석들로 두 밴드, 그리고 브릿팝의 역사를 조명한다. 그의 글에서 구어체와 문어체는 상극이 아니며, 그 구수한 ‘썰’은 번잡한 장광설보단 압축적 촌철살인 쪽에 더 기울어 있다.


물론 나는 당시 현지 평단과 이 책의 저자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은 오아시스 3집을 좋아라 하고, 블러 작품들 중엔 3, 4집에 비해 ‘범작’으로 간주된 셀프타이틀 앨범을 가장 즐겨 듣는다. 그러니까 비록 곡이 길어도 나는 세 번째 오아시스가 담지한 멜랑콜리가 좋고 그레이엄 콕슨이 주도한 블러 5집, 나아가 데이먼이 주도한 ‘Think Tank’의 실험성을 함께 지지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저자는 블러 ‘대’ 오아시스를 상정해 식상하고 해묵은 대립 양상만 논하기 보다 차라리 저 두 밴드에 관한 독자의 추억과 취향의 깊이를 건드려 읽는 자들이 그 시절에 나름의 해석을 가하게 하는 데 집필의 의의를 둔 느낌이다. 이는 책이라는 매체가 저자, 독자 사이 ‘간접 대화’를 주선하고 나아가 독자의 ‘비판적 해석’이 뒤따를 때 비로소 그 책이 완성된다는 오래된 통념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덕분에 잊고 지냈던 브릿팝 앨범들을 실컷 들었다. 글 사이사이 언급된 비교적 오래된 팀들의 음악도 수 십 년 리스너로 살아온 내 지난 날을 반추하기에 충분했다. 책의 두 주인공인 오아시스와 블러는 따로 전작을 펼쳐놓고 30년이 다 되어가는 그 전설의 그림자를 음미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은 오아시스와 블러의 라이벌전을 다룬 책이 아니다. 두 팀 멤버들의 음악 족적을 통해 브릿팝의 역사를 소개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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