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드림 '생과 사'에 관해 말하다
자신(들)만의 색깔을 드러내고 지켜나가는 음악가(밴드)와 가수는 그것만으로 귀하다. 한편으론 고집스럽다 할 수 있지만 고집스럽기에 흔적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다. 한대수와 데이비드 보위, 산울림과 AC/DC, 패티김과 캐롤 킹이 위대한 이유다. 대한민국 인디 씬에도 그런 밴드와 뮤지션들은 많다. 줄리아드림 역시 그 중 한 팀이다. 2014년 미니앨범 'Lay It Down On Me'로 공식 데뷔한 이들은 싸이키델릭과 프로그레시브록의 아날로그 스타일을 자신들의 음악 방향으로 정하고 1집 '불안의 세계', 2집 '생과 사'까지 6년 여를 달려왔다. 물론 중간에 다리쉼은 있었다. 2017년 싱글 'Dance Music' 이후 이들은 잠정 활동을 멈췄고 멈춘 활동은 2020년 가을 두 번째 앨범 '생과 사'가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삶과 죽음의 밝거나 어두운 일면을 넘어 동시대를 향한 목소리로서 생(生)과 사(死)를 다룬 이번 작품에 밴드는 "제4의 가슴" 같은 새 멤버 훈조(아톰뮤직하트)를 영입해 음악의 철학, 소리의 표현 범위를 넓혔다. 3인조에서 4인조가 된 줄리아드림. 그들에게 "활동 중단 직후부터 발매 직전까지" 쓴 10곡을 담아 "아날로그한 사운드가 주를 이루지만 옛날 음악처럼 들리지는 않길 바"라며 만든 4년 만의 새 정규작에 관해 물었다. 인터뷰는 서면으로 했다.
김성대 '불안의 세계' 이후 햇수로 4년이 흘렀다. 싱글 ‘우리의 봄’ ‘Dance Music’에서 치면 3년 만이다. 말 그대로 기약 없는 휴식에 들어간 줄리아드림이라는 '불안의 세계'를 팬들이 3년간 겪은 셈이다.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박준형(보컬/기타) 애초에 해체한 것이 아니었기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사실 우리끼리는 ‘이때쯤 돌아오자’라는 암묵적 가이드라인도 있었지만, 그 계획했던 시간보다 많이 늦어졌다. 이런 일이 생길까봐 대외적으로 기약을 정하지 못했다. 그 사이 두 번 정도 복귀를 타진하고 작업을 진행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복귀가 무산되었다. 글쎄 계기라 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줄리아드림은 굉장히 소중했다. 정말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고 함께 보내온 세월의 농도가 짙다. 쉽게 놓을 수 없었다.
김성대 그동안 멤버들은 어떻게 지냈나.
줄리아드림 리더 박준형은 아시다시피 프로듀서, 작곡가, 음악감독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드러머 염상훈은 신해경의 세션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고, 베이스 손병규도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작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훈조 또한 아톰뮤직하트 리더로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가며 방구녹음실 주인으로서도 다양한 음악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김성대 새 앨범 구상은 언제부터 한 건가.
박준형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활동을 중단한지 거의 한 달 뒤부터 시작했었다. 물론 발매된 전곡이 그 시점부터 동일하게 구상안에 있었던 건 아니고, 수록된 몇몇 곡과 누락된 몇 곡들이 밑그림처럼 그려졌었다. 당시 구체적 복귀를 겨냥하고 시작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음악적 아이디어들을 큰 계산 없이 막연하게 구상했던 것 같다.
김성대 특정 사건이 저변에 깔려있던 전작과 달리 '생과 사'는 매우 보편적인 주제다. 상투적이되 그만큼 다루기 힘든 철학적 주제를 앨범의 제목으로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박준형 하나의 대답으로 설명하기가 조금 어렵다. 처음 떠올렸던 아이디어의 시작은 ‘삶이란 거대하고 무거운 것’이라는 어떤 감각이었다. 꼭 ‘특정한 불행’ ‘불현듯 찾아오는 인생의 고통’ 따위의 부정적 스토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인간이 볼 수 있는 세상은 정말 좁고, 뒤따르는 판단 또한 그렇다. 애를 써봐도 무력한 결과를 맞이할 때가 참으로 많다. 그 거대하고 막막한 감각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다. 질문하신 대로 ‘생과 사’는 다 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넓은 내용이며, 철학적으로 깊게 파고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을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보편적이다. 작업했던 곡도 굉장히 많았다. 고민 끝에 너무 다양하게 뻗어나가기보다는, 간결하되 한 두 개 포인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자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왔고, 책도 많이 읽고 다양한 입장을 헤아려 보고자 했다. ‘생과 사의 모든 것’ 이라기보단 ‘생과 사의 어떠한 면’ 정도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
김성대 가사들은 경험인가, 상상인가, 아니면.
박준형 경험과 상상, 주변의 이야기, 그리고 그걸 정리한 개인의 의견 등이 섞여있다.
김성대 앨범 구상 또는 제작 과정에서 영감을 준 것들과 참고한 것들이 있다면 말해달라. 있다면 레퍼런스를 꼽아도 좋다.
박준형 구체적인 구상을 시작하면서 어떠한 제약도 없이 편하게 펼쳐나가보고자 했다. 오히려 예전에는 어떠한 기준 같은 것이 의식, 무의식에 담겨있었다.
이번에는 동시대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는 여전히 옛 음악들을 더 즐겨듣는 사람들이지만 그건 그저 우리 넷의 취향일 뿐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뮤지션으로서 과연 동시대 인간들-동료로서 인간들-에게 어떤 음악과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는 본질적인 고민을 했던 것이다.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과 우리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1970년대 영국인들도 그렇다. 그들은 그 시절을 보낸 젊은이들이고 우리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다. 지금 시대를 사는 소설가가 고전에서 깊은 감동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시대 작가로 빙의하려 들진 않을 것이다. 물론 될 수도 없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로서 이야기,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위한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60년대 영웅들도 역사의 부산물이고 우리 또한 그렇다.
1950년대 어떤 뮤지션의 음악이 내 인생 최고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2020년의 뮤지션인 내가 1950년도에 머물러야할 이유로 귀결되진 않는다. 비단 음악 뿐 아니라 음향적인 부분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아날로그 사운드 신봉자들이지만, 그것 역시 어떠한 성배와 같은 기준이 되진 않았다. 제약없이 그저 우리의 재미가 닿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괜찮다 생각했다.
김성대 앨범은 전체적으로 장엄하고 장대한 느낌을 준다. 몇몇 곡들은 소리의 온도나 질감에서 종교적이기까지 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정서, 분위기를 지향한 것인가.
박준형 하나의 분위기로 정의되지 않았으면 했다. 이를테면 전작 ‘불안의 세계’에선 불안하고 막막한 감각이 앨범 전체에 묻어났으면 했는데 ‘생과 사’는 하나의 색으로 흘러가지 않기에 다채롭길 바랐다. 예고도 없고, 즐겁다가도 심각해지며, 무기력해졌다가도 불현듯 손에 주먹을 쥐고 뛰쳐나가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때로는 한 곡에서, 나아가 전체에서 느껴지길 바랐다.
다만, 악기적 일관성은 꽤 느껴질 수 있을 텐데, 이를테면 기본 3인조 편성 위에 새롭게 추가된 건반들은 거의 60년대 스타일 악기들이다. 비틀즈와 킹 크림슨 등이 적극 사용한 멜로트론이라던가, B3/파피사/복스 같은 오르간, 월리쳐, 로즈 등 옛날 악기들을 쓰되 음악적으로 제한을 두진 말자는 것이 2집의 방향이었다. 우리가 늘 좋아하던 소리지만 다른 접근의 음악에 편견없이 담아보고자 한 것이다.
김성대 반면 리듬(비트)과 기타 톤 등에선 어떤 활기도 느껴진다. 그 활기는 모종의 대중성도 동반한 모양새인데.(물론 가장 대중적일 곡은 '말하지 못했어요'일 것 같지만.) 때문에 전반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앨범 곳곳에서 묻어난다.
박준형 재밌는 것은 2집을 작업하면서 단 한 번도 우리들끼리 ‘대중성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는 거다. 다른 모습으로의 시작 또한 그렇다. 어떤 면에선 우리는 1집 이전부터 우리가 추구하던 방향에 조금 더 근접하기 위해 애썼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내부의 만족도만을 위해 작업했고, 주변에서 만족해도 내부적 만족이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기도, 감정적으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종종 ‘이것이 발매되면 어쩌면 사람들은 대중적으로 접근했다고 바라볼 수 있겠구나’라는 이야기는 했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예상 할 수 있었달까.
앞서 언급했듯, 생과 사의 다양성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오랜 시간 고민했다. 물론 사람들이 느낄 대중적 색채(이를테면 전자드럼, 덜 헤비하고 어두운 곡)를 의도적으로 피해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양한 음악을 듣고 다양한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싸이키델릭의 기준 안에서 자유자재로 음악을 그려나가고 싶었다. 네 젊은이들의 가능성을, 지나간 한 시절로 모아 제한하고 싶진 않았다. 흘러가는 대로 만들어보자는 쪽이 더 컸던 것 같다. 이를테면 이번 곡들 중 ‘Social’은 역대급으로 다른 뉘앙스를 띠고 있다. 밝지만 정제되고 현대적인 리듬이다. 외면적 밝음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사회의 태도를 드러내고 싶었다. 그 안에서 개인이 겪는 불안함과 두려움은 후반부 멜로트론과 신스 아르페지에이터로 표현했다. 수단이 드럼머신이건 블루스 기타 솔로이건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점이 반영된 것이 2집이고, 다음이 어떠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김성대 훈조의 가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합류로 확실히 이전과 다른 줄리아드림이 들린다.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박준형 훈조는 줄리아드림의 오랜 팬이었다. 그의 밴드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먼저 연락을 청해 멤버들과 만나기도 했고, 한 번 친해진 뒤로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음악을 잘 하는 친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줄드를 이미 깊게 존중하던 친구이면서 동시에 더욱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다. 때문에 복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종종 의지했다. 그 즈음 우리는 두 차례 정도 복귀를 시도했었는데 여의치 않았고, 다들 많이 힘들어했다. 우리는 4인조 혹은 4인 같은 3인조 사운드를 만들려 부단히 노력하던 중이었고 기타 페달 보드의 확장, 새로운 멤버 영입 추진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다 모두 실패한 상태였다. 물론 개인사 문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반 연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훈조에게) ‘야, 너 건반 겸 기타로 같이하자’고 했다. 훈조는 본인의 주력 파트가 아니라며 망설였지만, 너는 음악을 잘 하니 조금만 익숙해지면 될 거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실력파 연주자들은 정말 많지만, 같은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들을 찾기는 정말 어렵다. 나는 손가락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 제4의 가슴이 필요했고 이 영입은 우리 모두에게 완벽했다.
김성대 박준형과 훈조는 아톰뮤직하트에서도 함께 활동한다. 아뮤하에선 훈조가 리더고 줄드에선 박준형이 리더다. 그리고 두 밴드의 음악 성격은 분명 차이가 있다. 이 정반대 상황, 다른 음악적 길이 시너지를 일으켰다고 보는가.
훈조(키보드/보컬) 상당히 독특한 케이스인 것은 분명하고 음악적 시너지를 일으킨 부분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리더라는 포지션에서 오는 영향력은 미세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두 사람은 각자가 작곡이라는 망토를 벗었을 때 음향적인 혹은 감성적인 부분처럼 작곡 외 요소들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귀와 마음이 되어줄 수 있었다 생각하고 있다.
박준형 추가하자면, 각자의 차이가 분명해지는 시점이 있지만, 음악적 차이보다는 감각적 공통점에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이 더 크다. 때로는 누구보다 거세게 갈등하고 첨예하게 부딪치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동료이기도 하다. 의견이 부딪치는 순간에도 상대방 이상향이 어디인지 알고, 표현하고 싶은 아름다움의 모양을 안다. 물론 잘 모르겠는 순간에도 이해하려 한다.
김성대 작곡 및 녹음 과정은 어땠는지. 막히거나 힘든 점은 없었나.
박준형 언급했듯, 작곡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활동 중단 직후부터 발매 직전까지 이어졌다. 때문에 긴 시간의 고민이 담겨 있다. 당연히 수많은 막힘이 있었고 그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기존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납득할 수 있는 결과물을 위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시간이었다. 녹음은 즐거웠다. 보통 한국의 스튜디오에서는 자유롭게 다양한 소리를 테스트 해보기가 어렵다. 아마도 빠른 작업을 선호하는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정해진 룰을 따라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 특성 등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겠지만, 비용이라는 측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훈조는 본인의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2집의 사운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기에, 우리는 긴 시간을 들여 작업할 수 있었다. 많은 경험에서 비롯된 재능 넘치는 의견들을 제시했음은 물론이다.
김성대 믹싱과 마스터링, 프로듀싱에서 가장 염두에 둔 점을 각각 말해준다면.
박준형 전체 음악의 질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었고 이는 믹싱에 앞서 프로듀싱 단계의 과제이기도 했다. 아예 6, 70년대 스타일의 아주 자연스러운 음악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었고, 당연히 대중적 팝이나 록적인 사운드를 추구한 것도 아니었다. 이는 편곡에서부터 맞닿아있는 문제였다. 현대적, 아날로그적 아이디어가 혼재되어 있었기에 어떤 면에선 더 단순한 집중점이 필요했다. 최초에는 우리가 미국 투어 중 만났던 로컬 싸이키델릭밴드들 사운드에서 아이디어를 얻고자 했다. 한국에선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듣기 어려운 그들의 사운드는 러프하면서도 지저분하고, 안 좋게 믹싱 된 것 같지만 따뜻하고 힘이 있었다. 물론 돌아와 주변에 들려주니 너 나 할 것 없이 ‘믹스가 별로야’라고 했다(웃음). 우린 좋았는데. 어쨌거나 아날로그한 사운드가 주를 이루지만 옛날 음악처럼 들리지는 않길 바랐다. 현대적인 편곡들이 많았기에, 여러 가지 색이 한대 섞인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
믹싱에선 굉장히 많은 레이어의 딜레이/리버브 효과들이 있었는데, 한 곡에 수십 가지 이상 효과가 복잡하게 작동했다. 예전에는 솔로 연주 등으로 싸이키델리아를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번에는 사운드적인 색채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물론 라이브에선 여전히 연주들이 많이 드러날 것 같지만.
마스터링은 블랙 키스, 악틱 멍키즈, 그린 데이, 리암 갤러거, 마릴린 맨슨 등의 음반을 마스터링 했던 브라이언 루시와 작업했다. 브라이언이 보내준 초기 버전은 좀 더 대중적인 록음악처럼 거칠고 두텁게 작업되었지만 우리는 마스터링 단계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내길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몇 차례 수정을 거쳐 결과를 냈다. 브라이언도 나중에는 우리 의도를 알고 잘 반영할 수 있었다.
김성대 파트별로 작업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일까. 그리고 자신의 파트를 귀기울여 들어주면 좋을 곡을 하나씩 추천해달라.
박준형 앨범을 생각할 땐 늘 하나의 톤이나 악기 사운드보다는 음악 전체의 핵심을 먼저 생각하는 편이다. 좁게는 하나의 곡, 넓게는 앨범 전체. 때문에 한 곡을 꼽기는 어렵다. 굳이 기타적으로 설명하자면 좀 더 담백한 연주를 하고자 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정이 드러났으면 했다. 사운드로서 연주는 다채롭지만, 정작 기술로서 연주는 더 단순하고 덜 격정적이다.
염상훈(드럼) 비슷한 관점이다. 개별 곡들의 연주 스타일, 드럼라인, 톤 모두 개인적 성향을 드러내기보다 프로듀싱의 흐름에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 곡만 꼽자면, 아무래도 팔이 부려져라 열심히 북을 두드렸던 '구슬' 이지 않을까 싶다. 상당히 선이 굵으면서도, 스타일이나 톤적인 측면에서 이번 앨범 드럼의 방향성이 잘 표현된 곡이라 생각한다.
손병규(베이스) 전작들에 비해 피킹 베이스의 비중이 늘었기에 피킹의 뉘앙스를 잘 살리려고 노력했다. 핑거 베이스와 피킹 베이스는 서로 다른 악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메커니즘이 다르기 때문에 원하는 연주가 될 때까지 집중적으로 연구 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로 이번 수록곡 중 ‘구슬’의 베이스 플레이를 귀 기울여 들어봐 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
훈조 내 이름이 남는 작업에 가장 신경 쓴 한 부분이란 것은 없다. 모든 것에 대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깊고 많은 최선을 다했다. 곡도 한 곡을 꼽긴 정말 어렵다. 앨범 단위로 한 번쯤은 들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크지만 굳이 한 곡만 꼽아야 한다면 ‘Flower Flower Flower’를 권하고 싶다. 곡의 길이를 떠나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깊숙이 퍼내서 표현한 곡은, 그런 외침은, 쉬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성대 '밴드'와 '앨범'이 점점 버티기 힘들어지는 업계 상황이다. 줄리아드림은 그럼에도 그것을 고집하고 있다. 이유가 있을 거다.
염상훈 사실 업계 상황과 별개로 밴드는 항상 버티기 녹록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업계 혹은 밴드의 경제적 상황만이 밴드의 유지를 가르진 않는다고 본다. 줄리아드림 멤버 개개인의 음악에 대한 가치관, 나아가 바라보는 삶에 대한 철학이 맞닿는 부분이 줄리아드림을 밴드로서 남아있을 수 있게 했고, 그 결과물이 이번 '생과 사' 앨범이라 생각한다. 앨범이 될지 싱글이 될지 혹은 다른 무언가가 될 것인지는 결국 그 시점에서 줄리아드림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에 따라 갈리는 문제라 생각한다.
훈조 밴드 음악을 동경했으니 밴드를 하는 것이고 로큰롤 음반을 사랑했으니 그 사랑에 답할 뿐이다. 아직도 음악 앞에선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늘 깨닫고 있고, 업계 상황까지 생각하면서 음악 할 여유가 아직은 부족하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대해 몸과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창작 활동에 힘쓰고 있으니 상당히 기쁜 일이다.
손병규 같은 맥락이다. 고집하고 있다기보단, 해온 것이 이것이고 봐온 것이 이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기에 그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성대 줄리아드림을 흔히 싸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록 밴드로 구분 짓는다. '한국의 핑크 플로이드'라는, 하는 입장에서나 듣는 입장에서나 조금은 부담스러울 비교도 종종 들리는데. 어떤 기분인가.
염상훈 줄리아드림이라는 이름만 보아도, 시작 단계의 우리는 그들(핑크 플로이드)의 에센스들을 가져와 줄리아드림화 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좋은 의미든 아니든, 그런 부분에서는 일정 부분 성과를 내었다 생각하나, 이젠 온전히 '줄리아드림'이라는 개별 존재로 기억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이전에도 가져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훈조 내 손을 떠난 음악을 듣고 어떤 수식어가 붙어도 부담스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셀 수도 없이 들었고 사랑했던 로큰롤 대가들의 음악은 무척 존경하고 여러모로 영향을 받았겠지만, 제2의 누군가가 되기 위해서 혹은 어떤 밴드의 아류가 되기 위해서, 그런 목표나 입장으로 음악을 하는 순간은 1초도 없었다. 그러니 덤덤하고 앞으로도 더욱 덤덤하게 마음속 음악을 표현할 생각밖에 없다.
박준형 한때는 퍽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최초 팀명을 정할 때 우리는 킹 크림슨, 예스 등 우리가 당시 가장 좋아하던 아티스트들의 곡들을 나열해놓고 그 중에 하나를 골랐다. 선택의 이유는 음악적 영향도보다는 다른 요인이 컸다. 가끔 농담처럼 우리의 팀명이 ‘에피타프’였으면 ‘한국의 킹 크림슨이었을려나’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선대 밴드의 영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담아낸 다른 음악적 영향이나 새로운 시선에 대한 집중보다 오로지 ‘한국의 핑크 플로이드’나 ‘한국의 길모어’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은 가끔 아쉽다. 음악, 음향적으로 더 많이 설명하고 싶지만 부질없는 것 같아서 안 하게 된다. 줄리아드림은 줄리아드림일 뿐이다.
김성대 팬들이 오래 기다렸을 것 같다. 이제 기약없는 '잠수'는 없을 것인지. 한 마디 부탁한다.
염상훈 잠수에 기약이 있던가? 정말 기약 없이 가진 휴지기였기에 기다려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하고, 감사하다. 기약 없음이라는 건 멤버 개개인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간을 뚫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의 마음이 닿았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기약 없는 휴지기를 또 맞게 될지 어떨지, 짧은 삶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아무것도 장담할 수가 없다 생각하지만, 줄리아드림에게, 그리고 줄리아드림을 사랑해 주시는 분들에게 다시 또 그런 시간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훈조 이 밴드의 팬이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새로 합류한 멤버로서 이 기다림 끝에 도착한 앨범이 뜻깊고 반갑다. 하지만 또 다른 ‘잠수’가 없을 것이라고 완벽히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만약에 잠수가 또 한 번 있다면 그것은 심해까지 깊은 숨을 참은 만큼 더 아름다운 호흡으로 세상을 마주하기 위함일 것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박준형 무엇을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린 오늘 밤 꿈도 정할 수 없는데. 그저 빛나길, 은근한 생명력으로 의지를 이어나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