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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pr 06. 2021

[헌정/리메이크 앨범 2] 옛노래들을 '기억'하다

조관우 [Memory]


당시 조관우는 “늪에 빠진 남자”로서 “스타 흉내”를 내고 있던 스스로를 “기가 막힐 노릇”이라며 자성 중이었다. 모든 걸 버리고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는 그. 2개월 동안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술을 마시고 자고 싶었던 낮잠을 실컷 잤다. 그러다 ‘늪’을 써준 하광훈을 다시 만났고 둘은 7개월이라는 긴 음악 여행을 또 한 번 떠난다.


미국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짐 리브스가 1957년에 부른 ‘The Gods Were Angry With Me’가 지글거리는 LP 소리에 실려 시작하는 조관우의 두 번째 앨범은 [Memory]라는 작품이었다. 제목이 알려주듯 이 앨범은 지나간 노래들 또는 하광훈이나 조관우가 동경했던 작곡가, 가수들을 ‘기억’하기 위한 리메이크 음반이었다. 단, 전부 다시 부르고 편곡한 건 아니고 하광훈이 쓴 ‘겨울이야기’와 ‘모래성’은 신곡으로 음반의 머리와 꼬리에 각각 자리 잡고 있다. 두 곡은 모두 괜찮은 멜로디를 머금어 다른 옛곡들의 아성에 충분히 맞설 만한 매력을 지녔다.


조관우는 말했다. 2집은 1집보다 몇 배 더 힘든 작업이었다고. 그것은 그때 그를 감싼 “스타가 되고 싶은 욕망과 잊혀질지도 모르는 불안과 초조” 때문이었다. 그런 조관우에게 “엄청난” 요구와 질책을 한 하광훈은 그를 다시 신인으로 돌려놓으려 했고, 하광훈의 주문 앞에서 조관우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아 “용기와 자신을 갖고” 앨범 녹음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의 독보적 팔세토는 그렇게 1년 만에 다시 고개를 들어 한국 가요팬들의 귓속으로 조용히 스며 들었다.


사실 [Memory]는 프로듀서 하광훈에게나 싱어 조관우에게나 부담스러운 작업이었다. 130만장 이상이 팔린 데뷔작의 기록을 깨는 일도 그랬을 테지만 무엇보다 유명한 곡들을 어떻게 소화시킬 지 방법론을 두고 둘은 똑같이 고민했을 것이다. 부른다면 또 어떤 곡을 부를 것인가. 처음 둘의 협업으로 다시 태어날 많은 후보작들이 있었다. 마지막에 남은 건 결국 여섯 곡. 거기엔 나미가 1984년 ‘인연(絆, 키즈나)’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먼저 발표한 ‘슬픈 인연’을 비롯해 신중현이 쓰고 김추자가 부른 ‘님은 먼 곳에’, 이봉조가 정훈희에게 준 ‘꽃밭에서’, 혜은이를 스타로 만들어준 길옥윤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김중순이 쓰고 채은옥이 부른 ‘빗물’, 김수희를 가요계 정상으로 이끌어준 유영건의 곡 ‘애모’가 포함됐다. 참고로 나미의 원곡은 발표 당시 국내에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 않았던 터라 1985년 한국에서 ‘슬픈 인연’으로 발표될 때 크레디트엔 키보디스트 겸 작곡가 겸 편곡가인 김명곤이 창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슬픈 인연’의 원작자는 하시 유키오(橋幸夫)라는 일본 사람이다. 조관우가 앨범을 발표한 1995년에도 사정은 같아 하시 유키오는 여전히 김명곤의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시대의 씁쓸한 단면이다.



[Memory]는 하광훈의 홈 스튜디오 ‘소리나라’에서 제작됐다. 때는 하광훈이 3년간 미국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직후. 그는 분명 자신이 목격하고 배워온 대중음악 선진국의 동시대 작법으로 자신만의 무엇을 만들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그는 유태준의 어쿠스틱 기타(‘빗물’)와 조명환의 비트 박스 등을 뺀 모든 악기, 프로그래밍, 믹싱과 레코딩, 백코러스와 프로듀싱을 혼자서 다 했다.(이로써 작품의 복선일 줄 알았던 앨범 재킷 속 재즈 캄보 그림은 어떤 농담이 되어버린다.) 이 음반은 조관우의 것이면서 하광훈의 것이기도 했다.


그런 하광훈의 편곡 기준 또는 색깔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곡은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다. 그는 이 곡에서 원작에 있던 브라스와 스트링 대신 느린 비트와 흐린 코러스를 흘려 넣어 노래 자체를 더 처연하게 만들었다. 아날로그 옛곡들을 해석하기 위해 원칙으로 세운 이러한 디지털 철학은 오롯이 하광훈의 편곡 기조가 되어 이 작품을 지배하고 또 통제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조관우가 자신이 부를 모든 곡을 여성 선배들 것으로 채운 점이다. 이는 조관우의 음색과 음역대 차원에서 선별된 것일 확률이 높지만 결과적으로 남성보다 비교적 덜 조명되고 평가되거나 저들에게 종속된 존재로 여겨졌던 여성 대중음악인들을 전면에 소개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를 가질 일이다.(장덕과 심수봉 같은 이름도 포함됐더라면 그 의미는 더 역사적일 수 있었을 테지만 이들은 명단에 없었다.)


하광훈이 처음 이 음반을 기획 했을 때 주위에선 “무리한 발상” “불량한” 시도라며 냉소 했다고 한다. 기획 자체가 모험적인 것일 순 있겠는데 왜 “불량”한 것으로 비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원곡보다 나을 순 없으리란 판단에서 나온 말들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의 냉소는 기우였고 조관우 2집은 1집에 이어 밀리언셀러가 됐다. 소리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과 비지스를 만나며 방향을 잡은 조관우의 가창력을 믿은 하광훈이 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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