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우체국 앞에서 (1994)
작사/곡 김현성
노래 윤도현
2010년대 들어 8090 레트로(복고) 열풍을 견인한 건 단연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였다. 한 시대의 기억, 정서라는 건 역시 당대 유행가에 기대는 바가 큰 터라, 당시 드라마에 흐른 수 많은 옛 노래들은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매말랐던 가슴을 때론 기쁨으로 때론 그리움으로 적셨다. 다소 식은 감은 있지만 복고 열풍은 202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해, 지금은 같은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그 맥을 잇고 있다. 이 드라마에선 1980~2000년대에 히트한 국내 노래들이 거의 매회 다시 불리며 '응답하라' 시리즈가 남긴 추억의 여운을 되살렸다. 시즌 2에서 배우 김대명이 절제해 부른 '가을 우체국 앞에서'도 그중 한 곡이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영화 '정글스토리'와 함께 윤도현이라는 가수를 세상에 알린 곡이다. 그 유명한 '이등병의 편지'를 만든 김현성의 작품으로, 1992년 그가 이끈 '노래동인 종이연'의 음반을 통해 처음 발표됐다. 김현성은 이 곡을 자신이 살던 파주시 광탄면 동네 우체국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썼다고 한다. 그 시절 종이연은 고양시와 파주에 살던 음악인 7명으로 구성됐는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윤도현이 음악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바로 종이연이었다. 당시 김현성은 "노래 실력은 부족했지만 성장 가능성을 보고" 윤도현을 받아들였고, 윤도현은 종이연이 먼저 부른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마음에 들어 이후 자신의 데뷔 음반에 다시 실으리라 마음 먹는다.
하지만 이 곡에 욕심을 낸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포크 가객 김광석이다. 김광석은 윤도현보다 일주일 늦게 이 곡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곡을 쓴 김현성은 아무래도 신인인 윤도현보다 알려진 김광석에게 주고 싶었지만 이미 약속이 되었던 터라 어쩔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김현성은 대신 '이등병의 편지'를 김광석에게 허락한다.
1994년 솔로 데뷔작을 낸 윤도현은 첫곡 '타잔'을 비롯해 '큰별은 없어', '임진강', '깨어나라' 4곡을 직접 작사, 작곡 했다. '나의 작은 기억'의 노랫말도 윤도현이 썼지만 작곡과 편곡은 강호정의 몫이었다. 이 앨범에는 나중에 윤도현 밴드(YB)의 히트 발라드로 거듭나는 '너를 보내고 II'와 '사랑 two'도 포함되어 있다. 두 곡을 모두 작곡한 임준철은 이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음악에 살을 붙인 참여 뮤지션들 중엔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토미 키타, 베이시스트 겸 편곡자 조동익,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 김선중, 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코러스) 정도가 눈에 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그런 윤도현의 데뷔작에서 세 번째 트랙에 자리했다. 스산한 신시사이저와 어쿠스틱 기타 아르페지오에 윤도현의 안개같은 목소리가 들어서고, 40여 초 뒤 드럼과 코러스를 더하면서 곡은 좀 더 풍요로워진다. 가을 냄새를 한껏 머금은 일렉트릭 기타 솔로가 곡의 1부를 정리하고 나면 윤도현은 다시 후렴으로 돌아와 노래를 절정으로 데려간다. 한국 대중이 흔히 '록 발라드'라 부르는 장르 공식을 충실히 따른 이 곡은 앞서 말한 두 발라드 곡들과 함께 윤도현의 미래를 활짝 열어준 추억의 노래로 지금도 누군가의 가슴 깊숙이 남아 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1988)
작사/곡 김창기
노래 김광석(동물원)
김광석을 뺀 동물원 멤버들은 음악을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엄연히 자신들의 곡을 만들어 부른 프로였다. 그들에게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근거는 아직 덜 다듬어진 연주와 노래 뿐, 음악 자체는 아니었다. 김창기, 유준열, 박기영, 박경찬이라는 싱어송라이터들의 존재는 김광석이라는 타고난 노래꾼의 절창과 더불어 1980년대 끝에 매달린 동물원의 이른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는 90년대 중반까지 펼쳐질 대한민국 통기타 음악의 두 번째 대중화, 그 서막이기도 했다.
80년대 동물원은 앨범 두 장을 남겼다. 동물원 1집에 '거리에서'와 '잊혀지는 것'이 있었다면 2집에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와 '혜화동'이 있었다. 김창기가 '잊혀지는 것'과 '혜화동'을 불렀고 김광석이 나머지 두 곡을 불렀다. 네 곡 다 김창기가 썼고 네 곡 중 '혜화동'을 뺀 세 곡은 93년에 김광석이 모조리 다시 불렀다. 동물원의 시작은 김창완(산울림) 덕이 컸지만 동물원의 인기는 김창기와 김광석의 재능에 기댄 결과였다.
동물원 2집을 여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김창기가 의대생 시절 "본과 3학년 2학기 시험을 앞둔 날 밤에 만든 곡"이다. 김창기는 같은 날 밤 '기다려줘'라는 곡도 함께 썼는데 이 곡은 동물원을 나가 홀로 선 김광석에게 그가 선물로 준 것이다. 김창기의 곡에 살과 피를 더해준 김광석은 동물원 시절까지 자신의 곡을 꺼내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노래만 불렀다. 묵혀둔 그의 자작곡들은 김형석의 '너에게'가 히트한 솔로 1집 때 쏟아져나오기 시작해 이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같은 곡들로 이어졌다. 동물원의 초기 두 명반에서 맹활약한 김창기는 3인조로 재편된 3집부터 그룹의 사실상 리더가 된다.
쓸쓸하고 웅장한 건반 연주와 절룩거리는 베이스 드럼. 조심스레 긁어내리던 어쿠스틱 기타 스트로크가 서서히 리듬을 타면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시작한다. 김광석이 한숨처럼 내뱉는 첫 발성 "비가 내리면~"에서 곡은 이미 명곡으로서 숙명을 예감한다. 노래가 흐르고, 감정이 조금씩 벅차오르지만 김광석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외침을 아낀다. 절제하던 그의 노래는 피아노와 키보드가 노래의 변화를 종용하는 3분 41초부터 비로소 고삐를 푼다. 독창은 어느새 합창이 되고, 합창 앞에 선 김광석의 목청은 다시 그 합창에 맞서며 곡을 지배한다. 혹 소설 '젊은날의 초상'이나 영화 '고래사냥'이 담지한 청춘의 고뇌를 음악으로 추출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지. 김광석과 동물원의 젊은날은 그렇게 흐린 가을 하늘 아래 천천히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