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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Nov 19. 2021

생성과 부재의 음악

이상의 날개 '희망과 절망의 경계'


음악에서 곡은 단편 영화이고 앨범은 장편 영화다. 가령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을 볼 때와 6분 안에 감상이 끝나는 김종관의 '하코다테에서 안녕'을 볼 때 그 호흡은 완전히 다르다. 밴드 이상의 날개(이하 '날개')는 여기서 장편을 지향한다. 날개는 곡 하나의 상징보다 앨범 한 장의 서사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길 즐긴다. 언젠가부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노래 하나를 온전히 들어내기에도 벅찰 만큼 빠르고 바빠졌지만 날개는 그 속도, 상황을 잠시 멈추고 솟은 산 먼 하늘 한 번 마음껏 바라보자는 심정으로 기타를 치고 베이스를 치고 드럼을 치고 노래를 부른다. 내가 여기까지 썼을 때 날개의 두 번째 앨범에선 '홈'이 흘러나왔다. 리더이자 보컬, 송라이터인 문정민의 사운드 디자인 솜씨가 가장 돋보이는 7분 2초짜리 트랙이다. 포스트록이라는 장르가 가진 폭풍 같은 광활함이 이 곡에는 있다. 그 광활함은 물론 날개의 음악적 본질, 방향이기도 하다.


날개는 시간과 공간을 노래하는 밴드다. 시공은 늘 함께 있는 것. 단, 공간은 머물러있지만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고정과 이동이라는 극단의 성질이 곧 날개의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은 다시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순간과 영원, 관념과 실재, 만남과 헤어짐, 의미와 무의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위한 밴드의 명분이 된다. 이 끊임없는 두 갈래 구분은 앨범 '희망과 절망의 경계'의 재킷 아트워크에서도 강렬하게 시각화되었다. '방황하는 그림자' 정도로 표현해볼 수 있을 이 고독한 흑백 이미지는 첫 곡 '그림자'의 강한 도입부와 엉겨 이 작품이 얼만큼 화려한 절망으로 치달을지를 예감케 한다.



이상의 날개는 말을 아낀다. 곡 중후반을 찢는 전기 기타의 일그러진 반전이 크랜베리스의 'Zombie'를 떠올리게 하는 '중력'과 '영원'에선 첫 노랫말이 각각 5분 여와 8분 30초 뒤에 나온다. 이들에게 말은 서둘러 내놓는 성명(聲明)이기보단 고이 간직했다 펼쳐보는 편지나 일기에 더 가깝다. 비록 저것들보다 말은 좀 더 많지만 "나는 무(無)이고 바람이고 허공"이라 말한 다자이 오사무의 유명한 소설 속 주인공의 자조를 담은 '인간실격'은 그런 날개의 가사가 지닌 수줍음, 내밀함의 전형이다. 물론 '인간실격'이라는 이 가차 없는 심판은 지난 앨범의 곡 제목처럼 '상실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일상에서 한 번쯤은 맞닥뜨렸을 좌절의 구렁텅이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날개의 음악에 절망의 관념, 허무의 초상만 있는 건 아니다. 거기엔 아련한 '스무 살'의 기억도 있다. 다시 만날 순 없지만 그저 아름답게만 남은 20대 청춘의 자아. 이처럼 절망과 허무와 아련함이 알맞게 뒤섞였을 때 날개의 음악은 비로소 날아오른다. '중력'의 마지막 템포가 내달릴 때 공허한 기타 아래서 신비롭게 일렁이는 베이스 연주도 그렇고, 넬(Nell)이 'Ocean Of Light'에서 했던 느낌을 닮은 '홈'의 반쪽 전개 역시 마찬가지다. 날개의 음악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끊임없이 생성하지만 마지막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다. 무이고 바람이고, 허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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