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Nov 06. 2021

'나쁜 기집애'가 독립하는 법

CL 'Alpha'

시기와 질투는 성공의 Shadow / C to the L 한국 문화의 대모

'HWA'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디(Independent)'를 오해하고 있다. 인디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티스트 스스로 제작과 홍보, 유통을 직접 하겠다는 의지다. 말 그대로 '독립'을 뜻하고 '자치'를 뜻한다. 주류와 비주류, 유명과 무명이라는 구분에서 인디를 자꾸 후자 쪽(비주류와 무명)에 두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틀렸다. 인디는 그런 게 아니다. 탄탄한 자본과 발 넓은 타인에 의지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펼쳐보기 위해선 주류 뮤지션도 얼마든지 인디 뮤지션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솔로 데뷔작을 발표한 씨엘(CL)도 마찬가지다. 그는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인디펜던트 아티스트'라고 소개했다. 물론 그 전제는 "독립 아티스트가 누리는 '럭셔리'"다. 지금 씨엘의 공식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198만여 명. 전 소속팀이었던 투애니원(2NE1) 구독자 수엔 한참 못 미치지만 '독립한 씨엘'이 일군 것치곤 나쁘지 않은 수치다. 상식적으로 우린 세계적인 배우 존 말코비치가 몸소 내레이션을 해준('Spicy') 뮤지션을, 올린 지 1주일 된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1300만 회를 넘긴('Tie a Cherry') 아티스트를 비주류라 하진 않는다. 아무리 인디를 택했어도 씨엘은 여전히 "제일 잘 나가"는 주류 뮤지션이다.



걸어 보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해 걷는 법도 쉬어가는 방법도 모른 채 13년 동안 많은 걸 이루고, 많은 걸 느끼고 또 많은 걸 잃기도 했다 (...) 누군가 선택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CL로 돌아가 하나씩 스스로 해 나갈 것 (...)


2019년 미니 앨범 '사랑의 이름으로' 소개 글에서 씨엘은 위와 같이 말했다. 자신의 시작이었던 2NE1 생활에 감사하면서도 온전히 '내가 원하는 무엇'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글귀다. 재밌는 건 정규 솔로 데뷔작의 시작인 'Spicy'의 "논 적 없이 달려왔지 근데 이제 시작"이라는 노랫말이 "걸어보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해"와 대구를 이룬다는 점이다. 특히 마지막 "하나씩 스스로 해나갈 것"이라는 다짐에선 앞으로 씨엘이 펼쳐나갈 퍼포머, 아티스트, 뮤지션으로서 포부가 그대로 느껴지는데, 이는 "간식조차 없는 판치는 니들 잔치"라며 냉소하는 'Spicy'의 선언("에너지, 파워, 케미스트리")과도 은근히 통한다. 씨엘은 지금 자신의 예술 세계에 강한 자신감과 비전, 확신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씨엘 스스로도 그 세계가 얼만큼 더 확장되고 진화할지 모른다는 것. 앨범 제목이 미지수(Alpha)인 이유다.


씨엘은 신작 'Alpha'를 자신의 음악적, 예술적 청사진(Blueprint)이라고 했다. 청사진(靑寫眞)은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계획, 구상 등의 비유"를 이르는 말로, 지금 그의 청사진은 CL과 이채린의 화해를 통한 새로운 캐릭터 구축이다. 이를 위해선 느낀 대로 하며 삶이 흘러가야 하고('Let It') 오직 내 모습만 믿어야 하며('Tie a Cherry') 내가 걸어온 대로 그대로 나 다워야('My Way') 한다.



이 앨범은 그래서 씨엘의 정체성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평소 자신을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존재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의 가사에선 언제나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를 지탱하며 라임을 엮고 플로(Flow)를 탄다. 신작의 경우엔 그것이 제목에도 적용됐다. 가령 'Chuck'과 'Xai'가 그런데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짓 태도나 모양'을 뜻하는 한국말 '척'과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까지의 거리나 공간'을 뜻하는 '사이'가 저 두 단어의 정체였던 것이다. 심지어 모든 가사가 영어인 'Siren'에서도 씨엘은 "버려진 재미"라는 한국어를 기어이 집어넣으며 자신의 반쪽 정체성을 챙긴다. 이 노력은 채린을 직접 언급하는 'Lover Like Me'와 'Chuck' 같은 곡들에서도 다른 차원으로 감행되고 있다.


씨엘은 싱어이기도 하지만 그의 본류는 랩이다. 그는 자신의 랩으로 기존 랩의 룰을 깨길 원한다. 가사와 퍼포먼스 곳곳에서 작렬하는 스웨그는 그 곁가지, 수단일 뿐이다. 예컨대 무표정한 폴리 리듬 루프로 곡을 펌프질 하는 'Spicy'와 글로벌 히트작 '오징어 게임'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인용한 'HWA'는 분명 YG 시절 '나쁜 기집애'와 'Hello Bitches'의 연장이지만 한편으론 그것들과 선을 긋고 있다. 그러니까 '롤링 스톤'이 언급한 대로 씨엘은 그 선 너머에 있던 "케이팝 시스템에서 탈피"해 가장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신만의 랩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과거 누군가가 2NE1을 정의 내린 "자유분방한 배드 걸, 진화한 아이돌"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미래의 씨엘을 위해 준비해둔 상찬이 아니었을지. 'Alpha'를 반복해 들을수록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작품은 지난해 9월에 발매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씨엘은 "더 배워 제대로 만들기 위해" 발매를 연기했다. 알고 있다. 진정한 아티스트는 완벽한 1%를 위해 어설픈 99%를 과감히 포기할 줄 안다는 것을. 앨범 'Alpha'는 수록된 모든 트랙의 작사, 작곡에 씨엘이 참여했을 뿐 아니라 그가 기획과 제작까지 깡그리 지휘한 작품이다. 음반 속 곳곳에 잠복해있는 알앤비와 EDM, 붐 비트(Booming Beats)와 트랩 힙합, 트로피컬 하우스와 중동풍 텍스처, 신스와 심포닉 요소들이 다 거기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씨엘과 채린, 한국과 아시아를 위해 앨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경계 없이 버무려진다. 그래, 명색이 '나쁜 기집애'의 독립이라면 이쯤은 돼줘야 하겠다. 멋진 출발이다.



*이 글은 ize에도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현 '미련, 석양, 안개를 헤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