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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Nov 05. 2021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2010)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싶은 게 정말 비현실적이었어요. 영화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나 보던 일이었죠. 제 주변 누구도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 없었기에 그 일이 제겐 초현실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했어요. 너무나 당혹스러웠는데 뭘 어떻게 잘라야 심의를 통과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자기 검열이었어요. 특정 장면에서 잘라야 하는지를 놓고 심하게 약해지게 되더군요.

김지운


어쨌든 시끄러웠던 심의 과정을 거치고 영화는 개봉됐다. 그리고 관객들의 반응은 최민식의 말처럼 "빵점 아니면 백점" 분위기였다. 단순화 하자면 잔인해서 '빵점' 영화로서 '백점'일 것이다. 물론 난 후자다.


종교적 정의를 떠나 일상 언어에서 악마란 나쁜 것이다. 때론 미친 것이고 잔인한 것이다. 여기 살인마 경철은 그런 악마의 정의를 두루 갖춘, 시쳇말로 '또라이'다. 타이어에 구멍이 나 차와 함께 눈길에 방치된 수현(이병헌)의 애인을 그는 망치로, 식칼로 아작을 낸다. 아이를 가졌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경철은 그녀를 토막냈다. '괴물'의 괴물이 영화 전반부에 나타났던 것처럼 '악마를보았다'의 악마도 이렇게 영화의 전(前)반에 등장한다. 아마 관객들은 경철의 첫 살인을 목격하며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에 대한 흥미와 인간 도살의 역겨움, 마치 현실같은 공포와 '있을 수도 있겠다'는 떨떠름함을 동시에 맛보았을 것이다.(물론 그의 가장 인상적인 살인은 택시 강도들을 난도질하는 장면이다. 김지운 감독은 경철이 얼만큼 '센놈'인지 보여주기위해 심혈을 기울인 장면이라 밝혔다.)


영화는 우선 아이를 가진 애인을 잃는다는 설정에서 '아저씨'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단, '아저씨'가 잃은 것을 되찾는 과정인 반면 이 영화는 잃게 한 것을 죽이러 간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갈린다. 태식은 소미를 구하러 가고 수현은 경철을 죽이러 간다. 여기서 '복수 전문 감독' 박찬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배우가 '올드보이'의 최민식이라서가 아니라 난 이 영화를 보며 계속 '복수는 나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딸을 잃은 송강호, 애인과 배 안의 자식을 잃은 이병헌의 분노와 명분은 같다. 이는 결국 복수의 방법에 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결과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킬레스 건을 끊은 송강호보단 "아직 멀었다"며 아킬레스 건을 끊은 이병헌 쪽이 훨씬 더 잔혹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악의 주체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악마는 누구인가? 여자들을 죽인 경철 아니면 그런 경철을 죽이려는 수현?  


모든 인간은 선악의 내면을 고루 가지고 있다는 케케묵은 심리학적 분석이 아니다. 일단 이 영화를 보며 관객들은 대부분 수현의 입장에 서게 된다.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혼하고 아이까지 밴 애인을 잃은 수현을 위로하고 함께 분노한다. 수현이 현상 수배범들을 하나 하나 처단해가는 과정에서 수현과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똑같이 '악의 응징'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복수는 애인의 장례식장에서 수현이 약속한 것에 대한 관객들의 허락이다. 니가 당한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고통을 그 놈에게 주겠다는. 그래서 수현은 이제 '올드보이'의 수법을 차용(?)한다. 잡았다 풀어주고 또 잡았다 풀어준다. 그러면서 건네는 한마디.


기억해둬, 점점 끔찍해질거야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나'라는 반문이 당연히 나올 것이다. 영화에서도 수현의 처제될 뻔한 사람이 똑같은 반문을 한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형부가 그런다고 죽은 언니가 살아돌아오냐고. 그런 사람들은 사형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일 거고, 나도 약간은 그 쪽이다. 하지만 경철 이 놈은 왠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같다. 그것이 정의일 것만 같고 그 놈은 반드시 죽여야만 할 것같다. 그래서 나는 어느새 다시 수현의 입장에 서있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저 X새끼를 어떻게 죽이면 잘 죽였다고 소문날까. 여기서 수현의 외부에 있던 악마(경철)는 점점 수현의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직 멀었다고, 이제 시작이라며 그는 점점 그리고 더욱 끔찍한 복수를 계획하고 감행한다. 돌아올 수 없는 애인에게 약속한 반복될 수 있는 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악에는 악인 셈이다.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것이 의미 없는 상황에서, 심리적 고통을 주는 게 수현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거라고 봐요. 경철이 가장 원하지 않는 순간에 그를 죽이자는 거죠. 햄릿이 숙부가 기도할 때 죽이려다가 혹시 그렇게 하면 숙부가 천국에 갈까봐 포기하는 것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할까요.

김지운      


어쩌면 영화의 논란은 '잔인함'이 아니어야 했다.(바로 그런 논란이 '가위질'을 부르는 거다.) 차라리 경철과 수현을 놓고 선과 악의 본질을 되묻고, 수현의 내면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접근해야 했다. 아니 적어도 수현의 미지근한(?) 복수에 대해 말들을 해야 했다.(난 그가 "점점 끔찍해질 거"라길래 손톱 발톱 다 뽑고, 혀 뽑고, 손목 발목 다 끊고, 그럴 줄 알았다.) 경철의 목적없는 살인, 수현의 의미없는 살인(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수현의 라스트 씬!), 그리고 살인의 방법.

 

2010 9.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혼란스러웠다. 눈부신 가을  여름 태양은 피냄새로 얼룩진 영혼을 겨우 이끌고 가는  지치게 했다. 우연일까. 집에 도착해 집어든 정치철학 책의 제목은 마치 '악마를 보았다' 던지는 질문같았다. 질문은 해답같았고  질문이야말로  영화를  사람들 모두가 던져야 할 물음 같았다. 그러니까 결국  영화는 '선악의 피안'  '정의' 문제였을까. 경철을 죽인 수현은 '정의'였던 걸까, 아니면 경철과 다를  없는(또는 경철을 능가하는) '악마'였던 걸까. '악마를 보았다' 재밌지만 어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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