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일의 음악 세계
저는 가수가 아니고, 천재도 아닙니다
유니버설 뮤직 클래식이 마련한 AI(인공지능)와 인터뷰에서 정재일은 잘라 말했다. 그것은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로 시작하는 뭇 매체들의 기계적 상찬에 대한 거부이자 가끔 노래를 부르긴 해도 자신은 박효신이 될 수 없다는 소심한 인정이었고, 영감에 기대는 천재적 광기보다 규율을 가진 구도자적 삶에 더 매력을 느낀다는 예술가로서 자기 선언이었다. 음악을 만국 공용어로 생각하며 종묘제례악과 피나 바우쉬의 '넬켄(Nelken)'에서 "예술의 위대한 순간"을 보는 정재일. 그런 그의 음악은 고요와 격정, 희망과 절망이 끝내는 같다는 걸 들려준다. 그것들은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은 사라지는 게 아닌, 때론 동시다발로 때론 하나씩 자신을 드러내는 '가능성'으로 우리 삶에 들어와 있다. 정재일은 데드라인(마감)을 자신의 영감이라 부르며 자기는 "순수 아티스트가 아니"라 말하지만 정작 본인 음악은 그 자체 순수의 심연이다. 이렇듯 정재일은 대중적이지 않은 취향과 접근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서는 음악가로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정재일의 음악은 일단 사회 참여적이다. 그의 사유는 자본과 자연을 넘나들고 무엇보다 그의 음악 기저엔 따뜻한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 이 모든 것이 모여 정재일의 거대한 예술 세계를 이룬다. 예컨대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대한이 살았다'가 그랬고 다시 매만진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또한 그랬다. "절박함과 절망"을 뇌리에 새기고 임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돈 앞에 무력한 현대인들의 비극을 다룬 '오징어 게임'에도, "평등과 평화, 사랑과 정"을 위해 소리꾼 한승석과 함께 한 작품들에도, 인간을 포함한 생명과 숲과 역사의 수 천 년 관계를 음악으로 조망한 '상림(上林)'에도 그의 인간애적 사색은 함박 녹아있다.
정재일은 밝고 예쁘고 희망을 노래하는 이야기나 헐리우드식 몰아치는 음악이 필요한 작품에선 자신이 보여줄 게 없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어떤 진실들은 스스로 발견할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걸 가르쳐준 연극 '그을린 사랑'의 삽입곡들을 앨범으로 정리한 'Incendies' 같은 걸 만든다. 정재일이 빚어내는 그런 진지하고 섬세한 소리 세계는 솔로 2집의 표지 마냥 암흑 속 노란 불빛을 내뿜는 창문 같은 음악이다. 어둡고 외로워도 꺼지지 않는 희망을 그 음악은 늘 품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예술이 주는 도덕적 쾌감이자 예술이 행하는 도덕적 역할은 우리 의식에 지적인 희열을 주는 것이라고 한 수전 손택의 말처럼, 공(公)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뒤섞을 줄 아는 경지를 "거장의 경지"라고 쓴 톨스토이의 글처럼 정재일은 그렇게 5·18민주화운동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남도의 육자배기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새겨넣었다.
아주 오래된 유대 경전 속에서 되풀이되는 고통에의 절규, 운명에 대한 원망, 신을 향한 하소연, 간절한 기도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장민승 작가가 신중히 고른 30장의 기도 속에서 12곡의 음악을 길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앨범 'Psalms' 소개글에서
그런 인간적이고 자연적이고 구도자적인 정재일 음악의 진수를 나는 지난해 2월 발표한 'Psalms'에서 들었다. 여기엔 "가장 위대한 건 사람의 목소리"라는 그의 평소 소신도 고대 기독교 형식의 합창곡과 "아카펠라를 중심으로 절규하고 탄식하는 정은혜의 구음"을 통해 적극 담겨 있다. 앞서 말한 5·18민주화운동 40주년에 헌정한 '내 정은 청산이오' 작업의 여운을 장민승의 시청각 프로젝트 '둥글고 둥글게'(이 작품 역시 5.18민주화운동의 전(1979년 부마 민주항쟁)과 후(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를 어우르는 대한민국을 사진과 영상, 문서 아카이빙으로 담아냈다)로 이어온 끝에 태어난 'Psalms'는 장민승 감독의 말을 빌리면 "상소와 탄원의 고언"에 대한 창작자 정재일의 음악적 고독과 반성이었다. 또 한편으론 "화염병을 던지는 심정으로 헤비메탈을 하자"고 애초에 제안한 장민승 감독의 입장에서 우린 정재일 음악이 품고 있는 슬픔과 분노의 그림자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정재일이 'Psalms'를 만드는 내내 "인간의 비극, 고통과 우둔함은 왜 이다지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지 생각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어쩌면 그의 음악이 짊어진 숙명일지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 예술적 갈등이기도 했다.
정재일의 솔로 데뷔 앨범 '눈물꽃'에 수록된 '별난 녀석'의 가사에는 이런 소절이 있다.
아직 나는 모르는 게 많아 / 그러니, 가끔 너는 깜짝 놀랄 거야 / 아직 나는 해야할 게 많아 / 그러니 가끔 너를 버려 둘지도 몰라
나는 여기에서 '너'를 '예술'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별난 녀석'이란 바로 정재일 자신이다. 그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아 예술을 놀래키고 여전히 해야할 것이 많아 그 예술을 잠시 버려 두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죽기 직전까지 아름다움을 느끼고 살다 가고 싶어하는 음악가 정재일의 창작 방식, 태도라고 믿는다.
* 이 글은 <월간 국립극장>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