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들
사전에선 세대(世代)를 위와 같이 정의내린다. 좀 더 들어가면 원래 세(世)와 대(代)란 가계(家系)의 핵심 개념으로, 특히 선대와 후대의 연속성을 중시했다고 한다. 뜬금없이 웬 세대 얘기냐 할 수도 있다. 이유는 지금부터 쓸 내용이 4세대 국내 걸그룹 두 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걸그룹 계보를 구분짓는 '세대' 개념에서 이들은 분명 같은 시대를 살았고 또 연령층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 의식'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걸그룹 시장에서 콘셉트와 개성, 세계관이란 다른 팀과 달라야만 비로소 온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걸그룹을 구분 짓는 세대란 '동시대 또래' 정도에서 매듭을 지어야지, 그것이 의식의 공통화로까지 뻗으면 상황은 어색해질 수 밖에 없다.
차라리 공통 의식은 걸그룹들끼리가 아닌 그들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같은 세대 팬들과 팀 구성원 당사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무엇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실제 그 많은 걸그룹들이 만드는 콘셉트와 세계관이란 결국 자신들을 좋아해주는 팬들의 공감을 바라고 만드는 게 대부분이기에 그렇다. 글로벌로 본격 진출한 블랙핑크와 트와이스로 대표되는 3세대 걸그룹들이 다 그렇게 성장했고, 2000년대에 태어난 멤버들이 포진한 아이브와 뉴진스가 대표하는 4세대 걸그룹들 역시 그렇게 또래 팬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춤추고 노래한다.
바야흐로 2022년은 걸그룹의 해였다. 그렇다고 보이밴드들이 자취를 감췄다는 얘긴 아니다. 다만 아이돌 음악의 여세를 몰아가고 있는 3, 4세대 걸그룹들을 향한 대중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음원과 방송 차트 순위, 앨범 초도 물량, 뮤직비디오 조회수 등 단순 수치로만 따져봐도 분명한 현상이다. 최근 컴백했거나 컴백을 예고한 소녀시대와 카라 같은 2세대 걸그룹들도 나름 선전하곤 있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인기는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세대의 응원 덕분일 확률이 높다. 지금 대한민국 걸그룹의 사자후, 나아가 아이돌 그룹으로서 아성은 누가 뭐래도 그보다 후대인 3, 4세대가 날리고 있다. 2022년 10월 1일자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블랙핑크가 있고 그 두 계단 아래에 NCT127이 올라 있는 게 의미심장한 건 그래서다.
아이브와 뉴진스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다. 그들은 마치 걸그룹 시장의 게임 체인저를 자처한 듯 앞다투어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데뷔 300일을 갓 넘긴 아이브와 데뷔 30일을 훌쩍 넘긴 뉴진스의 이른 성공을 돕고 있는 건 역시 이들과 같은 세대인 10대 팬들, 그리고 이들 음악과 패션, 퍼포먼스에 녹아있는 레트로 요소에 마음을 빼앗긴 90년대 '엑스 세대' 이모, 삼촌 팬들이다.
무릇 아이돌의 성공 여부는 당대 10대 층이 얼만큼 관심을 가져주느냐에 달려 있는 법.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 에이치오티와 핑클, 동방신기와 원더걸스, 투애니원과 샤이니, 트와이스와 BTS가 모두 그랬다. 시작부터 '완성형 걸그룹', 'MZ세대 워너비'를 표방한 아이브 역시 그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긴듯 이들은 자신들 음악에서 작금 10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자신감, 자기애, 자유, 주체를 사랑과 결부해 표현한다. 예컨대 "언제나 가장 빛나길 원해 / 저 별처럼 눈부신 나 / 어떤 순간에도 자신있게 나아가 난"이라는 'ROYAL'의 가사는 그걸 잘 보여준다. 물론 밝은 마이너 코드로 상쾌한 무드를 뽐낸 'Attention'을 통해 건강한 이미지를 앞세운 뉴진스도 평균 나이 16.4세라는 물리적 조건을 걸고 그런 10대 층에게 크게 어필했다.
남은 건 레트로다. 아이브는 자신들을 샤이하게 지지하는 엑스 세대 팬들을 위해 무려 44년 전 이별 후 당당하게 살아남을 것이라 노래한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를 샘플링한 곡을 선보이는가 하면('After LIKE'), 원타임의 '1TYM' 후렴구를 변주한 듯한 노래('Love Dive')를 들고와 이모, 삼촌들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떠밀기도 했다. 그리고 뉴진스는 오래 전부터 자신들을 기획해온, 그 스스로가 이미 엑스 세대인 민희진의 말대로 뫼비우스의 띠 마냥 돌고도는 유행의 생리에 부합한 뉴트로의 한복판에서 레트로를 그리워하는 팬들에게 적극 손짓했다. 정형화된 케이팝 공식을 거부하고, 팝에 기반을 두되 특정 스타일을 고수하진 않았다는 민희진은 작, 편곡과 사운드 디자인 측면에서 세련됨과 자연스러움을 뉴진스 음악에 어떻게든 이식하려 했다. 그런 그가 구상한 뉴진스의 이름은 다음과 같은 뜻, 포부를 갖고 있다.
시대를 불문하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아 온 아이템인 청바지(Jeans)처럼, 뉴진스(NewJeans)는 매일 찾게 되고 언제 입어도 질리지 않는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 'New Genes'가 되겠다!
나온 김에 민희진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 싶다. 그는 콘셉트 기획과 비주얼 디렉팅을 포함한 이른바 '아티스트 브랜딩 전략'을 주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SM엔터테인먼트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다. 'Gee'에서 소녀시대의 청바지, 에프엑스의 '핑크 테이프', 엑소의 교복 등이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콘셉트'라는 키워드로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뒤흔든 그는 그러나 거의 번아웃 지경에 이르러 고민 끝에 하이브(HYBE)로 이직, 신규 레이블 어도어(ADOR)를 설립해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다. 뉴진스는 그런 민희진과 쏘스뮤직(하이브의 또다른 레이블) 관계자들이 2019년 10월 한 달 동안 세계 7개국 16개 도시를 돌며 13~19세 소녀 5만 명을 상대로 진행한 오디션 끝에 민희진이 직접 뽑은 데뷔조 멤버들로 구성돼 데뷔, 지금에 이르렀다.
민희진은 뉴진스를 선보일 때 아이돌 업계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대중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티저 영상도 없었고, 기자들을 초대하는 쇼케이스도 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뮤직비디오 8편만 공개하며 뉴진스의 등장을 알렸다. 심지어 그는 네 곡이 담긴 미니 앨범에서 세 곡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하는 파격을 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단지 뉴진스를 통해 자신이 보여주려 한 새로운 콘셉트가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좋은 음악. 유력 음원 차트들에서 뉴진스의 'Attention'과 'Hype Boy', 아이브의 'Love Dive'와 'After LIKE'가 현재도 10위권 밖으로 밀려날 생각을 않는 이유는 결국 세대를 아우르는 그들의 음악이 지닌 보편적 완성도 때문이었다.
*이 글은 ize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