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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Dec 31. 2022

음악으로 듣는 '건축무한육면각체'

Arkitekture [Rationalis Impetus]


문학계의 이단아였던 이상(李箱)의 시는 형식과 관습을 걷어찬 폭탄이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언어의 반역은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의미를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의미가 없는 의미는 이상의 시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의미였다. 그런 이상은 폴란드 프로그레시브 록 뮤지션 마렉 그레후타처럼 건축학도 출신으로, 그는 1998년 유상욱 감독이 영화 소재로 다룬 난해하기로 으뜸일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지은이이기도 하다.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아키텍쳐(Arkitekture)의 앨범을 다루는 글을 뜬금없이 이상의 시 이야기로 연 것은 이 팀이 이상의 시를 음악에 담았기 때문이다. 바로 두 번째 트랙 'Abnormal Reversible Reaction'이다. '이상한 가역반응'으로 번역되는 원작 시는 변비에 저항하며 화장실에 앉은 화자가 하얀 대리석 기둥처럼 보이는 햇살을 바라보며 상대성이론과 사물의 근원인 점·선·면을 다루는 작품으로, 해당 곡은 '건축적인 동시에 언어적'인 음악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아키텍쳐의 창작 철학에 그대로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뉴턴과 갈릴레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의 거성들이 등장하는 이상의 이 이상한 이상(理想)은 때문에 아키텍쳐라는 밴드의 음악을 끊임없이 배회하는 물질 같은 관념이다.


하나 흥미로운 건 이상이 자기 시에서 언어의 설명 대신 기호나 도형으로 파격적인 기법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는 음악 안에 숨은 언어의 가능성과 언어가 지닌 음악적 맥락을 모두 챙겨 음악을 언어의 형식으로 표현하려는 아키텍쳐의 목적과 언뜻 어긋나 보이지만 독자와 청자를 똑같은 가상의 화원, 상상의 뜰로 안내한다는 것에서 둘은 다시 만난다. 밴드가 말한 "겹겹이 층을 이루는 구조적 악곡"과 "서사가 있는 드라마틱한 곡의 전개"는 따라서 그 가상 또는 상상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기 위한 건축·문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아키텍쳐'라는 개념은 이 밴드의 전신인 수퍼스트링 때부터 앨범 타이틀과 콘셉트에 접목하며 천착해온 명제였다. 그 명제처럼 붕괴와 증축을 반복하며 음악을 채워나가는 이들의 연주는 자신들이 직접 인용한 말러(Gustav Mahler)의 습관, 즉 "충분히 계획을 세우고 떠난 길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무엇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은 끝내 폭풍 같은 킹 크림슨의 광기와 눈물 같은 유라이어 힙의 오르간, 구름 같은 제스로 툴의 플루트를 머금어 말러식 "내러티브 교향곡"을 방불케 하는 록의 구조로 수렴돼 우리 귀에 전해진다.



음악은 시각으로도 온다. 재킷 이미지를 보라. 저 무한하고 웅장한 느낌은 그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천공의 성 라퓨타')이나 드니 빌뇌브의 '콘택트', '듄'의 압도감을 방불케 할뿐더러 회화적인 면에선 북유럽 르네상스 거장 피터르 브뤼헐의 '바벨탑'의 장엄함까지 연결 짓게 한다. "이성에 바탕을 둔 음악이 더욱 커다란 감정적 고양감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아키텍쳐의 음악은 실제 저 그림처럼 추상과 환상, 이성과 논리를 대치시켜 예술의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아키텍쳐는 김상만(베이스), 김윤태(드럼), 민우아(바이올린, 비올라), 안요한(건반), 하동주(색소폰, 플루트)로 짜인 5인조다. 안요한은 수퍼스트링 3집 때 멤버였고 하동주는 같은 앨범의 게스트 멤버였는데 이번에 아키텍쳐에서 정식으로 뭉쳤다. 또한 아키텍쳐 음악의 서사에서 큰 부분을 짊어진 민우아라는 이름은 새로우며, 오래 함께 한 기타리스트 이한주가 빠진 건 의외다. 그렇다. 아키텍쳐의 음악엔 기타가 없다. 나는 이 사실을 팀의 핵심인 김상만과 김윤태가 수퍼스트링 때와 다른 무엇을 들려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키텍쳐의 음악은 실제 그랬다.


다시. 아키텍쳐는 챔버 록을 저류로 삼은 수퍼스트링의 진화다. 아키텍쳐의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는 그런 수퍼스트링의 원년 멤버였고 음악적 뇌관이었다. 이 사실은 중요한데, 한 밴드의 원년 멤버라는 건 그 밴드가 지향한 음악적 의지의 실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키텍쳐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현란하고 다부진 연주는 앨범 'Rationalis Impetus'의 뼈대를 이루고 리듬과 화성은 그 안에 피로서 젖어 들어 살로서 부대낀다. 태풍처럼 휘감아 드는 김윤태의 파라디들(Paradiddle) 악센트, 파트 사이 다리만 놓는다는 일반 관념을 거부하듯 김상만의 베이스 노트는 개성 넘치는 서스펜스를 흡입해 그 다리를 끊었다 붙였다 한다. 이렇듯 리듬 파트의 기초 설계는 그 자체 화려한 퍼포먼스임에도 두 사람의 호흡은 장르 위에 군림하지 않고 장르 속으로 녹아든다. 그 이름처럼 진보와 전위로 무장한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개념을 바닥부터 희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어떤 전율이 이들의 연주엔 있다. 아키텍쳐가 자신들 음악을 설명할 때 "재즈적 임프로비제이션과 하드록의 파워, 심포닉록의 장엄함"을 언급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키텍쳐 데뷔작의 트랙 수는 총 다섯 개. 앞서 말한 이상의 시를 소재로 한 곡만 2분대이고 나머지는 9분~11분대로 비교적 대곡들이다. 중세 물리학 용어가 제목이 된 첫 곡 'Impetus'는 신의 명령을 받은 천사들이 태양계를 움직인다고 믿은 중세 시대 사고가 "회의적 방법론을 통해 인지적 각성에 이르게 되는 지식의 역사를 음악적으로 풀어놓은 곡"이다. 제1운동자(Unmoved Mover)와 기만적인 신(Deus Mendax)이 포함된 트랙의 세부 목차는 이 곡이 그런 목적론(아리스토텔레스)과 기계론(데카르트)의 대치를 반영하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아마도 현악과 건반, 관악기의 불꽃같은 초반 앙상블은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에 감성을 내맡긴 사람에겐 가슴 철렁했을 순간이었으리라.


이 작품에서 가장 대중적인 멜로디를 지닌 'Prayer for the Dying'은 밴드 측이 설명했듯 "정의가 넘치는 현대사회의 이면에 실체적 죽음을 겪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레퀴엠"이다. 따라서 곡이 일관되게 내뿜는 느린 낭만은 사실 힘없는 우리 이웃들의 느린 소멸이었다고 보는 게 맞을 텐데, 이는 음악이 언어를 동반할 때 음악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아키텍쳐 예술론의 작은 실마리이기도 하다. 김상만과 김윤태, 안요한이 얼개를 짜고 나아가는 다음 곡 'Dark Matter'는 거대한 암흑행성이 지구에 접근해 지구를 멸한다는 플롯을 가진 트랙으로, 상대가 외계인이냐 행성이냐의 차이일 뿐 허버트 조지 웰즈의 <우주전쟁> 정도를 대입해보면 감상에 도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 곡은 "탄생과 죽음의 순환 속에 필연적으로 소멸하게 될 인간 문명의 숙명"을 다룬 'The Decay'. 작품 속 다른 대곡들과 마찬가지로 드럼과 베이스의 리드 아래 변박과 충돌음들이 어둡고 아름다운 드라마를 그려낸다. 이 모든 것이 무제오 로젠바흐의 전설적인 앨범('Zarathustra')을 닮은 트랙 배치로 무장해 음악을 듣는 나와 당신의 시공간 속으로 스며 때론 산발적으로 몸부림치고 한편으론 부드럽게 일렁인다.


무릇 프로그레시브 록이란 클래식, 재즈, (하드)록의 경계를 허물고 악기의 기교, 소리의 기술, 구조의 독창성을 앞세워 적어도 예술적 기준에선 쉬 토를 달 수 없을 음악 장르로 일컬어진다. 그래서 어쩌면 프로그레시브 록이 사랑받는 이유란 결국 프로그레시브 록이 외면받는 이유와 같을지 모른다. 그만큼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가 어떻게 될지 앞으로 어디를 향할지 모를 인생, 그 인생 앞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인간의 마음. 그것이 프로그레시브 록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행여 이 음악을 외면해온 사람이 이 음악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저러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속성을 당신이 아키텍쳐의 음악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새로운 음악은 늘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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