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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pr 22. 2016

굿바이, 프린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뮤지션이 잠든 날

그는 연주의 거장이었고 뛰어난 밴드 리더였으며 팬들을 열광시키는 가수였다
버락 오바마


또한 오바마는 그를 가리켜 “창조의 아이콘”이라고 말했다. 고작 51세에 세상을 떠났던 마이클 잭슨을 따라 프린스도 겨우 57세에 생을 마감했다. 미네소타 페이슬리 파크 자택에서였다. 사인은 아직 조사 중이다.

프린스는 말 그대로 천재였다.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룬다고 내 아이를 ‘신동’이라 부르는 부모들의 조급한 자화자찬 수준이 아니다. 실제 그는 못 만지는 악기(30종 이상을 다룰 줄 알았다)가 없었고 펑크(funk)부터 알앤비, 로큰롤, 신스팝 등 못 다루는 장르가 없었다. 노래면 노래, 기타면 기타, 화려한 퍼포먼스, 통제와 절제를 통한 사운드 디렉팅. 그의 행위에는 기교를 넘어, 스티브 바이의 말처럼 언제나 영혼(soul)이 담겨 있었다. “21세기는 프린스와 마커스 밀러 같은 멀티플레이어가 이끌어 가야 한다”고 말한 마일즈 데이비스나 “딱히 흠 잡을 데가 없는 기타리스트”라고 언급한 제프 벡의 극찬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 대중에게 그는 거의 ‘purple rain’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는 지난해, 이젠 유작이 되어버린 ‘Hit n Run Phase Two’까지, 정규 앨범만 39장을 발표하며 단 한 순간도 창작의 끈을 놓은 적이 없었다. 157센티미터 단신에, 그는 그 어떤 뮤지션보다 섹시하고 위대했지만 한때 그를 사랑한 마돈나나 음악적으로 거의 유일한 적수였던 고 마이클 잭슨에 비하면 프린스는, 적어도 한국에선 매우 과소평가된 사람이었다. 음악지 ‘롤링 스톤’이 “가장 평가받지 못한 기타리스트”라고 말한 건 사실 “프린스=purple rain”이라는 등식을 오랫동안 신봉해온 한국인들의 폐쇄적 상식에 비하면 그나마도 나았던 셈이다.

앞서 말했듯 프린스는 또한 위대한 기타리스트였다. 그는 연주에서 느리고 빠른 차원을 넘어 기타를 자신의 팔다리처럼 다룰 줄 알았다. 악기 하나를 자신이 마음 먹은대로 응용하고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은 사실 에릭 클랩튼 정도 거장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프린스는 내로라는 기타리스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기타 실력을 자랑했던, 그렇지만 제대로 평가는 받지 못한 ‘비운의 기타리스트’였다. 남녀의 성 기호 모양을 본 뜬(세상은 그것을 ‘러브 심볼(love symbol)’이라 불렀다) 기타 바디에서 이제 더 이상 그 짜릿한 펑키 그루브와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블루스 애드립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다. 2016년 4월21일. 세상은 위대한 뮤지션 한 명 이전에 위대한 기타리스트 한 명을 잃은 것이다.

생전에 그렇게도 프린스를 좋아했던 고 신해철은 그를 가리켜 “20세기에 태어난 흑인 모차르트”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과장없는, 매우 정확한, 그리고 프린스라는 괴물 아티스트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뼛속까지 프린스를 닮고 싶어한 신해철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었으리라. 이젠 두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Sign o’ the Times’를 실컷 얘기할 수 있을까. 먼저 간 데이빗 보위나 스티비 원더 정도가 아니고선 이 커다란 부재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부재일 터. “어두운 동굴의 사자”(스티븐 스필버그의 표현이다)여. 이제 편히 잠드시길.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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