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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Feb 25. 2023

한국 대중음악의 게임체인저 'BANA'

이 글은 편집을 거쳐 <여성동아> 2023년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이 글을 쓸 즈음 2023년 2월 12일자 국내 주요 음원 차트들을 찾아보았다. 7개월 전 데뷔와 동시에 케이팝 걸그룹의 생태계를 바꾼 뉴진스가 여전히 상위권에 있다. 팬덤의 화력이 집중된 것으로 보이는 어떤 차트에는 유명 트로트 오디션 출신 가수 두 명의 줄세우기 순위가 눈에 띄는데, 그 사이에도 뉴진스의 음원은 예외없이 침투해 있다. 지난해 8월에 공개한 'Hype Boy'가 지난 1월에 공개한 'OMG', 'Ditto'와 톱3 권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이 강력한 현상은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핫100)에까지 번져 각각 79위('OMG')와 90위('Ditto')에서 그 아성을 뽐내고 있다. 빌보드 핫100에 2곡 이상이 동시에 진입해 함께 올라있는 건 BTS, 블랙핑크에 이은 세 번째 기록이다.


이제 시선을 돌려 뉴진스 곡들에 첨부된 크레디트를 본다. 작곡과 프로듀싱 쪽에서 반복되고 있는 두 이름이 있다. 250과 박진수(Jinsu Park). 250은 "이박사는 무조건 제낄 것"이라는 각오로 트로트를 낮잡아 이르는 '뽕'이라는 장르에 4년을 매달린 끝에 완성한 솔로 앨범 [뽕]으로 2022년을 자신의 해로 만든 인물이다. 뉴진스라는 이름이 대중의 뇌리에 둥지를 틀 때 선두에 있던 'Attention'과 차트에서 롱런 중인 'Hype Boy', 저 곡들과 함께 데뷔작에 수록된 'Hurt', 그리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오른 'Ditto'가 모두 250이 관여한 트랙이다. 또 한 명인 박진수는 힙합 팬들에겐 프랭크(FRNK)라는 예명으로 익숙할 터인데, 그는 래퍼 김심야와 함께 [KYOMI], [Language] 시리즈로 한국 힙합계를 뒤흔든 '1MC1PD' 그룹 엑스엑스엑스(XXX)의 프로듀서 출신이다. 그의 이름은 뉴진스 데뷔 앨범의 'Cookie'와 빌보드 차트에 입성한 'OM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작부터 250과 프랭크를 언급한 건 두 사람이 같은 레이블에 소속돼있기 때문이다. 해당 레이블은 이 글에서 다룰 주제이기도 하다. 바로 SM엔터테인먼트에 인터내셔널 A&R로 3년 가까이 몸담았던 김기현이 2014년에 설립한 'Beasts And Natives Alike(이하 'BANA')'다. BANA는 힙합을 포함한 음악 외 패션과 전시, 영상과 공연 등 분야를 불문한 문화예술 콘텐츠를 기획, 제작하며 대중문화의 변두리에서 대중문화의 중심을 노리는 회사다. 흥미로운 건 뉴진스를 기획한 어도어(ADOR)의 대표 민희진과 김기현이 SM엔터테인먼트 재직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라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관습이나 정해진 틀을 거부하는 성향이 닮아 가까워졌는데, 당시 SM이 구축한 시스템과 추구한 방향에 동의하지 않은 탓에 둘은 회사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각자 구상했던 걸 펼치기 위해 따로 회사를 차린 건 그래서 우연이 아닌 필연에 가까웠다.


뉴진스는 그런 '이단아'들의 논의에서 잉태됐다. 민희진은 남과 다른 것을 해보려는 자신의 의지에 가장 공감해줄 파트너로 김기현을 선택했고  사람은  시간 소통하며 케이팝의 현재가  뉴진스의 미래를 그려나갔다.  과정에서 김기현이 세운 BANA 소속 아티스트들(250 프랭크) 뉴진스의 음악에 수혈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민희진은 예고 없이 250 대중의 면전에 들이민 '뱅버스' 뮤직비디오가 지닌 파격을 뉴진스의 프로모션(특별 행사 없이 뮤직비디오로만 그룹을 소개하는 ) 적용하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뉴진스의 성공은 사실상 ADOR BANA 합작품에 가까워 보였다.




이처럼 김기현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할 줄 알았다. 모름지기 인맥을 활용하려면 평소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상대에게 인지시켜두어야 하는 법. 서른 살이 되면 자신만의 힙합 레이블을 차리기 위해 회사를 떠날 것이라 말한 곳(SM엔터테인먼트)에서 BANA에 투자한 일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김기현은 SM의 대표이사 이성수가 과거 가장 선호했던 A&R 직원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김기현에게 인맥은 활용의 대상인 동시에 선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는 BANA에 소속된 애니메이션 감독 에릭 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픽사(Pixar) 출신 에니메이터로, 작품 <오페라>를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최종 후보에까지 올린 에릭 오는 김기현과 어린 시절부터 친분을 이어온 사이였다. 두 사람의 친분은 예술과 문화를 대하는 비슷한 태도, 즉 '다양한 영역에 걸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서 비롯됐다. 형식과 주제에서 자유로운 종합예술적 비전은 사실상 김기현이 오랜 기간 고민해온 비즈니스 모델이기도 하다. 김기현과 에릭 오가 서로를 선택한 이유다.


김기현은 주요 이력(A&R)에서 알 수 있듯 BANA의 대표이자 기획자, 제작자 겸 마케터이기도 하다. 무릇 좋은 기획자, 제작자, 마케터가 되기 위해선 재목을 가릴 눈이 있어야 하고 수작과 범작을 구분할 줄 아는 심미안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걸러지고 숙성된 완성품을 대중의 품에 잘 전달하는 일은 물론 탁월한 마케팅의 영역이다. 이것들을 두루 갖춰 자신만의 레이블을 만들기 위해 SM을 떠난 김기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아티스트는 이센스였다. '꽐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사이먼 도미닉과 뭉친 힙합 듀오 슈프림팀으로 인지도를 얻은 그는 다이나믹 듀오가 설립한 아메바 컬처와 계약 관계를 끝낸 2013년부터 구상한 솔로 데뷔작 [The Anecdote]를 준비할 즈음 BANA를 만났다. 김기현과 이센스는 사적으론 모르는 사이였지만 이센스의 가능성을 높이 산 김기현과 BANA의 콘셉트에 공감한 이센스의 만남은 시작부터 운명처럼 보였다.



최초 이센스의 첫 솔로 앨범은 해외 프로듀서 여러 명으로 꾸려갈 예정으로, 실제 이센스와 김기현 앞에는 300개가 넘는 곡들이 도착해 모니터링을 거칠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초기 힙합의 기운'을 원했던 이센스는 그 느낌을 가장 잘 살린 래퍼 출신 프로듀서 오비(Obi)의 비트에만 랩을 얹기로 한다. 오비는 BANA의 대표가 SM 시절 여러 해외 프로듀서들과 교류할 때 알게 된 인물로, 김기현은 프로듀서가 결정된 뒤 철저하게 제작자 겸 A&R로서만 이센스의 작품 구상을 거들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질 뻔 한다. 이센스가 앨범 발매를 앞두고 대마초 흡연 건으로 1년 6개월 실형을 살게 된 것이다. 옥중에서 앨범을 내느냐, 발매를 미루느냐. BANA와 이센스는 상의 끝에 전자를 택했다. 결과는 '대박'. [The Anecdote]는 2015년 8월 10일부터 일주일 진행한 예약판매 기간 동안 준비된 1만 6천 장이 모두 팔려나간다. 딥플로우가 나스의 [Illmatic]에, 허클베리피가 켄드릭 라마의 [To Pimp A Butterfly]에 견준 이센스의 솔로 데뷔작은 제13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고 2018년에 나온 책 <한국대중음악명반 100>에선 순수 랩 앨범으론 최고 순위인 56위에 오르며 예술성과 성취도를 함께 인정받았다. 이센스는 지난해 9월 "각자의 다음 챕터로 나아가기 위해" BANA와 계약 관계를 끝냈다.


BANA를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킨 [The Anecdote]에는 프로듀서 오디 외 이센스를 도운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김심야다. 김심야는 앞서 얘기한 프랭크와 힙합 듀오 XXX를 이끄는 래퍼로, 유력 매체인 피치포크는 그의 "분노로 펄펄 끓을 때 가장 훌륭"한 냉소적 래핑을 칭찬했다. 김기현은 XXX의 음악을 BANA 미디어팀으로부터 처음 소개받았다. 음원을 듣고 깜짝 놀란 그는 확신 끝에 같은 음악을 이센스에게도 들려주었고 이센스 역시 감탄사를 내뱉으며 멤버인 김심야를 자신의 앨범에 유일한 피처링 멤버로 받아들인다. 당초 게스트로 염두에 둔 "베테랑 래퍼 한 명"급으로 인정받은 신예 김심야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는 에피소드다. 결국 그가 속한 XXX는 데뷔작 [KYOMI]와 [Language] 1, 2탄으로 국내외 힙합 평단 및 팬들을 한꺼번에 들뜨게 했다. 그것은 이센스 현상에 이은, 250 현상 이전 BANA가 선보인 두 번째 '게임체인징'이었다.





BANA는 켄드릭 라마와 작업한 디 샌더스, 베테랑 래퍼 마스타 우, 언더그라운드에서 잔뼈가 굵은 DJ 겸 프로듀서 말립 등을 영입하며 처음 김기현의 목표였던 어엿한 '힙합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2021년 3월. 김심야가 버벌 진트, 이센스와 더불어 '대한민국 최고 래퍼 중 한 명'이라고 인정한 빈지노가 BANA에 합류한다. 알려진 대로 빈지노 역시 음악 외 미술, 사진에까지 두루 손 뻗는 종합예술가로 희소성을 넘은 유일무이함, 다양한 분야, 다른 결과물을 추구하는 BANA에 최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현재 솔로 2집 [NOWITZKI] 발매를 앞두고 지난 1월 싱글 'Trippy'를 발매한 상태다. 이센스를 보내고 빈지노를 얻은 김기현. BANA의 앞날은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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