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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May 23. 2023

메탈리카와 '다음 소희'


얼마 전 '다음 소희'라는 영화를 보았다. 2017년 전북 전주에서 일어난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었다. 거기엔 젊음의 아픈 희생이 있었고 청춘의 못다 이룬 꿈이 있었다.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은 함께 희생되거나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렸다. 같은 어른으로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바윗덩이 하나를 등에 짊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오래전 내가 즐겨 듣던 곡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무려 39년 전 노래임에도 곡이 지닌 느낌과 노랫말은 이 영화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바로 메탈리카의 'Fade to Black'이다.


지금은 헤비메탈계의 마이클 잭슨 같은 존재로 군림하고 있지만 천하의 메탈리카도 20대 초반엔 매우 어렵게 팀을 유지했다. 멤버 넷이 똑같은 2.99달러짜리 무제한 리필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웠고, 잠은 쥐가 들끓는 옛 가구 창고 바닥에서 청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멤버들이 수건 하나를 돌려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세계 최고 록 밴드라는 꿈이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젊었던 메탈리카는 현실의 무게에 억눌리는 대신 자신들이 현실을 만들어 가는 길을 택했다.



난 내 안에서 길을 잃었어 / 난 살아갈 의지를 잃었어 / 나를 자유롭게 하려면 끝이 필요해 / 고통의 공허함이 나를 채우네

'Fade to Black'에서


'Fade to Black'은 그렇게 힘든 날을 보내던 밴드가 보스턴에서 트럭을 도난당한 사연을 곡으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읊은 건 아니고, 어두운 마이너 멜로디와 상실의 노랫말은 4만 달러 분량 악기 및 장비를 잃은 멤버들의 망연자실을 옮긴 것에 가깝다. 위에서처럼 그 내용이 마지막을 앞둔 사람의 유서처럼 보이는 건 그만큼 멤버들의 마음이 죽고 싶으리만치 힘들었다는 뜻일 게다.


이처럼 'Fade to Black'과 '다음 소희'는 젊음 또는 자살에서 만난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청춘이 삶을 극단적으로 회의할 만큼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두 작품은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은 "사람은 고립된 상태에서 죽기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로 그걸 표현했고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그것을 "영웅적 의지를 봉인하는 행위"라고 썼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그 비극을 조악한 폭력성과 완전한 모순, 의미의 터무니없는 부재, 스타일의 전적인 결여라고 묘사했다.



물론  작품은 방관자에 머물지 않는다. 되레 부정을 부정해 희망을 찾는다. 사실 'Fade to Black' 발표 당시 청소년들에게 자살을 종용하는 곡이라며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듯 헤비메탈은 젊은이들의 분노를 생산적인 배출구로 바꾸는 것에 관한 예술이다. 듣는 사람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든, 사회의 기대와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든 헤비메탈은 그들에게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 메탈리카는 30   자신들의 곡을 듣고 살아갈 힘을 얻은 사람들로부터   통의 편지를 받고 기들 음악이 옳은 것이란  확신할  있었다.


'다음 소희'의 정 감독은 말한다. 주인공인 소희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힘든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가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그러니까 '다음 소희'라는 제목엔 '소희 다음'에 올 누군가를 걱정하는 감독의 마음이 담겨 있는 셈이다. 'Fade to Black'과 '다음 소희'는 젊음의 비극으로 젊음의 희망을 껴안은 예술의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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