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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May 26. 2023

'이름 없음'의 가치

정밀아 '무명'


나는 이미 나로 이렇게 존재하지만 늘 오롯할 수는 없어요. 이름이 있다는 것, 그 이름을 기억하고 또박또박 온기 담아 불러주는 것은 존재의 선명도를 줍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정밀아


밤바다 고요를 닮은 김형일의 호른 연주가 곡의 문을 조용히 연다. 40여 초 뒤 구교진의 더블베이스와 정밀아의 차분한 첫 소절이 "이른 어느 봄날 떠나지 못한 찬 겨울 끝 바람"을 데려온다. 신동진의 드럼은 솜털 같은 브러시로 최소한의 리듬만 일깨우고 2절부터 들어오는 정밀아의 나일론 기타는 적막에 가까웠던 음악의 미니멀리즘에 조건 없는 낭만을 입힌다.


무릇 사람이란 무언가를 이뤄야 이름을 남긴다. 그래서 어쩌면 '이름'은 '이룸'의 다른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꼭 무엇을 이룰 필요는 없다. 어차피 "온 산 뒤덮은 푸름"이란 "큰 나무만 아니라 무심히 밟고 가는 수많은 그냥 풀"도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곡은 그 풀들을 위한 노래다. 뭔가를 이룬 사람만이 아니라 그러지 못한 사람에게도 이름 하나는 있으니 "존재의 선명도"를 위해 정밀아는 "이름 없이 살다 이름 없이 가는" 사람들을 보며 삶의 오고 감(生死)을 노래한다. 그가 보기에 비록 이름은 남기지 못했을지언정 삶을 누리다 삶을 등지는 이들은 누구나 기억될 가치가 있다. 어느 시인이 썼듯 풀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때에만 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밀아는 시와처럼 시를 낭독하듯 또박또박 끊어 노래한다. 이 독특한 스타카토 창법이 그의 가사에 힘을 실어주고 음악은 또 그만큼 느긋하게 풀어진다. 남들보다 빨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재촉하는 세상에서 정밀아는 느려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노래로 들려주는 셈이다. 그런 그의 노래를 이해하기 위해 듣는 사람은 우선 인내해야 한다. 정밀아의 노래는 내가 느긋해지고 세상이 평온해져야만 들을 수 있는 노래다. 그렇게 달밤 구름 가듯 노래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노랫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며 깨닫게 된다. 단정한 여운 속 그의 노래가 강한 울림을 주는 건 그 안에 화자의 분명한 생각이 담겨 있고 또 단단한 설득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정밀아는 '무명'의 가사를 2014년 정규 1집 '그리움도 병'을 준비하던 즈음부터 썼다. 이후 노래는 약 5년이 지난 2018년 봄이 되어서야 선율이 붙어 지금 모습을 갖추었다. 이 곡은 같은 해 '전국 오월 창작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심사 측은 "돋보이는 완성도와 깊이,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비가 담긴 시적인 가사, 아름답고 잔잔한 흐름 속에 강한 이미지를 노래했다"는 평을 했다. 여기서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비", "잔잔한 흐름 속 강한 이미지"라는 말은 앞서 내가 쓴 "단정한 여운 속 강한 울림"과 결국 같은 말이다.


20세기 세계 인문학계의 거두였던 움베르토 에코는 "언어와 함께 노인들은 인류의 기억이 되었다"라고 했다. 나는 그 '언어'에 이름 없이 져간 수많은 노인들을 기억하자는 정밀아의 노랫말을 대입하고 싶었다. 무명 없인 유명도 없는 법. 숲의 푸름은 이름 없는 풀과 꽃들 덕분이다. 우리가 이 노래를 통해 기억해야 할 단 하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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