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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pr 25. 2023

21세기를 열어젖힌 서태지의 메탈 그루브

서태지 '울트라맨이야'


2000년 9월 9일. 솔로 1집('아이들' 시절에서 따지면 5집)을 내고 두문불출하던 서태지가 6집을 들고 돌아왔다. 사실 '컴백홈'을 만든 서태지는 가수 컴백의 원조였다. '하여가' 때부터 마케팅 차원에서 기획했을 이 신비롭지 않은 신비 전략은 그러나 꽤 잘 먹혔고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그 전략에 넘어가 서태지 새 앨범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남몰래 가슴 설레하곤 했다. 23년 전, 그때도 그랬다.


구멍 난 파란 비닐우산을 든 남자아이를 부감 숏으로 잡은 카메라가 조금씩 내려온다. 아이가 보고 있던 건 1966년 일본에서 첫 방송된 슈퍼히어로물 '울트라맨'이었다. 화면이 바뀌고 은빛 바지에 붉은 운동화, 붉은 마이크로 브레이즈(Micro Braids) 머리를 한 남자가 화면 밖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마이크 앞에 측면으로 선 서태지. 카메라가 그의 신발부터 머리까지 훑은 뒤 대뜸 스피커가 출렁이며 곡은 시작한다. 미국 뉴메탈 밴드 콘(Korn)을 빼닮은 기타 리프, 림프 비즈킷이 즐겨 쓰던 신경질적인 디제잉 스크래치가 곁들여지고 (콘이 주로 하는) 구부정한 헤드뱅잉을 포함해 멤버 모두의 광적인 퍼포먼스가 짧게 요동 친다. 곡의 도입부는 이처럼 '당신들 스트레스 내가 다 가져갈게'라는 듯 시원하고 파괴적이었다. 그리고 들어가는 노래.


마이크 체크 원, 투 / we are the youth youth youth / 항상 못된 내겐 truth truth truth / 내게 미쳤다고 그래 모두 그래 / 다들 그래 맞어 그래 난 더 미치고 싶어


심상치 않았다. 새 세기가 시작되고 나타난 서태지는 '너에게'를 부르던 여린 서태지보다 '교실이데아'를 부르짖던 화난 서태지에 더 가까웠다('너에게'는 강력한 록 버전으로 변해 6집 보너스 트랙으로 실렸다). '맨이야'와 '마니아(Mania)'를 중첩시킨 '울트라맨이야'는 이 세상 모든 '덕후'들을 응원하는 곡이면서 2집의 '우리들만의 추억'처럼 서태지가 팬들에게 헌정한 곡이기도 했다. 그러나 훈훈함도 잠시. 6집을 두고 표절 시비가 일었다. 앨범 전체 느낌이 콘과 림프 비즈킷의 판박이라는 얘기다. 곡에 따라선 툴(Tool)과 콜 챔버(Coal Chamber)도 거론되었다. 물론 서태지 음악에서 표절 논란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서태지를 둘러싼 카피와 표절 소동은 1집 때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부터 '소격동'의 처치스(Chvrches)까지 그의 작품들마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와 관련해 나는 서태지 데뷔 25주년을 기념한 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표절 시비가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서태지는 늘 특정 시기 특정 장르에 영감을 받아 그 장르를 소화시키는 식으로 자신의 창작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의심과 비판은 그의 음악이 감내해야 할 숙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표절은 남이 만든 작품의 부분 또는 대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것처럼 속이는 것인데 반해, 서태지는 다른 뮤지션의 분위기와 스타일만 빌려와 재조합해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 서태지의 음악을 표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심증만 가졌지 물증은 없다. 뭔가 비슷하긴 한데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비슷한 지를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못한다. 좋게 말하면 서태지가 영리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의 작법이 교묘한 것이겠다."



이어 나는 "서태지는 없던 장르를 개척하는 뮤지션이 아니라 있던 장르들을 요리해 그 안에 자신의 생각과 감성을 녹이는 뮤지션"이라는 말로 그의 표절 시비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그 입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서태지의 표절을 지적하려는 쪽은 논리와 근거를 들고 문제 제기를 하면 될 일이고 서태지 쪽에서도 그 문제 제기에 대한 해명을 하면 될 일이다. 복잡할 게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6집만큼은 그 논란에서 자유로웠으면 싶다. 왜냐하면 이건 콘과 림프 비즈킷이라는 공공연한 레퍼런스가 있었던 경우이고, 그래서 닮기 싫어도 저들과 닮을 수밖에 없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누구와 닮겠다 작정하고 만든 음악이 의도대로 닮게 나왔는데 '베꼈다'라고 몰아붙이는 건 논점 일탈이다. 기존 체제에 반기를 든 '탱크', 록만 좋아했던 자신의 과거 편협한 음악 취향을 자조한 '오렌지', 발전이란 명분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 정치 세력들의 "무가책"을 겨냥한 '대경성', 익명의 온라인 문화 병폐를 일갈한 '인터넷 전쟁', '탱크'와 더불어 서태지가 따로 아낀다는 'ㄱ나니' 등 기타 톤만 두 달을 잡고 프로그래밍으로 짠 드럼 연주를 실연(實演) 샘플로 일일이 추출해 엮은 이 탁월한 작품에 무작정 의심의 눈초리만 보낼 일은 아니다. 이 작품만은 그렇게 매도되어선 안 된다.




*이 글은 졸저 <지금 내게 필요한 멜로디>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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