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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Jul 14. 2023

비만 오면 생각나는 그 노래

'비오는 날 수채화' 강인원, 권인하, 김현식


때론 영화보다 더 유명한(또는 영화보다 더 잘 만든) 영화음악들이 있다. 가령 믹 잭슨 감독의 '보디가드'에 흐른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나 마이클 베이가 연출한 '아마겟돈'을 떠다닌 에어로스미스의 'I Don't Wanna Miss A Thing'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반면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 개론'과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뤼크 베송 감독의 '레옹'에 눈물처럼 삽입된 스팅의 'Shape Of My Heart'는 영화도 음악도 모두 선방한 사례로 기억된다.


강인원이 쓴 '비오는 날 수채화'는 전자, 즉 "영화보다 더 잘 만든" 노래였다. 나중에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는 곽재용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동명 영화는 사실 완성도 면에서 그리 주목할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음악은 달랐다. 권인하가 부른 '오래전에'와 김현식이 부른 '그 거리 그 벤취'(이 노래는 이듬해 발매한 김현식 5집에도 실린다), 둘이 함께 부른 '비오는 날 수채화'가 수록된 영화의 OST 앨범은 1990년 한국노랫말연구회가 주최한 '90 한국 노랫말 대상'에서 대상을 거머쥔 타이틀 곡을 앞세워 벼락같은 인기를 끌어낸다.


1983년 제대한 권인하는 친구 소개로 만난 강인원과 함께 서울스튜디오에 들렀다. 당시 그곳에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과 김명곤이 작업에 한창이었고 김현식 역시 끝방에서 '어둠 그 별빛'을 녹음(기타 더빙 중이었다고 한다)하고 있었다. 권인하는 거기서 김현식을 만나 이후 '비오는 날 수채화' 앨범을 만들 때 늘 동부이촌동으로 차를 몰고 가 그를 픽업해 스튜디오로 가곤 했다. 강인원이 김현식에게 "영화 주제곡 하나 할래?" 제안한 곳도 바로 그 동부이촌동이었고 김현식이 "어, 재밌겠다. 하자!"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곳도 동부이촌동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비오는 날 수채화'를 처음엔 쩌렁쩌렁한 권인하와 끈적이는 김현식이 듀엣으로 부를 곡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진 김현식이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소절까지 소화해내는 건 무리였다. 결국 믹싱 과정에서 곡을 만든 강인원이 합류했고 TV나 공연에서도 둘이 아닌 셋이 무대에 오르게 된다.



녹음 과정에서 중요한 변동을 겪은 '비오는 날 수채화'는 사실 창작 과정에서도 부침이 있었다. 일단 제목부터가 난감했다. 비오는 날 그리는 수채화는 무조건 번지기 때문이다. 강인원은 이 모순적인 제목을 놓고 밤새 노랫말을 고민했지만 마땅한 걸 떠올리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코드만 만들어 고양시 벽제에 있던 녹음실로 갔다. 결국 떠오르지 않던 가사는 가이드 송을 부르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그걸 마냥 '즉흥'이라고만 할 수 없는 건 과거 강인원이 한 인터뷰에서 "이 노래는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충격과 실망에 사로잡혀 집안에 석 달간 칩거하며 만든 노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덧붙여 '비오는 날 수채화'에 "배신이 없는 그림같은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았다고도 했다. 강인원의 당시 참담했던 심정은 권인하가 부른 이 OST의 첫 곡인 '오래전에'의 가사("오래전에 너와 내가 꿈꾸었던 나라 / 슬픔도 아름다웠지 / 희망 때문에 (...) 오래전에 꿈꾸었던 나라 / 잊을 순 없잖아 / 버릴 순 없잖아")에도 잘 묻어나 있다. 실제 '오래전에'의 원래 제목도 괄호 안에 쓰여 있던 '변해버린 친구에게'였다.


영화 '비오는 날 수채화' 사운드트랙은 강승혁이 쓰고 신형원이 부른 '커피향 가득한 거리'와 시인 김용범이 쓴 노랫말에 강인원이 곡을 붙여 부른 '비옷을 입은 천사'를 뺀 모든 곡이 강인원 한 사람의 감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 OST는 음반 재킷 사진을 함께 채운 신형원, 권인하, 김현식이 객원 가수로 참여한 사실상 강인원의 솔로 앨범이었다. 민해경과 이상은의 히트곡들을 써내며 작곡가로도 성공한 싱어송라이터 강인원. 마냥 꽃길이었다고만 할 수 없을 그의 우여곡절 음악 인생에서 정점이라면 역시 대학가, 방송가의 러브콜을 받으며 '비오는 날 수채화'를 부르고 다닌 89~90년도가 아니었을지. 그도 팬들도 아직 그 좋았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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