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에게 공연은 생방송이다. 편집할 수 있는 영화보다 편집할 수 없는 연극에 더 가깝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습은 평소보다 배로 요구되고, 해당 연습은 실전처럼 진행된다. 케이팝 아이돌의 경우, MR이 아닌 밴드가 함께라면 더 그렇다. 이 경우 맞추어야 할 합도 배로 늘어난다. 공연장은 그들의 꿈을 이루는 가슴 설레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전사후로 모든 걸 갖추고 공개하는 뮤직비디오 밖으로 뛰쳐나와 날 것으로 마주하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진짜 실력을 보여줄 시간인 것이다.
지난 8월 3일 걸그룹 아이브가 유서 깊은 롤라팔루자 티-모바일(T-Mobile) 스테이지에 섰다. 오후 5시, 뉴질랜드 일렉트로닉 밴드 레저(Leisure)와 미국 얼터너티브 메탈 밴드 데프톤스 사이에서 45분이라는 시간을 배정받은 이들은 19개국 27개 도시를 돌고 있는 월드투어 사이사이 다져온 ‘실전 같은 연습’ 결과를 자신들의 열한 개 레퍼토리를 통해 전 세계 ‘다이브’ 앞에서 펼쳤다.
본무대 전, 멤버 소개 영상부터 반응이 심상치 않다. 곧이어 유튜브로만 만나오던 아이브가 눈앞에 나타나고, 안유진의 가창이 돋보인 ‘I AM’으로 그룹은 가뿐하게 몸을 푼다(안유진은 공연 내내 탄탄한 가창력을 뽐냈다.) 이어진 ‘ROYAL’의 록 버전은 따로 녹음해 싱글로 내놓아도 좋을 만큼 힘이 넘쳤는데, 힘의 근원인 밴드 연주는 이날 아이브의 무대를 받쳐주는 서까래 역할을 확실히 해냈다. 최근 곡 ‘Accendio’로 바이브를 살짝 가라앉힌 뒤 관중에게 멤버 소개 및 인사를 건넨 아이브는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장원영의 제안으로 ‘Off the Record’를 이어간다. 내가 따로 애청하는 이 곡은 예의 산들바람 같은 그루브로 현지의 폭염을 달래주듯 들렸다.
발표 당시 그룹과는 다소 이질적인 느낌을 준 ‘Baddie’의 트랩 비트와 ‘ELEVEN’의 록 비트가 어우러지고, 공연은 잠시 뮤직비디오 메들리를 빌려 그룹의 휴식을 허락한다. 다시 무대에 선 아이브는 근작 ‘IVE SWITCH’의 타이틀 곡 ‘해야 (HEYA)’를 지나 ‘After LIKE’, ‘LOVE DIVE’라는 팀의 시그니처 송 두 곡을 작렬시킨 뒤 밴드의 헤비한 간주, 안무 팀의 짧고 힘찬 퍼포먼스를 매개로 ‘Kitsch’까지 내리 쏟아내며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일궈냈다. 마지막 곡은 지난 1월에 발매한 스웨덴 신스팝 듀오 아이코나 팝(Icona Pop)의 리메이크 ‘All Night’를 선택해 시카고에서의 마무리와 일본(서머 소닉 페스티벌)에서의 다음 공연 사이에 서린 감정을 최적으로 표현해 냈다.
음악의 본질은 공감이다. 공감은 언어로도 가능하지만, 다양한 언어권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언어는 자신의 역할을 음악에게 맡긴다. 19~20세기 영국 작곡가 프레더릭 딜리어스의 말이 맞다면 “음악으로 표현할 가치가 있는 것은 다른 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아이브는 이날 45분 동안 공감이라는 음악의 가치를 시카고에 남기고 떠났다. 세트리스트도 라이브 실력도, 심지어 공연을 이끄는 멘트까지 모두 알차고 매끄러웠다. 이제 데뷔 3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걸그룹으로선 대견하리만치 선방한 무대였다.
경쟁을 일상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회여서일까. 일각에선 잘했지만 뉴진스엔 미치지 못했다는 말들이 들린다. 무모한 비교다. 두 팀은 우위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의미 있는 무대를 각자 치러냈다. “지금까지 아이브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멤버가 손잡고 한국말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순간 벅찬 감동을 주체 못 한 듯 울음을 터뜨린 리즈. 지난 8월 3일은 그저 잘했고 수고했다는 말이면 족했을 아이브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