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3일,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남녀가 도시 야경을 바라보는 뒷모습이다. 마룬 파이브의 계정이었으니 남자는 애덤 르빈일 터다. 사람들이 궁금해 한 건 그 곁의 여성이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팬들은 실루엣만 보고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리사였다. 리사는 지미 팰런의 ‘투나잇 쇼’에 출연해 코첼라 무대 이후 일정이 마룬 파이브의 스튜디오에서 이어졌다고 털어놓았다. 애덤은 4월 초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올여름 정도에 나올 마룬 파이브의 새 앨범과 연말쯤 보고 있는 투어 계획을 밝혔다. 리사와의 투샷으로 예고한 신곡 ‘Priceless’는 신보의 첫 싱글이었다. 2021년 ‘Jordi’ 이후 4년 만. 국내 언론에선 “장벽을 깼다”라는 말로 이번 콜라보레이션을 표현하고 있다. 그 ‘장벽’에는 국경과 함께 장르도 포함됐다. 첫 케이팝 아티스트와의 협업이기도 하거니와, 마룬 파이브는 기본적으로 록 밴드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데뷔작 ‘Songs About Jane’을 마르고 닳도록 들은 나에게도 마룬 파이브는 록 밴드였다. 팀의 전신이었던 카라스 플라워스(Kara’s Flowers) 때부터 그랬고, 2004년도에 발매한 라이브 미니앨범 ‘1.22.03.Acoustic’에서도 AC/DC의 ‘Highway to Hell’을 깨알 같이 커버하며 그들은 록 밴드로서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 2집 ‘It Won't Be Soon Before Long’까지도 그들은 멜로딕 팝록 사운드를 고수했다. 그들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다음 앨범 ‘Hands All Over’부터였다. ‘Misery’와 ‘Give a Little More’, 타이틀 곡 ‘Hands All Over’ 등은 1, 2집 팬들을 안심시켰지만 ‘Just a Feeling’이나 컨트리 그룹 레이디 A(Lady A)가 피처링 한 ‘Out of Goodbyes’는 마룬 파이브의 다른 미래를 넌지시 비추고 있었다.
마룬 파이브의 터닝 포인트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피처링 한 일렉트로팝 트랙 ‘Moves Like Jagger’였다. 이 곡에 록은 없었다. 록과의 연관성은 곡 제목에 초대된 롤링 스톤스의 프런트맨 믹 재거가 전부였다. 밴드의 핵심인 애덤은 이즈음 일렉트로닉과 힙합에서 대중음악의 혁신을 목격했다. 애덤은 늘 트렌드를 살피는 음악가였다. 90년대에 펑크 록을 좋아했을 때도 “안 돼, 이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2012년작 ‘Overexposed’를 기점으로 마룬 파이브는 그렇게 주류 음악이라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Payphone’에서 위즈 칼리파의 랩을 들은 록 근본주의자들은 아마 이때부터 마룬 파이브를 멀리 했으리라. 하지만 밴드는 보란 듯 다음 앨범 ‘V’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까지 올랐다. 록을 하던 밴드가 록을 버리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보수적 집단을 등지고 개방적인 대중에게 다가선 끝의 결실이었다. 애덤 르빈은 하나만 추구하는 건 갇히고 도태되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6집 ‘Red Pill Blues’ 활동 때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애덤은 이렇게 말했다. “게임을 즐기고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의 생각엔 신경을 덜 쓰게 되고 밴드에 옳은 일을 하게 됩니다 (...) 영국에선 이런 말을 하면 저를 싫어하겠지만, 로큰롤이 아직 살아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애덤은 덧붙여 “록 음악에는 여전히 아티스트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코너에 몰아넣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며 록 밴드에 대한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지적했다. 이렇게 하면 안 돼, 저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은 이제 너무 지겹다는 애덤. 그는 자신의 밴드가 레드 제플린이나 후(The Who)처럼 대놓고 거대한 명성을 추구했던 밴드들과 같은 길을 걷길 바랐다. “1991년쯤부터 성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멋있지 않은 일이 된 것 같은데, 그건 제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어리석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덤과 마룬 파이브는 록보다 성공을 갈구했다.
이후 마룬 파이브는 시저(SZA), 에이셉 라키, 허(H.E.R.), 그웬 스테파니, 켄드릭 라마 등과 함께 하며 거침없는 장르 깨기, 주류 정복을 감행했다. 특히 래퍼 카디 비가 출연하는 ‘Girls Like You’ 뮤직비디오는 토크쇼 진행자이자 코미디언, 성소수자 운동가인 엘런 드제너러스를 포함한 25명 여성들이 출연해 현재까지 유튜브 38억 뷰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Daylight’ 때부터 시작된 마룬 파이브식 감성 비디오의 정점이었던 ‘Girls Like You’ 뮤비는 여성과 남성이 동맹으로서 서로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아, 마룬 파이브라는 밴드가 음악의 트렌드를 넘어 정서적 트렌드까지 좇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번 리사와의 콜라보도 그 모든 상황의 연장선에 있다. 비록 공연으로는 한국을 많이 찾았지만, 저들이 케이팝을 통해 한국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무릇 피처링이라는 건 아티스트 각자의 필요에 의한 전략일 때가 다반사인 법. 물론 의뢰한 쪽과 연락을 받은 쪽 서로의 예술적 호감과 흠모에서 비롯될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도 협업을 둘러싼 ‘물밑 계산’은 확고하다. 어쨌거나 아티스트가 함께 한다는 건 사업적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애덤과 리사의 경우, 일단 서로의 명성이 매력적이었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특히 리사는 같은 팀의 제니, 로제가 했듯 빅네임을 피처링 상대로 삼아 케이팝 아이돌에서 글로벌 아티스트로의 진화가 자신의 현재진행형이라는 걸 보여주길 원했을 거다. 당연히, 마룬 파이브의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거절했을 일이지만.
‘Priceless’는 단순하고 세련됐다. 데뷔 때부터 마룬 파이브가 잘했던 펑키 기타 스트럼(strum), 그 옛날 ‘Harder to Breathe’처럼 스네어(snare) 드럼으로 들이치는 인트로와 매끈한 비트 앞에서 장르 구분이라는 구태의연한 딴죽은 화들짝 뒷걸음친다. 이 곡을 음악, 가사, 애덤과 리사의 콜라보 배경 등에 빗대 조목조목 리뷰한 해외의 한 블로거는 “압도적이지 않으면서 매력적이고, 공허하지 않으면서도 경쾌”하다고 썼다. 이는 첩보 로맨스를 방불케 하는 뮤직비디오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묘사였다. 재밌는 건 마룬 파이브의 곡임에도 “말이야 쉽지(talk is cheap)”로 시동을 거는 리사의 두 번째 버스(verse)부터 곡은 완전히 리사의 페이스가 된다는 점이다. 이 버스를 지나 곡이 끝날 때까지 맞물리는 애덤과 리사의 보컬 화음은 그야말로 절경인데, 마룬 파이브가 리사를 원한 이유 또는 리사가 이 밴드의 음악 안에서 어떤 여지를 보았는지가 그 안에서 모두 밝혀진다. 앞선 해외 블로거는 ‘Priceless’ 가사 내용을 두고, 레빈이 진지한 헌신을 얘기할 때 리사는 자신의 자존감과 진정한 감정 교감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고도 썼다. 즉 “물질적 부를 초월한 헌신”을 노랫말에 담아냈다는 평가다.
애덤은 ‘인디펜던트’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했다. “(장르 팬들의) 혐오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익숙해지도록 오래 버티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마룬 파이브의 가장 멋진 점은 우리가 특정 한 시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번 리사와의 콜라보 곡은 저들의 의지와 가치를 동시에 지켜냈다.